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영신 그룹.
대한민국 내에서 TOP 5 안에 들어가는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그런 영신그룹의 막내아들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고 잡티 하나 없는 깔끔한 외모를 가지던 나였다.
그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죄수 번호 2101. 편지 왔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파란색의 죄수복을 입은 나는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편지?”
“그래. 받아라.”
딱딱한 인상을 가진 간수가 작은 틈 사이로 내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받은 나는 어디서 왔는지 곧장 확인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뭐지?”
나는 조심스럽게 밀봉된 봉투를 뜯었다.
뜯겨져 나간 봉투에서 곱게 접힌 종이가 툭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종이를 펼치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상당히 익숙한 필체다.
필체를 보고 나는 누가 편지를 보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김 비서.”
김유리 비서.
한때 나에게 누이 같은, 때론 연인처럼 마음을 줬던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나는 너무나도 몹쓸 짓들을 많이 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에는 내 곁에 있던 김 비서는 이미 떠난 상태였다.
그랬기에 영원히 그녀로부터 연락 따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다니!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편지를 다 읽어갈 무렵,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을 초월한 내용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어떻게 이런……!”
툭.
손에 쥔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그녀는 아니니까.
그래서 더욱 충격이 컸다.
『모든 것은 당신 큰형, 지태완의 계략이었어요. 그 동안 우리 모두가 속았던 거라고요.』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그렇다.
나의 이복형제이자 6남매 중 첫째 형인 지태완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망나니였던 나에게도 큰형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랬었는데…….
“전부 다 큰형의 계략이었다고? 제기랄! 내가 속았다니!”
큰형은 현재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신 그룹의 총수가 된 상태다.
편지에는 ‘왕자의 난’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태완은 무자비하게 다른 형제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나 또한 그 희생양 중 하나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마저 모두 계획된 거였다니!’
그 사실을 나는 뒤늦게 편지로 알게 된 것이다.
가슴이 아파 왔다.
“쿨럭! 쿨럭!”
감옥살이를 하면서 몸이 많이 안 좋아지긴 했었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기침이 흘러나왔다.
한참 동안 기침을 하던 중 입을 가린 손 사이로 튀는 피가 보였다.
황급히 내려다본 손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순간 내 시야는 반전되듯 뒤집혔다. 그리고 곧 내 몸이 크게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향했다.
쿵.
차갑다.
난방조차 되지 않은 바닥의 냉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서서히 좁아지는 시야.
나 이렇게 죽는 거야?
영신 그룹 막내아들로 30년을 살아왔다. 이후 죄수로서 5년을 살았다.
참 한 많은 인생이다.
‘이렇게 죽다니.’
아니,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사, 살려……!”
심장이 아프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
살려달라고 외쳐도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는 내 몸을 완전하게 덮었다.
* * *
암전된 시야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녕 이대로 끝낼 생각이냐?
누구지?
-한심하구나. 큰일 하라고 내려 보냈더니 결국 이렇게 죽어?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게 말해줄 것은 없다.
그게 무슨…….
-중요한 건 네가 아주 중요한 것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죗값을 치러야 하나, 내 권능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터이니 이번에는 부디 실망시키지 말거라. 알겠느냐?
그렇게 낯선 목소리와의 대화는 끝났다. 그리고 내게 기적이 찾아왔다.
* * *
영신 그룹의 망나니.
그건 바로 나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했다.
지태훈이라는 이름보다 망나니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럴 만도 했다.
영신 그룹이라는 대단한 재벌 가문을 등에 업은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비록 서자(庶子)라고 해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대기업 총수인 아버지에게 발견되면서 재벌가로 들어왔다.
그때 내 나이가 고작 8살에 불과했다.
인생에 꽃이 피나 싶었다.
허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에게는 피가 다른 5명의 남매가 존재했다.
그들은 나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 딱 한 사람만은 달랐다.
큰형인 지태완.
그는 나를 정말 동생처럼 대해줬다.
다른 형제들이 나를 괴롭혀도 그는 내게 미소를 보이며 늘 다정하게 대해줬다.
생존을 위해 망나니가 되었음에도 형은 나를 동생으로 대해준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형의 계략이라고 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아버지보다 더 믿었던 형이다.
그랬던 형이 나를 배신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배신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이용했던 것이다. 거기에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건 나였다.
그래서 더 분노했다.
내 자신에게.
“도련님. 아직도 주무세요?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만?”
“……!”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간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여긴?”
익숙하지만 조금은 낯선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도 또 클럽에 다녀오신 겁니까? 회장님께서 근신하라고 명령내리신지 얼마나 됐다고.”
방문을 열고 나타난 여인.
그 여인은 바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김 비서가 맞았다.
김 비서는 술 냄새로 가득한 방 안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다.
그녀는 곧 닫혀 있던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찌든 술 냄새를 서서히 벗겨냈다.
“…….”
나는 그런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사이 김 비서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도련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요?”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음. 여전히 술에서 덜 깨신 거군요. 어서 일어나세요. 해장하셔야죠.”
“해장…… 그래, 해장해야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 비서. 미안한데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5월 25일입니다. 설마 날짜도 기억 못 할 정도로 마셨습니까?”
“…….”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김 비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5월 25일이라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책상 위에 있는 스마트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재벌답게 최신형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켜자 잠금장치가 나타났다.
음. 패턴이 뭐였더라.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나보다.
어렵지 않게 금방 패턴을 풀었다.
패턴을 풀자 곧 화면에 오늘 날짜가 나타났다.
[2025년 5월 25일 오후 2시.]
“…….”
눈을 비비며 다시 한 번 날짜를 확인했다.
그런데 똑같았다.
김 비서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짜 돌아온 건가?”
“뭐가 돌아왔다고요?”
어리둥절해하는 김 비서에게 한 마디 했다.
“김 비서, 나 한 대만 때려볼래?”
“정말 때려도 됩니까? 정말?”
“어. 때려봐.”
“그럼 후회하지 마세요.”
늘 딱딱해 있던 그녀가 갑자기 미소를 드러냈다. 왠지 그 미소가 무섭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빡!
“커헉!”
격렬한 통증을 느낀 나는 무릎을 꿇고 배를 움켜잡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몸만 부르르 떠는 나를 향해 곧 김 비서가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다.
“세상에! 도련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걸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돌아왔다는 것을.
“흐흐흐흐.”
통증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도련님?”
“흐흐흐!”
“도련님? 왜 그러세요? 저는 배를 때렸는데 설마 통증이 머리로 간 건가요! 그러면 안 되는데!?”
당황한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나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참 웃음을 흘리던 나는 통증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네?”
여전히 걱정과 우려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 비서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김 비서! 가자! 해장하러 가자고!”
* * *
후룩. 후루룩.
땀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해장하고 있는 나.
그런 나를 맞은편에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유리 비서였다.
“도련님, 순댓국 좋아하셨어요?”
“왜?”
“왜긴요? 도련님 순댓국 싫어하셨잖아요.”
“그건…….”
그녀의 지적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교도소에서 생활하던 중 익명의 누군가가 내게 사식으로 순댓국을 보내왔다.
내가 순댓국을 싫어하는 줄 알고 보내온 것 같았다.
하지만 교도소 생활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살기 위해 억지로 먹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내 속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김 비서, 혹시 눈물 젖은 순댓국이라고 알아?”
“네?”
“사람이 말이야. 극한의 상황에 몰리니까 알아서 바뀌게 되더라고.”
“혹시 누가 도련님을 힘들게 만들었나요?”
“글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 비서는 어리둥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열심히 순댓국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할 뿐이다.
“끄윽.”
맛있게 순댓국 한 그릇을 비워낸 나는 부른 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김 비서.”
“네?”
“회사에 가보려고 하는데.”
“네?”
“가서 아버지, 아니, 회장님 좀 만나야겠다.”
“네에!?”
김 비서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 * *
영신 그룹의 본사는 고양특례시에 위치해 있다.
그런 본사에 내가 발을 디딘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헉!”
“지태훈이잖아?”
“헐. 미친. 저 사람이 여긴 왜 또 온 거야?”
본사 직원들은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봤다.
그래, 이게 현재 내 위치지.
과거에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나를 안 좋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도련님. 회장님께서는 마침 회장실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바로 회장실로 가자고.”
김 비서가 회장 비서단과 연락하여 아버지의 일정을 확인하고 알려줬다.
그렇게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려는데, 내 앞으로 어떤 인물이 나타났다.
“태훈아.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형.”
지태완.
말끔하고 선한 인상을 가진 그가 날 보고 웃고 있었다.
저런 모습이 모두 가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쥐고 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뵈러 왔는데?”
“회장님? 마침 이사회 회의가 끝나서 회장실로 가셨다. 그건 그렇고 회장님은 왜? 혹시 또 용돈 달라고 그런 건 아니겠지?”
“응. 맞아. 용돈이 좀 필요해.”
“하아. 태훈아. 그런 일은 회장님 찾지 말고 나한테 오라고 했지? 형이 대신 준다고 했잖아.”
“됐어. 이번에는 좀 큰 금액이 필요해서 그래. 형이 감당하기는 좀 어려울걸?”
“……뭐?”
“아, 형. 내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봐. 김 비서, 뭐해? 가자.”
내 행동에 형이 순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형을 뒤로한 채 자리를 벗어나는 내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