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대충 누구와 이야기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사실 그 대상에는 국무부 내의 차관도 있으니까.
그는 이보다 최민혁 실장이 무슨 보복을 할지 그걸 더 걱정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나중에 이 일을 알면 저를 그냥 안 둘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최민혁 실장의 지금 제안을 보면 아무래도 위기감을 느껴서 그렇게 행동한 것 같으니까요. 굳이 그렇다면 최민혁 실장과 지금처럼 대립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최민혁 실장은 조시 아태 차관보의 처지를 이해할 겁니다.”
정확히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차세대 이동통신 사업 때문이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가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의 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
‘하, 최민혁 실장과 엮인 탓에 결국 내가 이 일을 다 떠안아야 한다니.’
그는 머리를 붙잡았다.
결국 설거지는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보면 다른 이들 역시 최민혁 실장의 위험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의 일도 어떻게 보면 외교적인 이익과도 관련이 있다.
최민혁 실장은 그런 연장선에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미국 국무부가 굳이 최민혁 실장 일에 끼어드는 것은 차세대 이동통신 파급 효과가 커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 국무부가 사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CIA나 NSA를 동원해서 최민혁 실장을 철저하게 감시했을 것이다.
‘…이미 늦었지.’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이 이 불편한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난감한 조시 아태 차관보의 입장을 슬쩍 무시했다.
“…최민혁 실장은 그 연방 검사에 대해서는 손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 그 일만 깔끔하게 처리해도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줄리엇 회장님이 직접 나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를 기준으로 최민혁 실장은 간이 좁쌀만 한 인간으로 자신이 당한 일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도 부담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어차피 이번 일은 조시 아태 차관보님이 총괄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최민혁 실장과 대립하면서도 출구 전략을 사전에 고민했다. 따라서 괜히 최민혁 실장과 얼굴을 맞대서 오해를 사서는 곤란했다.
“…하, 알겠습니다.”
* * *
버몬 연방 검사는 최근 자신이 지시받은 일을 하면서도 좀 불안했다.
하지만 인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버몬 연방 검사 처지에서는 이번 일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상대가 에플의 스티븐인 만큼 제대로 성공만 한다면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일에만 집중했다.
다만 간간히 내려오는 오더가 이상했다.
‘벨린 투자는 당장 건드리지 말라고?’
이게 말이 되는 지시인가 싶었다.
미국 연방 검사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라니.
그런데 이 지시가 윗선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것이었다.
문제는 이 라인이 자신의 인사를 결정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버몬 연방 검사는 나름 독립적인 위치에 있기에 무리수를 두면 윗선을 들이박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 정치 쪽에 오히려 관심이 많아서다.
재미있는 사실은 SEC 역시 알아서 자신과 호흡을 잘 맞춘다는 점이다.
에플을 공격하면서도 선을 지켰다.
나머지는 미국 몇몇 언론에서 해줬고 말이다.
이들 스피커는 돌아가면서 에플과 스티븐을 맹비난했다.
자신은 이미 정의의 사도가 된 지 오래였다.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잠깐 만나죠.]
* * *
상대는 장소와 시간만 알린 후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버몬 연방 검사는 영문을 잘 몰랐지만 일단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밤늦은 공원에는 다행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는 미 국무부의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였다.
일전에 3차례 정도 만난 적이 있는 터라 상대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소개는 이미 이전에 간단히 한 것 같고, 이번 일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아직 에플과 스티븐조차 제대로 수사를 못 한 상황입니다.”
“언론 분위기는 다르던데요? 이미 결정적인 증거까지 확보했다고…….”
“그건 언론에서 가짜 뉴스를 내보낸 겁니다. 저로서야 상대를 압박한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아서 그냥 둔 거죠.”
“…스티븐과 에플이 그걸 간과한다는 말입니까?”
“에플 이사회 측에서 보조해 준 덕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에플, 스티븐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최근 스티븐의 행보는 연방 검사라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스티븐은 특히 에플 주가 부활의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면 지금까지 실제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하, 수사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상대는 스티븐입니다.”
“무능하시군요.”
버몬 연방 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감히 미 국무부 아태 차관보의 말에 대놓고 딴죽을 걸지 않았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아니, 벨린 투자 쪽은 아예 담당자를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안 됩니다. 그저 지시에 따라 주세요. 이유는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무서워서라고만 생각해 주세요.”
버몬 연방 검사는 ‘최민혁 실장’의 이름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에플을 조사했다 보니 최민혁 실장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에플과 최민혁 실장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벨린 투자의 오너인 최민혁 실장이 아태 차관보님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말입니까?!”
그는 차마 ‘미 국무부’란 이야기까지 하지는 못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자존심이 상한 버몬 연방 검사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에게 압력을 넣은 자들이 마음을 바꾼 겁니다.”
버몬 연방 검사 역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이들을 안다. 정확히는 그 라인을 말이다. 심지어 그들이 가진 힘도 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음모론 따위는 아니었다.
미국 정부 내에 실제로 힘 있는 자들이니까.
‘너무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한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어.’
“…이해할 수가 없군요.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는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지시 사안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최민혁 실장에게 칼 한 번 휘두른 적이 없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그냥 최민혁 실장 관련 수사를 여기서 접으라니.”
버몬 연방 검사는 좀 답답했다.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지시였다.
“알아요. 그런데 높은 분들 생각은 좀 다른가 봅니다. 아, 그리고 오늘 새벽에 사임을 표명하세요. 그러면 클린턴 캠프에서 사람이 갈 테니까.”
그는 사임하란 지시보다는 ‘클린턴 캠프’란 말에 더 놀랐다.
“어? 저, 정말입니까?”
“당연하죠. 일이 잘 끝나서 요청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사임 의사 표명하면서 문제가 없도록 잘 처신하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딱 이 말만 하고는 차량을 몰고는 횅하게 떠나 버렸다.
“…….”
버몬 연방 검사는 황당한 눈으로 멀어지는 차량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솔직히 최민혁 실장을 불러 한 번쯤은 조사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유야 어쨌든 자신은 최민혁 실장에게 칼을 들이댄, 아니, 칼을 한 번 휘둘러 보려는 의도를 보인 결과만으로도 연방 검사 자리에서 잘린 것이었다.
버몬 연방 검사는 어차피 자신의 정치 입문 꿈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만족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최민혁 실장을 손댄 결과로 길바닥으로 내쫓겨날 뻔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의 악명에 대해서는 이번에 그를 조사하면서 알았다. 그런데 경험해 보니, 자신이 검토한 그 수준이 아니었다.
‘…섬뜩한데.’
* * *
[밤늦은 시간에 스티븐을 조사하던 버몬 연방 검사가 갑자기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이 일은 미 사법부 내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 검찰은 어디까지나 버몬 연방 검사의 개인적인 일로, 에플의 스티븐이나 벨린 투자의 최민혁 실장 수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새벽에 나온 뉴스라서 미국에서는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건 한국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이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는 분위기였다.
“…흥미롭군요.”
최민혁 실장은 자신이 의견을 제안한 지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에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는구나.’
그가 아는 바로 미국 연방 검사 파워는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미국 검사는 한국처럼 여러 제약을 받는 검사와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일반 검사도 아닌 연방 검사가 그냥 갈려 나가다니.
최민혁 실장은 새삼 자신의 에플 지분 매각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액수가 액수인데…….’
그것도 다 현금이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벨린 투자 내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손실을 본 이들은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긴 차세대 이동통신이 꽤 매력적이지.’
최민혁 실장은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이런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은 달랐다.
당장 에플의 스티븐이 그 예였다. 그가 직접 전화해 온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님이 한 일입니까? 아, 죄송합니다. 버몬 연방 검사 사임 말입니다.]
[제가 관련이 없다고 하면 안 믿겠죠?]
[연방 검사가 한밤중에 사임하는 일은 한국 사법부는 어떤지 몰라도 미국 사업부에서는 흔치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다.
[…그쪽에 차세대 이동통신 사업에 대해서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서, 설마 3G 망 사업을 말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아직 표준이…….]
[제가 미리 준비를 좀 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꽤 그럴듯한 결과가 있죠.]
[…그랬군요.]
스티븐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최민혁 실장이 한다고 했으니, 그냥 실험적으로 된 결과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당장은 어려워도 상업적인 가치가 높은 수준의 기술 수준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정말 궁금했다.
[3G 망이라면 문자, 통화를 넘어서서 멀티미디어 콘텐츠까지 포함할 텐데, 그게 가능합니까?]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하, 정말 쇼킹한 일입니다. 그 정도라면……. 그들도 그럴 만하군요. 아니, 타협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긴 최민혁 실장님 혼자 3G 망 사업을 하기도 힘들 테니,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스티븐은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꽤 정답에 가까운 안목이었다.
[…칭찬으로 듣죠.]
[…이번 일은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연방 검사 쪽은 부담되었는데,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플 이사회 문제에 이제 집중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딱 원한 결과였다.
늘 그렇지만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연방 검사가 새벽에 뜬금없이 사임했으니.
나머지 세력은 알아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내가 뭐 그 세력을 다 알 필요는 없지. 미국 정·재계도 그물처럼 인맥이 얽혀 있을 테니까. 이것도 흥미롭군.’
* * *
FBI, SEC의 갑작스러운 에플 습격은 불과 일주일을 채 넘기지 않았다.
버몬 연방 검사 사임 이후에 수사가 갑자기 중단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