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회사까지 찾아온 게냐?”
영신 그룹의 현(現) 총수이자 2대 회장인 지종윤은 근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71세인 그는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주름이 있어도 호랑이 같은 눈매와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예전 같으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달라.’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큰형 지태완도 아버지만큼은 굉장히 어려워했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나는 살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버지. 나 궁금한 게 있어서 왔죠.”
“용돈 달라는 거면……음? 네가 궁금한 게 다 있더냐?”
아버지는 내가 또 용돈 달라고 할 줄 알았나 보다.
하긴, 이때 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서 생활했었지.
근데 아버지가 용돈을 적게 주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작정 돈 많이 줬던 아버지의 교육 방식도 문제가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나는 오늘 아버지를 만나러 온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가까운 김 비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해야 할 순간이 왔다.
“아버지. 나,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 이사로 보낸다는 거…… 사실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버지가 상당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분이, 이 순간만큼은 드러내는 것을 보니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인가 보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끙. 그래서 뭐가 문제더냐?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영신 그룹 사람이라면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대로였다.
내가 회귀를 한 시점이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 이사로 가는 것이 확정되던 그 시기였다.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기도 하다.
“혹여나 반대할 생각하지 말거라. 이미 다 결정 난 거니까.”
아버지는 내가 강하게 반발이라도 할까봐 그렇게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은 나에게 큰 기회라고 여겼으니까.
“반대 안 해요.”
“음? 정말이냐?”
“네. 아버지의 깊은 뜻을 어떻게 반대합니까. 자식 된 입장으로, 부모님 뜻에 따르는 게 맞죠.”
“……너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지?”
“사고는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김 비서에게 들었다. 어젯밤에 클럽 갔다 왔다며? 혹시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그건 아니고요.”
기억도 나지 않은 일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준 거야?
설마 김 비서인가?
물론 난 어제 클럽을 다녀왔다.
하지만 그건 회귀하기 전의 나일 뿐이다. 회귀 후의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제발 철 좀 들거라. 남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느냐?”
“아버지는 제가 부끄러워요? 그래도 소중한 자식인데?”
“부끄럽다.”
“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지는데?
에이, 됐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버지.”
“음?”
“형이 얘기한 거죠?”
“뭐를 말이냐?”
“저를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 이사로 보내자고 의견 낸 사람.”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다.
회귀 전, 김 비서가 보내줬던 편지를 통해서 알게 된 진실 중에는 형이 나를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이사로 보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태완이는 널 많이 생각하고 있다.”
“알고 있어요. 다만 지나칠 정도로 생각해줘서 문제일 뿐이죠.”
지태완은 굉장히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회귀 전,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영신 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편지에서는 지태완은 총수를 넘어 대통령까지 노리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 형이 그토록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는 말이야.’
지금까지 형이 보여줬던 태도들은, 굉장히 인품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허나 편지에 의하면 그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김 비서가 거짓말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 여부를 판단해야만 했다.
단순히 편지에 적힌 내용만 믿기엔 그동안 녹록지 않은 일들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하나씩 편지 내용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아버지. 고양 유나이티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
“그럼 아버지는 내가 그 팀을 이끌고 무엇을 바라죠?”
“글쎄다. 지지고 볶고 알아서 해라. 나는 네가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니까.”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이 듣는다면 분노할만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안 그래도 진하게 망해가는 구단에 망나니 아들을 사람 만들기 위해 보낸다고?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느냐?”
“예. 아버지도 바쁘실 거 아닙니까. 명색이 대기업 총수이신 분인데.”
“…….”
“정식으로 대표 이사 확정 공고문 뜨면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나는 그렇게 말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 * *
“변했어.”
지종윤 회장은 자신을 찾아온 철없는 막내아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겉으로 보면 무엇이 달라졌느냐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그룹 총수로서 활약하면서 쌓아왔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변했다고.
실제로 막내아들 녀석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전히 말투는 틱틱 대는 면이 있었지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라보는 눈에는 총명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말에는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막내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지종윤 회장은 막내아들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실을 알지 못해도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비록 서자이기는 해도, 사랑하던 사람과 사이에서 나온 소중한 자식이다.
“그래, 태훈아. 어디 한 번 이 애비 마음을 들뜨게 해보거라.”
지종윤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 * *
“도련님. 회장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김 비서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 비서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저냥 얘기 나눴어.”
“용돈 달라는 얘기요?”
“그런 거 아니야.”
“우와. 웬일이세요? 늘 회장님만 뵈면 용돈 달라고 하셨잖아요.”
“이제는 안 그래. 딱히 그럴 생각도 없고.”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운전하고 있는 김 비서의 옆모습을 슬쩍 쳐다보았다.
전형적인 오피스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청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8살이었던 당시, 그녀를 처음 만났었다.
아버지인 지종윤 회장의 손에 이끌려 영신 그룹 집안으로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 뒤 그녀가 내 보좌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사실 그녀도 꽤 잘 나가는 집안이다.
영신 그룹은 총수인 지종윤 회장을 중심으로 이사회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신 그룹 이사회는 아버지가 젊었을 적부터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런 이사회의 중심에 김진철 이사가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비서 역할을 해왔던 김진철 이사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자신의 딸을 내 보좌로 붙였다.
김진철 이사는 나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보다 두 살 많은 김유리 비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나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해왔던 그녀다.
결국 나의 망나니짓에 못 이겨 떠나고 말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 비서.”
“네, 도련님.”
“고마워.”
끼익.
열심히 운전하던 김 비서가 돌연 차를 세워버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상당히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곧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가? 고맙다는 걸 고맙다고 얘기한 건데 뭐가 문제야?”
“……혹시 어디 아프세요? 막 저 모르게 심각한 병에 걸리셨다거나, 그런 건가요?”
“김 비서. 드라마나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런 일은 없어.”
“그럼 도대체…….”
빵!
뒤에서 누군가가 경적소리를 냈다.
“김 비서. 일단 운전부터 해.”
“아, 넵.”
김 비서는 서둘러 다시 운전했다.
운전을 하면서도 김 비서는 상당히 얼떨떨했다.
“도련님이 저한테 고맙다고 얘기하다니.”
“…….”
“도대체 뭐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혹시 대형사고 치신 거 아냐?”
“김 비서. 왠지 생각으로 끝내야 할 말들이 밖으로 들리는 거 같은데?”
“아차!”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김 비서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게 왠지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크흠! 됐고. 빨리 집으로 가자! 피곤해!”
“네. 네. 서, 서두를게요!”
그렇게 우리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회귀를 했어. 이건 기회야.”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분명 회귀 전에 어떤 목소리가 내게 마지막 기회라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이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어.”
한 번 당했지만 두 번 당해줄 생각은 없다.
“내가 상대해야할 적은 큰형이야. 그렇다면…….”
나는 종이에 큰형이라고 적었다.
“큰형은 나와 달리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해왔어. 철저하게. 그에 반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가만히 있으면 형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우선 생존이 먼저야. 그러려면 앞으로 나한테 있을 일들을 잘 활용해야만 해.”
나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생길지 하나씩 적어보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도 있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데로 적었다.
“이 중에서 제일 첫 번째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 이사로 부임하는 거야.”
고양 유나이티드.
고양특례시 일산서구에 위치한 프로축구팀이다.
꽤 유서 깊은 시민구단이었는데 10년 전에 영신 그룹에서 인수했었다.
시민구단에서 기업구단으로 변모한 고양 유나이티드는, 모기업인 영신 그룹의 든든한 후원 속에 1부 리그 상위권 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하지만 4년 전부터 고양 유나이티드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영신 그룹에서 투자금을 줄이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 논리에 의해, 고양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주축 선수들을 대거 타 팀으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생긴 차익을 축구팀에 재투자하지 않고 모기업에서 가져가 버렸다.
이런 상황이 반복돼서 벌어지자 고양 유나이티드는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2년 전, 최하위로 강등을 경험하게 됐다.
작년에 다시 1부 리그 승격을 노렸지만 리그 꼴찌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올 시즌 다시 상승 곡선을 타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애정을 갖고 응원하던 팀의 추락에 분노한 팬들이 경영진 사퇴를 요구했고, 결국 영신그룹에서는 기존 구단 대표 이사를 비롯한 일부 경영진들을 사퇴시켰다.
그렇게 경영진이 공석이 된 상황에서 영신 그룹은 망나니라고 평가받는 막내아들을 구단 대표 이사로 올리는 막장짓을 저지른 것이다.
“문제는 그 계획에는 형이 중심으로 있었다는 거지.”
회귀 전 김 비서가 보내준 편지에 의하면, 큰형은 영신 그룹의 프로스포츠 투자를 상당히 싫어했다.
기업으로서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은 나를 이용해서 고양 유나이티드를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와 고양 유나이티드 전부를.
“나쁜 자식!”
사실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프로스포츠 구단들이 적자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모기업을 둔 기업구단의 적자폭은 상당히 큰 편이다.
이것은 K리그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1980년대에 정부의 3S 정책에 의해서 시작된 프로스포츠에는 축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연고지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라면, 우리나라는 그 반대인 셈이다.
그래서 기업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를 희생양으로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게 주어진 문제는 이 막장 구단을 어떻게 하면 활용해 먹을 수 있게끔 만들 수 있냐는 건데.”
회귀 후 나의 첫 번째 분기점은 바로 여기가 될 것이다.
이 막장 구단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큰형에게 복수할 수 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 미래를 적극 활용해서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나의 뜻대로.
“기다려. 형. 조만간 많은 게 바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