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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에게 굳이 매달리지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 일도 따지고 보면 에플 지분 매각 소동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 일을 덮기 위해서 진행하는 차세대 이동통신이니까.
이른바 이슈를 더 큰 이슈로 막는 방식이다.
다만 그 이슈가 단순한 가십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설계한 프로젝트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쁘지 않아.’
딱히 그 자신이 원한 바는 아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자신이 한 일에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군중을 봤다.
그걸 보자 차세대 이동통신으로 다시 대중의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일에 나름 재미를 느꼈다.
그는 최종 보스 같은 미소를 한 채 다시 FBI, SEC 관련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벨린 투자의 우영민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플 수사에 영향을 받을 것 같은데, 그쪽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우영민 부장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그거 다 가짜 뉴스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일단 SEC가 주도해서 에플 쪽을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심각한 사안은 아닙니다.]
[미국 언론이 과장했다는 소리입니까?]
[…네, 저도 이번 보도를 확인하고는 꽤 놀랐습니다. 미국 언론이라고 해서 마냥 정의로운 게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은 미래에 미국 언론의 타락을 어느 정도는 알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 징조가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은밀히 말해서 미국 국익에 이익이니까.’
[그러면 FBI는 뭐죠?]
[의도적으로 사건을 키울 목적입니다. 우리 법무 팀에서 알아본 바로는 무리수를 많이 뒀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FBI가 무리수를 뒀다고요?]
[FBI가 아니라 정확히는 이번 사건을 맡은 담당 연방 검사가 무리수를 뒀습니다. 그 작자가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퇴직한 후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겁니까?]
[네. 지금 봐서는 상의원 쪽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연방 검사 이름이…….]
최민혁은 굳이 연방 검사의 이름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쪽은 알아서 하시고요. 우리 쪽 정보만 말해보세요.]
[결국 마쿨라 이사가 스티븐 때문에 일이 잘 안 풀리자 의도적으로 SEC, FBI를 끌어들였습니다. 스티븐이 비밀로 한 프로젝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건 뭐예요?]
[ARN과 스티븐이 하는 일 중에는 여러 가지 보안이나 특허 문제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편의상 5:5 지분으로 법인을 설립해서 그쪽으로 처리를 했는데, 그걸 문제 삼은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자신이 투자한 계열사 사이에 복잡한 특허 문제를 잘 안다. 굳이 돈이 되지 않아서 관심이 없을 뿐이다.
[ARN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에 예민한 것을 말하는 건가 보군요.]
[네, 아무래도 특허나 보안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마치 횡령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니면 회사 내부 정보를 빼돌린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면 제가 관심 둘 부분은 아니죠?]
[네. 최민혁 실장님이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스티븐이 바로 연락했을 겁니다. 스티븐 자신도 최민혁 실장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알았어요.]
* * *
최민혁 실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스티븐 주변에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일인지는 몰랐다.
그가 물론 나설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 일은 스티븐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에플 내부의 정치 갈등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일 때문에 스티븐을 에플로 귀환시킨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긴 에플 내부의 자잘한 일을 간단하게 볼 수는 없겠지.’
최민혁은 김기범, 최민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 정보를 먼저 얻었다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이제까지 DL 그룹이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라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자신이 방심한 것을 인정했다.
‘차세대 이동통신 기획안은 좀 급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잘한 것 같아. 그래도 에플 지분 매각 건을 이용해서 계속 압박하는 것을 봐서는 날 우습게 안다는 것이겠지?’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MP3, MPEG-2에 이어서 인공지능 사업 쪽에 손을 썼다.
아직 명확한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아이팟, 아이컴 정도다.
당장 건설이나 전자 쪽에서 매출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4~5년이 지난다면 모르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아직 최민혁 실장이 가진 패는 없으니까.
그런 차에 콜린스 사업부 매각도 이제 물 위로 올랐다.
이미 기획실을 통해서 오성 전자 측과 계속 사전 협상을 진행 중이니까.
최민혁 실장은 말로 해서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어차피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 3G 쪽에 손을 써 둔 것이니까.’
3G는 이제 실험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은 정도이다.
아직 상용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하지만 그는 히죽 웃었다.
‘원천기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굳이 제대로 동작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거라면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어.’
특히 한국 10대 대기업은 이 새로운 사업의 가치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원천특허는 자신에게 탈탈 털린 상황.
그렇다고 새로운 3G 사업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굳이 10대 대기업을 불러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겠지.’
이 보다 중요한 일은 미국 내의 일이다. 스티븐을 이대로 그냥 놔둬서는 곤란했다. 지원 사격이 필요했다. 에플이 부담스러워서 감히 FBI, SEC가 나서지 못하도록 말이다.
어차피 차세대 이동통신 표준은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타이밍적으로 딱 지금이 적기였는데, 다행히 옛날과는 달리 그에게도 인맥은 있었다.
“…타이거 펀드의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과 마이클 블룸버그 쪽에 연락해서 연락을 잡으세요. 괜찮은 정보, 아니, 투자 아이템이 있다고. 정확히는 초대박 아이템이죠. 후후후.”
“…알겠습니다.”
“아, 기획 팀 보고를 받았지만, ETRI에게도 제 방문 약속을 가능한 한 빨리 잡으세요. 두 사람 미팅 전에 먼저 현장 상황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차세대 이동통신 건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알 것 같았다.
‘MP3처럼 단기에 성과가 나올 일이라면 혼자 다 먹었겠지. 하지만 이번 차세대 이동 기획안은 상황이 달라. 변수도 많으니까. 그걸 이용해서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는 내심 최민혁 실장의 계략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이번 일은 설사 이 진실을 안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의 역량에 감탄하기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 무섭다니까.’
* * *
ETRI는 애초에 국책 연구 기관으로 공무원 냄새가 많이 났다.
이에 따라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ETRI의 평가는 많이 달라졌다.
바로 CDMA 시스템 상용화 덕분이다.
퀄컴이 CDMA 핵심 기술을 다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스템은 좀 달랐다.
ETRI가 이 CDMA 시스템 개발을 총괄한 덕분에 이쪽 원천기술을 다 보유한 것이었다.
물론 최민혁 실장이 그중에 알짜배기 기술을 다 먹었지만 말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근 최민혁 실장 반대 파벌의 마녀 사냥이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정보가 공개된 이후에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평가는 또 달라졌다.
개척자.
이것이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ETRI 연구원의 시야였다.
최민혁 실장이 이런 ETRI 분위기를 체감한 것은 3G와 관련해서 ETRI를 방문했을 때였다.
무려 60여 명의 연구원이 마치 사단장 사열 때처럼 나와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최민혁 실장을 향해서 허리를 숙였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김승구 팀장과 악수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시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심정은 알지만, 주변 시선 때문입니다.”
“네?”
“언론에 알아보세요. 난리가 날 겁니다. 제가 초갑질을 일삼았다고 할걸요?”
“설마요?”
최민혁 실장은 ETRI 중견 실무진의 시선을 받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되는 것은 그 배후죠. 솔직히 미국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이 사태를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아, 그렇다고 제가 반미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하는 것이니까요.”
“아, 하긴.”
김승구 팀장 역시 순순히 수긍했다. 그도 사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기업이 이번 일을 같이 진행했다면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비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연구하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엮인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이번 일도 CDMA 2G 망처럼 상업화가 분기점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 이번 프로젝트를 장밋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팀장급 이상의 연구원이 나와서 최민혁 실장에게 손뼉을 쳤다. 그들 눈에 떠오른 것은 기대와 선망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ETRI를 방문하는 것은 흔치가 않았다.
다만 기자들이 없다는 것이 특이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로 기자를 굳이 부르지 말라고 당부해서였다.
뒤늦게 나타난 이는 CDMA 시스템을 총괄한 오현종 실장이었다.
오현종 실장은 작년에 비해서 시든 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괜찮습니까?”
오현종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힘듭니다.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님 때문입니다. 아, 그런 의도가 아니라…….”
혼자 버벅거리는 오현종 실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오현종 실장뿐이다.
기획 팀이 확인한 정보 중에는 핵심 내용이 다 빠져 있었다.
단적인 예로 ETRI가 퀄컴과 같이 공동으로 한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다.
오현종 실장은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중국, 동남아, 심지어 유럽도 오가야 했다. 그는 덕분에 많은 명성을 얻기는 했다.
CDMA 분야와 관련한 전문가를 꼽으면, 늘 다섯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것도 국내가 아니라 전 세계 기준으로 말이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님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명세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생각과 현실은 다르니까.”
“그래서 요즘은 마음이 한편으로 편합니다.”
CDMA 상업화에 크게 이바지한 만큼 오현종 실장도 욕심을 버렸다.
다만 오현종 실장도 ‘차세대 이동통신’ 이야기에는 혹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실적을 넘어서는 초 실적을 낼 기회이니까.
다만 그도 최민혁 실장이 도와준 실적을 가로챈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휴, 많은 사람에게 사실을 말해도 잘 믿지를 않아서 미칠 지경입니다. 제가 한 일도 아닌데, 마치 제가 한 것처럼 되어 있어서요. 최민혁 실장님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힐끗 오현종 실장, 김승구 팀장, 뒤따른 중견 실무진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전 공학자가 아니라 사업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 얻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전 이익을 얻고, 오현종 실장님은 명예를 얻으면 됩니다.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현종 실장과 김승구 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두 사람은 현실적으로 차세대 이동통신 개발이 몹시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제안을 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서 그런 속내를 말하기 힘들었다.
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진짜 할 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