3화
퇴근하고 돌아온 집으로 돌아온 김유리.
“다녀왔습니다.”
“왔나?”
“아빠. 오늘 일찍 왔네?”
“일이 좀 빨리 끝났다.”
거실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TV를 보고 있었다.
영신 그룹의 이사이자 지종윤 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회사 내 실세, 김진철 이사.
김유리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얘기 들었다. 오늘 그 망할 녀석을 데리고 회사에 왔다며?”
“어? 어떻게 아셨어요?”
“회사에 보는 눈이 많다.”
“…….”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에 김유리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도련님, 아니, 지태훈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 망할 녀석은 무슨 일 때문에 회사에 온 거라더냐? 또 회장님한테 용돈 달라고 온 거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역시 그럴 줄…… 뭐?”
김유리도 오늘 하루 이상한 일로 가득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에는 지태훈이 있었다.
갑자기 해장으로 순댓국을 먹지 않나.
그러고는 갑자기 회사로 가서 회장님을 만나 뵙고 오지 않나.
더욱 가관인 건 그다음이다.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 이사로 발령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냐?”
“아버지는 알고 계셨죠?”
김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저한테 말해주지 않으셨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유리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러자 김진철은 헛기침을 하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놈은 뭐라더냐?”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도와달라고 했다고?”
“네.”
그 순간 김유리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낯 뜨거움을 느꼈다.
-김 비서. 조만간에 나는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이사를 맡게 될 거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아니, 회장님의 명령이야. 조만간 공식 발표가 있을 거고.
-세상에.
-그래서 말인데, 김 비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네?
-내가 지금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 비서밖에 없어.
-……!
-그동안 날 도와준 것도 고마워. 하지만 앞으로도 더 많이 날 도와줘야 해. 부탁할게.
“…….”
지금까지 지태훈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김유리는 그런 그가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렸다.
‘정말 달라지려는 건가?’
망나니 지태훈.
영신그룹에서도 손을 놨다는 그 망나니다.
그런 지태훈을 모시는 김유리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여기저기서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손을 뻗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어쨌든 자신이 모시는 지태훈이 잘 되기를 바라며 성심을 다해 보좌했다.
그랬던 그녀가 평소와 다른 지태훈의 모습을 보고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저 이만 들어갈게요.”
“…….”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김진철은 못마땅한 눈빛을 드러냈다.
* * *
“할 일이 많아.”
내가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기사화되어 발표됐다.
이 소식에 영신그룹과 고양 유나이티드 모두 술렁였다.
“도련님.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일로 악의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고 있어.”
그룹 내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망나니가 구단 대표이사로 부임한다고 하는데 조용한 게 이상한 일이다.
대놓고 욕하지는 못해도 충분히 뒤에서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나는 별로 이런 걸로 신경 안 써.”
“……변하셨네요.”
“음? 뭐가?”
“옛날이면 욕하는 사람들 두들겨 패야 한다고 난리를 치셨을 텐데 말이죠. 실제로 야구방망이 들고 영신 그룹 직원 패려고 했을 때는…….”
“어허! 김 비서, 그거 다 옛날 일이야. 이제 그러지 않아.”
회귀 전,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내 행동을 보고 지적하는 직원을 향해 폭력을 휘두를 뻔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그룹 내에서 일을 무마시켰기 때문에 크게 번지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직원한테 너무 미안하다.
“나중에 진심으로 사과하러 가야겠다.”
“네?”
“아니야. 그것보다 내가 지시한 일은 다 됐어?”
“네. 조사해달라고 한 명단입니다.”
“좋았어.”
나는 김 비서가 정리해준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김 비서가 정리해준 자료는 훌륭했다.
“아주 좋아! 잘했어! 김 비서! 덕분에 도움이 됐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 명단은 왜 필요하신 겁니까?”
“앞으로 내가 대표이사가 되면 귀중하게 쓰일 명단이거든.”
내 손에 있는 이 명단은 현재 고양 유나이티드에 속한 직원들의 간단한 신상명세가 담긴 명단이었다.
앞으로 살생부가 될 명단이기도 하다.
“어디 보자. 지금 단장이 허재우 단장이네?”
“네. 허재우 단장은 과거 영신 그룹에서 기획팀 본부장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보통 축구팀 단장은, 축구인 출신들이 맡지 않나?”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단장 허재우.
회귀 전, 고양 유나이티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었다.
허재우 단장은 그런 나에게 온갖 아첨을 했었다.
거기에 혹해서 희희낙락했던 나도 문제가 많았지만.
허재우는 단장으로서 능력이 쥐뿔도 없다.
무엇보다 축구인 출신도 아니다 보니, 축구 업계에 대해 무지했다.
오로지 본인의 욕망으로만 구단을 이끌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내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건 딱 하나다.
허재우는 바로 큰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허재우는 큰형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큰형은 그룹 내 프로스포츠를 정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스포츠 구단 폐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일환으로 자신의 심복인 허재우를 단장으로 보내 구단을 망하게 만들었다.
구단을 망가뜨리려는 이유는 딱 하나다.
영신그룹이 더 이상 스포츠에 투자하지 않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외부에 보이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큰형에게는 명분 또한 상당히 중요했다.
허재우를 앞세워 ‘이것 봐라. 우리가 해도 안 되는 구단이다. 더 이상 우리의 투자는 의미가 없다.’라고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 또한 엮여 버린 것이다.
실제로 회귀 전, 큰형은 단장 허재우를 통해서 나와 고양 유나이티드를 한꺼번에 성공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련님?”
당황한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통해 차갑게 굳어진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서.”
내가 희희낙락 망나니 대표이사 노릇 하는 동안, 큰형은 허재우를 통해 대규모 비리를 만들어 터트렸다.
그렇게 해서 터진 사건이 바로 ‘고양 유나이티드 게이트 사건’이다.
대규모 분식 회계 장부가 드러나며, 나는 그 사건의 중심인물로 찍혔다.
익명의 내부 인사가 내가 지시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익명의 내부 인사는 허재우였다.
나는 억울했다.
전혀 알지도 못한 일에 휘말렸으니 말이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영신 그룹에 도움을 청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였고, 큰형이 기업 총수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큰형은 그때 대국민 사과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영신 그룹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는 기업입니다. 어떠한 말도 변명일 뿐입니다. 저희는 법의 심판을 존중하고 수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징역형을 확정 받고 교도소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고양 유나이티드는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큰 징계를 받고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다.
해체 안 당한 게 다행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완전히 버림받은 거였지.”
그런데 그때의 나는 전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형이라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만간에 나를 교도소에서 꺼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큰형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헛된 생각일 뿐이었다. 아니, 너무 철없는 생각이었다.
‘다시는 그렇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는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킬 거다. 아니, 단순히 밥그릇 지키는 선에서 끝날 생각은 없다.
“김 비서.”
“네?”
“나, 영신 그룹 총수 자리 한 번 노려볼까 해.”
“네!?”
놀란 김 비서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김 비서를 보며 나는 씩 웃고 있었다.
나, 지태훈.
이 시간부로 영신 그룹 총수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생존과 복수를 위해서!
* * *
고양 유나이티드에 새로운 대표이사가 오는 날.
구단 내부는 유난히 술렁이고 있었다.
“이번에 오는 신임 대표이사님이 그룹 내에서 알아주는 망나니라면서요?”
“말도 마. 그 많은 대표 이사 후보들을 모두 내치고 선임한 게 망나니라니.”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게 말이다. 하아.”
직원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배가 불룩 튀어나온 머리가 벗겨진 40대 남자가 고함을 치며 등장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읏! 다, 단장님.”
“새로운 대표이사님이 오시는 날이야! 다들 처신 잘하라고!”
단장 허재우.
구단 내에서 대표이사 다음으로 제일가는 권력가다.
하지만 구단 직원들 중에서 그를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형적인 간신배인 그는, 오로지 본인의 성과를 위해 직원들을 굴리고 폭언과 희롱을 아끼지 않은 위인이었다.
“유 대리. 오늘 스타킹 신은 다리가 보기 좋구먼.”
“단장님! 그거 성희롱입니다.”
“어허! 성희롱이라니! 나는 칭찬한 거야. 칭찬. 상사가 부하직원 칭찬도 못 하나?”
“…….”
유 대리라 불린 직원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재우는 관심없다는 듯 할 말만을 했다.
“됐고. 오늘 대표이사님 취임식 문제없게 잘 진행하고 있지?”
허재우 단장은 오늘 취임식에 잔뜩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룹 망나니가 꼴에 아버지 힘으로 젊은 나이에 대표이사가 됐다. 성대하게 취임식을 해주면 희희낙락하며 좋아하겠지. 그러면…….’
입맛대로 녀석을 굴리기 쉬워질 거다.
그러면 지태완의 명령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마침내 신임 대표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이사님 오셨습니다!”
최신형 벤츠 마이바흐가 구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중 나온 직원들은 마이바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마이바흐라고?”
“와, 마이바흐를 눈앞에서 보네!”
일반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고급 차량이다. 그런 차 뒷좌석에서 한 인물이 내렸다.
바로 지태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되어 있는 지태훈의 등장에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런 구단 직원들을 향해 지태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고양 유나이티드의 신임대표를 맡은 지태훈이라고 합니다.”
* * *
예정대로 취임식은 성대하게 진행됐다.
취임식을 무사히 마친 지태훈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만족스러운 취임식이군요. 이 일을 기획하신 분이 누구시죠?”
그 말에 직원들 사이에 있던 허재우 단장이 황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접니다. 대표님.”
“그래요? 음, 허재우 단장님이라고 하셨나요?”
“네, 네, 맞습니다.”
허재우는 역시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구나 생각하며 절로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지태훈의 말에 허재우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매우 훌륭한 취임식입니다. 그럼 대표이사 권한으로 보상으로 ‘해고’를 드리죠.”
“네?”
“못 들으셨습니까? 그럼 다시 말하죠.”
넥타이를 가볍게 고쳐 맨 지태훈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허재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해고’라고!”
“……!”
“빨리 안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