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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차장은 냉랭한 눈으로 박세영 대리를 쳐다보았다.
박세영 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좀 억울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이렇게 시작한 사연은 생각보다는 파란만장하지는 않았다.
권태성 실장이 그녀를 첩자로 조창호 차장에게 보낸 것이니까.
“아, 저는 절대로 KM 전자의 핵심 기술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흠.”
최민혁 실장은 이 묘한 한 쌍의 커플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창호 차장은 분노하기는 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박세영 대리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게도 조창호 차장을 정말 사랑했다. 자신이 봐도 괜찮은 미인이었으니, 한편으로 신기했다.
그는 힐끗 조창호 차장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면 조창호 차장님에게 관심이 있어서 이번 일을 맡았다는 겁니까?”
“네. 솔직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로 제가 아는 조 차장님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엔지니어라고 명성이 자자한 상태였으니까요.”
박세영 대리는 사과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실로 특이한 케이스였다.
얼핏 봐서는 박세영 대리와 조창호 차장은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구미호 같은 박세영 대리는 순수한 조창호 차장과 조화를 이루었다.
최민혁 실장이 전생의 경험이 없다면 두 사람 사이에 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지수 박사와 같이 있으면서 많은 아픔을 경험했다.
한순간의 실수.
이어진 실연의 아픔.
그 기억은 아직도 최민혁 실장의 마음속에 멍에로 남아 있었다.
그가 이지수 박사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두 사람 말은 잘 알겠어요.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죠.”
두 사람 다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최민혁 실장의 뉘앙스에 조용히 물러났다.
* * *
최민혁 실장은 김명준 과장에게 다시 한번 두 사람의 행보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 확인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두 사람 관계를 토대로 지금까지 조사한 사안을 확인해 보면, 앞뒤가 잘 맞아 들어갔다.
그 역시 이런 불편한 일이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조창호 차장은 대체 불가 인재였다.
따라서 지금처럼 싱글로 있기보다 차라리 여자가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이왕이면 결혼까지 해주면 더 좋고 말이다.
‘결혼은 진짜 남자에게 무덤이니까.’
조창호 차장을 무덤에 집어넣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결국 이 문제를 곰곰이 고민했다. 두 사람 사이를 잘 이어줄 방법 말이다. 이건 조창호 차장이 필요성을 느껴야 했다.
자신의 단점에 대해 말이다.
그는 고민 끝에 박세영 대리가 어떤 면에서 조창호 차장에게 필요한지를 고민하다가 자기 책상 서랍을 뒤져서 고급 편지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사실 핵심 인재에게 테스트할 목적으로 만든 봉투였다.
그는 다시 두 사람을 호출했고, 말없이 봉투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조창호 차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뭡니까?”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인센티브입니다.”
“네?”
“조창호 차장님의 실적은 이지수 박사도 인정하는 겁니다. 늘 보상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주려고요.”
“…갑자기…….”
조창호 차장은 그제야 힐끗 박세영 대리를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이 타이밍을 노린 것은 박세영 대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미 지난 일이고, 사과했다면 끝난 일이죠. 기술을 빼돌린 것도 아니니까. 두 사람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고, 전 두 사람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사랑의 행복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
조창호 차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박세영 대리를 용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제야 박세영 대리에 대한 배신감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최민혁 실장이 용서한다면 상황이 좀 달랐다.
박세영 대리는 눈물을 흘렸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그는 조창호 차장의 모습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자신과는 달리 사랑 쟁취에 성공한 조창호의 모습을 말이다.
‘이게 좋을 수 있지. 괜히 싱글로 남겨뒀다가 또 이런 사고를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박세영 대리가 관리는 잘할 거야.’
물론 그의 속내는 좀 달랐다.
그 역시 조창호 차장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푸른 봉투는 지분, 붉은 봉투는 현금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골라요.”
“으음.”
조창호 차장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의 성과를 잘 안다. 인센티브를 받아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표정을 봐서는 선택에 따라서 차이가 큰 것 같았다.
그는 힐끗 박세영 대리를 쳐다보았다. 당장 현금이 떠올랐다. 결국, 붉은 봉투 쪽으로 손을 내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박세영 대리가 눈물을 닦으면서 푸른 봉투를 냉큼 집었다.
“지분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조창호 차장을 쳐다보았다. 조창호 차장은 순간 머뭇거렸다. 갈등했다. 현금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박세영 대리가 다시 눈을 흘기자 거기에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잘 선택했어요.”
“저기 실장님, 한 번 안을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건 이제 두 사람 소유이니까.”
박세영 대리를 봉투를 열면서 조창호 차장과 같이 안을 살폈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은 지분이었다. 바로 KMBOOK 지분 말이다. 무려 5만 주였다. 에플 주식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적어도 30~50달러 안팎이다. 50달러 기준이면 무려 250만 달러였다.
하지만 주식 가치가 폭등하면 그 이상이다.
다만 두 사람은 이 지분은 KM 전자에서 10년 이상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살피지 않았다. 아니, KM 전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간과했다.
조창호 차장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이건 너무 많…….”
최민혁 실장은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독소 조항을 넣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택은 조창호 차장님이 한 겁니다. 이 현금은 이것과는 비교하기 힘드니까요. 액면가 기준으로 환산한 금액이라서요.”
“…아.”
조창호 차장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수십억 차이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은 흥분으로 반쯤 넋이 나간 박세영 대리 모습에 피식 웃었다.
“두 분 사랑에 대한 선물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만한 성과를 보였으니, 가는 보상일 뿐입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결혼까지 안 하면 다시 회수할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농담이에요.”
그런데 표정은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곧 사무실을 나섰다.
나갈 때는 여전히 어색했다.
그런데 문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 모습은 좀 달랐다.
흔치 않은 연인의 모습이었다.
김명준 과장과 조성돈 팀장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한 결과였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무안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이왕이면 저 두 사람이 잘되었으면 하니까.”
김명준 과장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서 USB 메모리를 보여주었다.
“최 실장님 판단이 맞는 것은 같습니다. 박세영 대리가 권태성 실장과 나눈 대화 녹취록입니다.”
“좋네요. 기회를 봐서 이용하면 될 것 같아요. 콜린스 매각할 때 2~3천억은 더 올려서 부를 수 있을 테니까요.”
“…네.”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이번은 참 좋은 기회였던 셈이죠. 다른 이들도 속내를 보일 겁니다. 어디 마음속을 한번 계속 살펴보죠. 우리 셋째 큰아버지가 발톱을 드러냈으니, 계속 반응을 보일 겁니다. 아마 장승일 실장님도 이용할 겁니다. 솔직히 이번 기회에 샐로먼 브러더스가 희망을 품고, 최문경 부회장님이 같이 합류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러지는 않네요.”
정확히는 그들 역시 눈치를 본다는 것이 정확했다.
괜히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또 같은 일을 반복할 테니까.
“…네.”
조성돈 팀장 역시 권태성 기획실장이 몸을 사리는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 *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은 최근 최동영 상무가 일으킨 불협화음 때문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거기에 덤이라고 해야 할지 최동영 상무가 권태성 기획실장과 만난 일 때문에 긴장했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다.
다행히 KM 그룹 내에서는 별일이 없었다.
이보다는 오성 전자 내의 인사가 문제였다.
‘조창호 차장을 노린 건가?’
결과적으로 큰일은 없었다.
조창호 차장은 황당하게 첫사랑을 다시 얻었으니 말이다.
박세영 대리가 약간 찜찜했지만 특이한 행보는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조창호 차장과 깊은 로맨스에 빠져 버렸다.
불과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결혼 이야기가 오갔으니까.
장승일 실장은 그 정도 쯤 되자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최용욱 회장.
지금은 최용욱 회장이 여전히 조용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한 지시를 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설마 최용욱 회장이 다시 욕망을 드러낼지는 몰랐다.
‘하긴, 에플 대박이 컸지.’
결국 최민혁은 에플 지분 12%를 다 매각했다. 다만 그 매각 대금이 입소문 난 것처럼 천문학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장내에 파는 것도 파는 것이지만 블록딜 규모도 썩 좋지는 않았다.
당장 에플 주가 자체가 단기에 너무 급등한 터라 150달러로 거래가 되지 않았다.
130달러.
적게는 110달러 안팎에서도 거래가 되었다.
80달러로 폭락한 이후에는 재미를 많이 못 봤고 말이다.
아직 정산이 다 끝나지 않아서 정확한 차익 규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규모이니.’
KM 센서, KM 반도체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최동영 상무가 이걸 그냥 두고 보기란 쉽지가 않았다.
진짜 배가 아프니까.
장승일 실장은 때문에 최동영 상무가 수행원 몇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도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다. 다만 그도 조철호 수석 부장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조철호 수석 부장은 과거 벨린 투자 쪽에서 투자를 담당했다. 그는 벨린 투자가 한창 잘나갈 때 권력을 꽤 누렸다.
그런데 벨린 투자가 힘들어지는 시점에서 슬쩍 회사를 그만뒀다.
KM 그룹을 잠깐 떠나 있나 싶었는데, KM 건설 최동영 상무 옆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회의실에 앉기가 무섭게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장 실장도 잘 알 겁니다. 통신 사업이 크게 보면 PCS, 국제 전화, TRS, 무선 데이터로 자리 잡힌 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규 사업 레이스를 시작한 겁니다. 설마 이 사업에 끼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죠?”
장승일 실장은 짜증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본론만 이야기하면 될 텐데, 너저분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지금 이 새로운 황금알을 낳는 사업 때문에 한국 재계가 발칵 뒤집혔어요. 자금 유동설 소문으로 내부 사정이 좋지 않은 DL 그룹은 데이콤과 손을 잡고 끼어들려는 중이에요.”
실제로 DL 그룹은 자금 압박을 경험하는 중에도 신규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리수를 둔 셈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번 통신 사업 레이스는 장래가 밝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CDMA 신규 사업자가 형편없는 상황에서도 장래가 밝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최동영 상무의 주장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왜 최동영 상무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KM 건설 쪽에서 통신 사업에 끼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설마, 그룹 차원에서 모른 척할 겁니까?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KM 산업에서 신규 사업을 하기는 힘들어요. 지금 KM 센서, KM 반도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KM 센서는 초대박을 친 덕분에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