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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 역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 미묘한 동적 관계 속에 놓인 피터 어빙은 어차피 토사구팽의 대상일 뿐이다.
그 스스로는 최민혁 실장에게 압력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그걸 안 대가로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니.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은 자신이 넌지시 한 이야기에 관한 결과를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에게서 직접 전화로 연락받았다.
[정말입니까?]
[…원하는 게 그것 아니었습니까? 가만, 혹시 절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했던 겁니까?]
[아, 아니에요. 고맙죠. 다만 이왕 부탁한 김에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어서요.]
[…말씀해 보세요.]
최민혁은 자신이 딱히 원한 일은 아니지만 에플 지분 매각으로 클린턴 행정부에 빚을 지워줬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굳이 그 일을 넘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가 아는 지인 한 사람을 IMF 쪽에 들여보내고 싶어서요.]
[…아태 담당 국장 자리 말입니까? 하지만 그 자리는 아직…….]
[이왕 거래할 때는 확실히 하시죠. 앞으로 우리 사이의 미래를 생각해야죠. 설마 이번 거래로 끝낼 생각입니까? 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연락 주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최민혁 실장은 오랜만에 소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 역시 미국 정부를 상대하는 것이 썩 마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하기는 해야 했다. 꼭 미국 정부와의 협상 때문이 아니라 샐로먼 브러더스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앞으로 IMF가 하는 일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자기 사람 한 명을 박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배신을 하지 않을 사람으로 말이다.
‘김계영이라…….’
* * *
김계영은 갑작스러운 최민혁 실장의 연락을 받고 나서는 당황했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바로 보자고 할 줄은 몰랐다.
최민혁 실장이 잠깐 자신을 살피기는 했다.
하지만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전생의 기억에서 ‘김계영’과 관련된 사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정보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떠오른 것이 없었다.
그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의 전생 인맥은 최악이었다. IMF 쪽에 아는 인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그 대상이 김계영밖에 없었다.
“혹시 IMF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네? 그게 무슨…….”
“이야기 길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묻겠습니다. IMF로 다시 돌아가서 못다 한 일을 끝내고 싶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김계영은 바로 대답하고도 얼떨떨한 표정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 역시 IMF 내부 일은 잘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았다.
“좋네요. 아마 IMF 쪽에서 다시 연락이 갈 겁니다.”
“…정말이시군요.”
최민혁은 전생 기억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 썩 편한 얼굴이 아니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다른 사람으로 골랐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다만 제 말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정확히 어떤 지시인지 알 수 없을까요?”
“그냥 IMF 내부가 돌아가는 이야기나 듣는 거죠. 특히 동남아 쪽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한국도 포함됩니다. 아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IMF 임직원이면 알 수 있는 정보죠.”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스스로 한번 파악해 보기 바랍니다. 그 정도 역량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잘 알지 않습니까? 요즘 동남아 경제가 심상치 않은 거 말입니다. 태국 바트화 사태가 그 증거죠. 거기에 멕시코의 행보 역시 문제죠. IMF 차입금을 조기 상환한 거 말입니다.”
“아, 그건 저도 압니다. 다만 그 정도 일은 최민혁 실장님이 관심을 둘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이 일이 단순히 동남아 일부에서 일어날 문제인지, 아니면 동남아 전체를 불태우고, 한국에도 영향을 줄지 말입니다.”
“…그건.”
김계영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언론을 통해서 접한 최민혁 실장의 이미지와 달라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진지한 최민혁 실장의 두 눈빛을 보자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건 스스로 하셔야 할 일이고요. 다만 제가 원하는 것은 IMF 내에 이상이 생겼을 때, 우리 쪽에 정보 넘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혼자 임의대로 결론 내리지도 말고요.”
“…알겠습니다.”
김계영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을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국제 자본에 한해서만큼은 얕잡아 봤다. 그런데 막상 최민혁 실장과 몇 마디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 혹시 제가 갈 자리는……”
“아태 담당 국장입니다.”
“네? 아, 아태 담당 국장 말씀입니까?!”
김계영은 매우 놀랐고, 당황했지만 더 이상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이 중간에 남아서 자잘한 이야기를 해주기는 했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에 딴지를 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 * *
김계영은 한국은행에 다급하게 사직서를 낸 후에 인수인계를 했다. 그가 다시 IMF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돌아서인지 그의 사직서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없었다.
이보다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IMF 아태 담당 국장 자리는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더욱이 조성돈 팀장의 지시 때문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공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비공식 절차에 따라야 했다.
다만 그는 IMF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IMF 본사에 돌아가서 황당한 장면을 봤다.
다름 아닌 휴버트 나이스 아태 담당 국장이 짐을 싸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 역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자신의 IMF 귀환과 더블어서 짐을 싸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들의 행보는 엄밀히 말해서 김계영과는 관련이 없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이 있어서 짐을 싸는 것이다.
IMF는 당연히 어수선했다.
제일 윗선에서 내려온 오더라서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이 일이 그냥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계속 돌기 시작했다.
[미 국무부 쪽에서 압력을 넣었다는 소리가 있어. 황당한 것은 그 배후야. 최민혁 실장이란 소리가 있어. 특히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헛소리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던데?]
최민혁 실장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힘을 썼다는 소리가 파다했다.
김계영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직접 최민혁 실장을 만났다. 그는 때문에 IMF 내에 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휴버트 나이스 전 아태담당 국장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스폰서를 제대로 물었나 봐.”
“스폰서면 어떻습니까? 솔직히 복수해서 통쾌하기만 합니다.”
“…오랜 만에 만나서 할 말은 아니야.”
“전 아태 담당 국장님이 저에게 한 일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죠. 오히려 저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해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자신이 한 일 중에 뒤늦게 비리가 터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
휴버트 나이스 아태담당 국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설마 사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흘러갈지는 전혀 몰랐다.
아니, 억울했다.
피터 어빙이 잘리는 것은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자신이 최민혁 실장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일을 당하느냔 말이다.
설마 김계영 때문인가.
김계영의 새로운 스폰서인 최민혁 실장의 작품인가.
피터 어빙을 날려 버린 최민혁 실장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IMF 역시 미국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미국 정부가 IMF 내부 인사까지 마음대로 하는 경우는 흔치가 않았다.
그런데 그 황당한 일이 지금 일어났다.
솔직히 그는 하소연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미국 메이저 언론조차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는 쉬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김계영이었다. 그도 지금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몰랐다.
그건 최민혁 실장 본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몇 사람 이름을 대기는 했지만 확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깔끔하게 서비스를 해준 것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최민혁 실장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챙길 것은 많았다.
에플 지분 매각 대금이 그 하나였다.
아니, 다른 부분을 포함하면 앞으로 협상에서도 더 유리하고 말이다.
아직도 지지부진한, 정확히는 이지수 박사가 손을 대기는 한 것 같은데 보안으로 계속 덮어버리고 있는 무인 항공기, 사드 문제 협상 자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내막까지 잘 모르는 김계영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10년 내내 자신의 마음속에 쌓인 앙금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최민혁 실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조심하기 바랍니다. IMF를 나가서 괜한 짓을 벌이다가 정말 매장당할 수 있으니까.”
“…….”
휴버트 나이스 아태 담당 국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괜한 무리수를 둬서 토사구팽이 된 것은 인정하니까.
‘하, 조심해야 했어.’
하지만 좀 많이 늦은 셈이다.
인생은 실전이니까.
‘일단 데릭 모건 이사 쪽에 한번 이야기는 해봐야겠어.’
* * *
데릭 모건 이사 역시 휴버트 나이스 아태 담당 국장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는 황당해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피터 어빙 일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는 IMF 내의 자신의 측근들이 단번에 쏠려 나가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미국 정부를 움직여서 IMF에 압력을 넣을지는 몰랐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채널로도 알아봤다.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었네. 클린턴 캠프 쪽에서도 최민혁 실장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 같아. 뭐, 에플 지분 매각 이후에 챙긴 막대한 자금도 자금이지만 로스 페리 때문인 것 같아. 로스 페리가 반대 측에 붙는 것을 원치 않은 것 같아.]
사실 로스 페리 일이 어떤 식으로 풀려갈지는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이와 관련이 있는 이상 클린턴 캠프도 최민혁 실장을 더 조심해야 했다.
재선을 앞둔 지금은 더더욱 말이다.
[좀 기다려 보게. 미국 대선만 끝나면 상황이 또 달라질 테니까. 한국 속담에 소나기는 피해 가라고 하잖아. 지금은 몸을 숙이어야 할 때야.]
[…….]
‘하.’
데릭 모건 이사는 이 생소한 경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 *
최민혁 실장 역시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에게 감시 대상 명단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게 바로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솔직히 조시 로버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결과는 김계영을 통해서 보고를 받았다.
조성돈 팀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더한 결과입니다.”
“그러게요.”
최민혁은 솔직히 의아했다. 그가 아는 바로 IMF 내의 조직이 저렇게 운영되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미국 정부가 관여했다고 해도 말이다.
‘다른 놈이 끼어든 것일까?’
그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지금 IMF를 건드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로스 페리를 거론했다.
“아무래도 로스 페리를 건드린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당장 로스 페리의 돈줄은 클린턴 캠프에도 고심거리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