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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영 상무의 일은 그쪽에서 먼저 와서 제안한 겁니다.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연락 드렸습니다. 저희 오성 전자는 최민혁 실장과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오성 전자의 이런 반응은 솔직히 잘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 오성 전자도 최민혁 실장님에게는 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네. 그러니 이번 일은 사전에 연락드렸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까닭이다. 아마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이런 태도를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니 상대가 이런 반응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질질 끌어온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언급했다.
[저도 그렇죠. 으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괜한 오해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 안 그래도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연락을 잘 주셨군요.]
권태성 기획실장은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저, 정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자신의 밀당이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물론이죠.]
[…가, 감사합니다.]
[어차피 서로 상호 이익이 되는 일로 이미 암묵적으로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우리 오성 전자는 늘 최민혁 실장님에게 감사할 따릅니다.]
하지만 최민혁 입장도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벨린 투자에 조 단위의 달러를 보유 중이었다.
[지나치게 좋아할 것은 없어요. 저야 자금이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제값을 주지 않는다면, 콜린스 사업부를 오성 전자에게 매각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 네.]
[저는 오성 전자의 해외 공장에서 콜린스 제품을 양산한다면 우리 측에서 올리는 매출 대비 4~5배는 더 먹는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이 고안한 LCD가 문제입니다. 특히 LCD-TV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
[물론 앞으로 아날로그는 LCD에 밀릴 것이 분명해요. 하지만 대형 LCD는 좀 다르죠. 그건 앞으로 10년간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장이 존재할 겁니다. 문제가 되어도 최소한 5년 정도 지나야 하죠. 그동안에 오성 전자가 콜린스를 팔기 시작하면, 세계 아날로그 TV 시장을 선점할 수 있죠. 소니도 밟아버리고 말이죠.]
그리고 이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오성 전자라도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새로 개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콜린스 사업부를 인수해서 손만 보면 된다. 적어도 1년이면 콜린스 사업부 인수로 말미암은 투자금액은 뽑고도 남을 일이었다.
[…네.]
권태성 기획실장은 결국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그도 최동영 상무를 만나면서도 계속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 말이 전략 기획실에서 예측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략 기획실의 수백 명이 머리를 맞대서 예측한 결과와 거의 일치했다.
다만 전략 기획실도 이걸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말은 좀 달랐다.
실제로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확신했다.
[제가 콜린스 사업부 매각 기념으로 조언을 하나 하자면, 앞으로 제가 한 말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제 애칭이 투자의 신인 건 아시죠? 틀리지 않을 겁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후에는 근사한 조언도 같이 해드리죠. 아마 오성 전자, 아니, 오성 그룹이 절대로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권태성 실장과 이야기하는 중에 문득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말로 직접 떠보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좀 다른 형태로 자극을 줄 필요가 있었다.
[오성 전자의 입장은 알지만, 저로서는 딱히 오성 전자만이 거래 대상인 게 아닙니다. 정 아니다 싶으면 LC 전자나 대운 전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판단하셔야 할 겁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협상은 질질 끌 생각이 없으니까. 다른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냉랭한 마지막 말.
그리고 끊어진 전화.
권태성 실장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도 나름 자존심을 굽혀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최민혁 실장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성 전자를 상대로 갑질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말을 해도 정말 싹수없이 하는 것 같아. 설마 지금까지 콜린스 매각을 질질 끈 것도 가격을 처올리기 위해서였어?’
아니면 노골적으로 오성 전자를 압박하는 것일 수가 있었다.
어쨌든 권태성 실장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 * *
최민혁 실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자신이 원한대로 되었다고 판단해서 히죽 웃고 말았다.
그는 그다음에 콜린스 사업부를 팔아치우면 추가로 들어올 현금을 생각했다.
이번에 말이 좀 과했나 싶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당분간은 에플 매각 대금이 있으니, 자본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옆에서 조용히 통화를 듣고 있던 조성돈 팀장은 달랐다.
“권태성 실장의 이야기를 봐서는 뭔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모두 최동영 상무 때문으로 보이는데, 최동영 상무를 저대로 두실 겁니까? 오성 전자에 가서 한 일도 결국 최민혁 실장님의 이름을 이용했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쓰게 웃었다.
“그냥 두죠. 미끼라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제가 가서 말하면, 오성 전자에게서 지금과 같은 반응이 안 나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LC 전자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오성 전자 역시 딴생각을 할 겁니다. 기술을 확보했다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일 리가 없죠.”
“이미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더욱이 그 일은 우리 할아버지에게 말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아마 할아버지는 가족끼리 그것도 못 하냐고 할 테니까.”
“설마요?”
그는 자신이 과거 KM 전자에 입사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뇨. 우리 할아버지는 반드시 그렇게 할 거예요. 이제까지 우리 셋째 큰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부회장님과는 상황이 좀 달라요. 최동영 상무는 그걸 노린 것이고요.”
“아,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 셋째 큰아버지는 지금까지 기회만 노려왔던 거죠. 그리고 샐로먼 브러더스가 자금을 대준다고 하니, 슬쩍 이동통신 사업은 건드려서 우리 할아버지를 자극한 것이고요. 사실 오성 전자와 손을 잡는다면, 그렇게 비관적인 것도 아니에요.”
“서, 설마 그 사업이 성공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요. 으음, 망하지 않는다는 정도죠. 그런데 그 정도만 해도 적자는 보지 않아요. 더욱이 시간이 지나서 CDMA 사용자가 급증하면 이익률은 더 커질 테니까요. 물론 오성 전자와 손을 제대로 잡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결국 그건 최동영 상무 생각일 거고, 지금 권태성 실장의 태도를 봐서는 오성 전자에서는 제대로 협업을 안 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죠. 하지만 제가 아는 오성 전자는 순순히 우리 셋째 큰아버지의 의도를 따를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제가 뒤에서 압력을 넣으면 상황이 달라지겠죠.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한 것을 내놓아야 하는데,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아, 하긴.”
“LC 전자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오성 전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우리 최동영 상무가 손을 쓴 만큼 오성 전자도 뭔가 하려고 할 겁니다. 그 부분을 확인해 보세요. 그걸 잘 이용하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자, 일단 권태성 기획실장의 반응을 두고 봅시다. 제가 자존심을 건드려 놓았으니,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솔직히 권태성 기획실장이 숨기고 있는 것이 정말 궁금해요.”
“…네.”
* * *
최민혁 실장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오성 전자는 겉으로는 최민혁 실장과 협업하는 것처럼 행보했지만, 물밑에서는 최민혁 실장 기술, 일테면 애니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다만 이게 LC 전자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았다.
권태성 기획 실장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했다.
그는 원래 이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도 독촉할 수는 없었다.
원천기술 확보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동영 상무의 방문을 받은 후에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 통화를 하다가 당한 모욕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최민혁 실장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과 전화를 끝낸 후에 자신이 최근 보고받은 프로젝트 현황을 살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하나 골랐다.
대화형 컴퓨터다.
하드웨어는 문제가 많아서 아예 펜티엄PC를 이용했다.
이렇게 복잡한 하드웨어 성능 문제는 일단 배제할 수가 있었다.
이후엔 소프트웨어에만 집중했다.
그는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연락한 후에 바로 연구실을 찾아갔다.
“현재 연구 결과는 어때요?”
“문서 인식이나 음성 출력은 그럭저럭 잘됩니다. 음성 인식률도 낮지 않습니다.”
실제로 음성 인식률이 95%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음성 인식률 자체를 더 끌어올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휴우, 딱 5% 안팎인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최민혁 실장과 전화 후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뭔가 또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KMBOOK에서 진행하는 음성 인식은 모바일인데도 우리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여 줍니다. 음성 인식 결과를 받아서 AI가 그걸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
프로젝트 담당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애니를 목표로 해서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LC 전자처럼 달려들었다가 실패한 후에 방향을 바꾸었다.
프로젝트를 쪼개서 인력을 더 늘린 것이었다.
이번 연구는 이곳 오성 전자 중앙 연구소만이 아니라 오성 종합 기술원을 비롯한 다른 계열사 연구소에서도 병행해서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했음에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문서 인식, 음성 출력에 집중해서 결과를 도출했을 뿐이다.
판매되는 상품은 이게 중심이고 말이다.
이 부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펜티엄 컴퓨터 성능을 최대한 이용한다면 말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소비자 반응이었다.
결과가 그렇게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실제 엔지니어가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권태성 실장 역시 그걸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분위기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했다.
“제가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이대로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말 돌리지 마시고요. 지금 분위기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거 안 회장님이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일입니다. 제 보고 리스트에 이 항목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안건민 회장’ 이름이 나오자 담당자의 얼굴은 패닉에 빠졌다.
권태성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히려 담당 엔지니어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프로젝트 팀장은 힐끗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 나름대로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상업적인 가치는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마 IBM에서 올 하반기에 OS/2를 출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이 OS/2는 기본적으로 95% 이상의 음성 인식 성공률을 보유했습니다. 문서 작성기, 화면 크기 조정도 음성 인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실로 뜬금없는 이야기.
OS/2를 명문으로 내세워서 이 기술의 한계를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어서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 툴이 OS/2만큼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좋습니다. 하면 애니에 적용된 음성 인식 기능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까?”
“그건…….”
그도 답답해서 오른손으로 가슴을 탁탁 쳤다.
“좀 답답합니다. 음성 인식률에서 차이가 별반 없다면 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음성 인식 응답 특성 차이가 있어요. 일테면 그 5% 오차에 대응하는 속도 차이가 큽니다. 그런데 애니는 이 음성 인식 성공률 자체가 더 높습니다. 제가 보고받은 바로는 99%가 넘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