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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테면 과장 진급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기 중에서 가장 빨리 대리 직급을 달았고, 지금은 과장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조 차장님은 생각보다는 깐깐한…….”
“아, 괜찮습니다. 뭐 안 되면 어쩔 수가 없죠. 다만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성과에 대한 보상은 분명히 따를 테니까.”
임권수 부장의 부드러운 이야기.
박세영도 이전이라면 이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도 조창호 차장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차피 회사에서 판을 깔아주었으니, 자기 자존심을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이야기는 해볼게요. 다만 기대하지는 마세요.”
“…잘 부탁합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부탁하면서도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최민혁 실장은 에플 지분 매각 대금 내용을 살피면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이 자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당장은 별수가 없었다.
‘그냥 빌딩이나 몇 채 더 구매할까?’
한국 빌딩이 아니라 미국 빌딩 말이다.
이왕이면 뉴욕이나 맨해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벨린 투자에 넌지시 이 지시를 해놓았다.
하지만 이걸로는 에플 매각 자금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는 아무리 고민해도 스티븐의 기조연설, CES 전시회가 끝나야 그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 참 안 가네.’
아직도 에플 지분 매각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은 미국에 갈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듣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선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미국 내에 자신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있으니까.
그는 결국 국내 일에 집중했다.
최동영 상무 일 말이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은 전혀 엉뚱한 안건을 보고했다.
“혹시 조창호 차장을 호출하셨습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지수 박사 일 때문에 미국에서 정신없는 사람을 제가 왜 부릅니까?”
“아, 그게 어제 새벽 비행기로 조창호 차장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건 좀 이상하네요.”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평시였다면 이런 보고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 자신도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데니스 샐로먼 이사, 최동영 상무의 동향을 면밀하게 살피는 상황이었다. 아니,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늘 문제를 일삼던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은 조용한데, 다른 사람이 일을 만들다니.”
“최병연 소장님 이야기로는 자신도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인사 팀 역시 그저 6박 7일 휴가를 요청하기에 들어줬다고만 합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이런 직원 감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최동영 상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였다.
최민혁 실장은 오히려 히죽 웃었다. 그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손을 썼나 보군요. 샐로먼 브러더스보다는 오히려 최동영 상무 측 같은데, 이상하네요. 이쪽에서 조창호 차장을 한국까지 오게 할 수단이 없을 텐데…….”
“하면 한번 알아볼까요?”
“네. 다만 굳이 직접 접근하지는 마세요. 괜한 사생활 침해 의혹은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바로 조 차장님은 남을 배신할 타입은 아니에요. 뭔가 다른 사연이 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상대가 그런 약한 점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르죠.”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조성돈 팀장의 표정을 보면서 조창호 차장을 떠올렸다. 그는 조창호 차장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고, 그 성과에 대한 보상을 해줬다.
심지어 헬렌을 반쯤 소개해 주기도 했다.
비록 그 관계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아직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아.’
그 이후로도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지수 박사에게 보내서 빡빡하게 굴린 것이 그 증거였다.
당연히 그에 따라 조창호 차장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말이다. 조창호 차장은 지금 모르기는 해도 엔지니어 수준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였다.
그 자신이 그걸 모를 뿐이다.
‘그런 사람이 날 배신할 리는 없지. 다만 모르고 실수할 수는 있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 점을 조성돈 팀장에게 말할까 하다가 관뒀다.
조성돈 팀장은 썩 마음이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어쩌면 사내 핵심 인재 중에 배신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조창호 차장을 스카우트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가만, 그렇게 보면 또 이상하네.’
그로서도 정말이지 고개를 갸웃할 일이었다.
* * *
최민혁 실장의 예측처럼 조창호 차장은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 그도 자신의 첫사랑인 박세영 대리를 잊지는 못했다.
하물며 그 첫사랑이 30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로서는 갑작스러운 박세영 대리의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지금 미국이라고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만날 수 있어?]
이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는 허겁지겁 휴가를 내고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박세영 대리는 헬렌과 외형 자체가 비슷했다.
엄밀히 말해서 헬렌의 미모가 더 한 수 위이기는 하지만 박세영 대리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미인 소리를 듣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박세영 대리는 이런 미모와는 별개로 업무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녀는 보통 순수한 여자와는 많이 달랐다.
평소 표정에 감정이 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조창호 차장을 다시 만나는 날에는 좀 달랐다.
그녀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조 과장님, 아니, 이제는 조 차장님인가요? 잘 지내셨죠?”
“어, 응.”
조창호 차장은 박세영 대리를 만나는 그 순간에 이성을 반쯤 잃고 말았다. 그녀의 따스한 미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졌던 이상한 생각을 다 지웠다.
박세영 대리를 보는 순간에 그런 기억을 다 잊어버린 것이었다.
박세영 대리는 그런 조창호 차장의 모습에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당시 그녀가 조창호 차장을 차버린 이유였다.
사람이 참 순수하고, 좋기는 하다.
그런데 그게 한편으로 멍청했다.
질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조창호 차장의 모습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아니었다.
오성 전자 엔지니어들도 모이기만 하면 하는 이야기가 다 조창호 차장 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마냥 권태성 실장의 지시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히 호기심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조창호 차장은 능력은 있지만 딱 그뿐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잘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루한 그 모습도 이제는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요즘 KM 전자에서 잘나간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어, 별것 아냐.”
“에이, 아니에요. 우리 회사에서도 조 차장님의 성공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해요.”
“그런가? 그건 이상하네. 날 늘 하던 대로 일을 했을 뿐이야. 그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진행한 것이 다야.”
“…네.”
박세영 대리는 멍한 눈으로 조창호 차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스, 스톡옵션도 받았다면서요?”
“그거야 당장 쓸 수는 없어.”
“에이, 그래도요. 그거 KM 전자 주식일 텐데, 그 회사 가치가 10년 안에 하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그럴지도.”
조창호 차장은 대충대충 대답하면서 박세영 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박세영 대리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5년 만이지?”
“아마 그 정도 될 거예요.”
“그렇구나.”
그녀는 슬쩍 입을 열었다.
“조 차장님 이야기나 해주세요. 어제저녁에 조 차장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생각나서 전화한 거예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해서요. 아, 물론 회사 일은 말하지 말고요.”
조창호 차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하면서도 사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자체가 회사 일이었기 때문이다.
집, 회사, 집, 회사 같은 단조로운 삶이었다.
박세영 대리는 그럼에도 조창호 차장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가 전문적인 회사 이야기를 할 때도 말이다. 그녀는 화제 중에 ‘음성 인식’이 나오자 슬쩍 질문해 봤다.
“아, 맞다, 그 음성 인식 말이에요. 그건 어떻게 한 거예요? 실제 기능 구현은 해도 상업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잖아요?”
“아, 그건 하이브리드 필터 시스템 때문이야. 이게 음질 향상, 고유 벡터 처리, 채널 잡음 소거법 같은 여러 방식을 다 섞으니까.”
그녀로서는 권태성 비서실장의 지시와는 별개로 거의 반사적으로 의아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게 가능해요? 부하가 너무 많이 걸리거나 아니면 음성 응답 특성 때문에 표가 확 날 텐데요?”
“당연히 일일이 다 하드웨어로 처리해야지.”
박세영 대리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설마 그걸 다 칩으로 설계했다는 말이에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일단 칩으로 만들고를 떠나서 정답이 없을 텐데요? 그거 할 때마다 바꾸면 개발 비용이 수백억은 넘잖아요?”
조창호 차장은 그제야 어깨에 힘을 팍팍 줬다.
“그렇지. 그런데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 KMBOOK에 헬렌이라고 있는데…….”
실제로 헬렌은 여러 가지 재능이 있는데, 이런 소프트웨어 튜닝에 있어서도 전문가였다. 바로 그녀가 가능한 음성 인식 로직을 안정화한 것이었다.
조창호 차장이 그걸 하드웨어로 구현했고 말이다.
하지만 박세영 대리 처지에서는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다 좋아요. 하지만 그걸 전체 시스템에 욱여넣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단순히 기능 블록이 아니잖아요.”
“최민혁 실장님이 그 일을 다 해. 전체 시스템 개요를 딱 한 번에 잡는 분이니까. 그게 예술이지. 볼 때마다 경악하니까.”
“……!”
박세영 대리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녀는 몇 번에 걸쳐서 더 질문했다. 그런데 조창호 차장의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떠올리면서 혀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사실 사람들이 정말 모르고 있는 사실이야.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은 우리를 다 합친 것보다 더하니까. 솔직히 우리가 없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님이 엔지니어 뽑아서 일을 진행해도 충분하다고 해야 할까?”
“…미, 믿을 수가 없네요.”
박세영 대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뒤늦게야 자신이 한 질문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태성 실장이 원한 것을 알려면 아예 조창호 차장을 스카우트해야 한다. 아니,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다. 조창호 차장이고 헬렌이고, 그냥 핵심 인력은 최민혁 실장 한 명인 셈이니까.
‘맙소사.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이런 걸 권태성 실장에게 이야기해도 믿을 것 같지가 않아.’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조창호 차장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조창호 차장의 순수한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단순하고, 지루하던 사람이 말이다.
그의 말에 이제는 오히려 흥미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변화가 누구 때문인지도 금방 깨닫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야. 그저 오성 전자라는 허울 아래 그저 부품처럼 죽어라 일만 했을 테니까.”
“…네.”
박세영 대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더 질문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묵묵히 조창호 차장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권태성 실장의 지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창호 차장의 순수한 강인함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 * *
박세영 대리는 조창호 차장을 다시 만난 후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휴가를 냈고, 그 동안 조창호 차장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때문에 권태성 실장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다만 이틀이 지나자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국 다시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