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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70화 (97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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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금처럼 IMF를 이용해서 압박할 수는 있겠지. 필요하다면 IMF를 이용해 재정 경제원 같은 정부 조직을 동원할 수도 있어.’

어지간한 한국 대기업이라면 상당한 압력을 받을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어지간한 한국 대기업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는 걱정스러웠다.

미국 정부 말이다.

그는 에플 이사회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미국 정부 측 인사가 자신에게 반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미국 행정부 내에 있는 자신의 연줄인 조시 로버트 국무부 아태 차관보에게 슬쩍 연락했다.

[최민혁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에플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잠긴 어조의 조시 로버트 차관보의 음성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전화를 당장에라도 끊어버리고 싶었다.

최민혁은 그래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제가 심했던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역시 딱 건드리니, 반응이 왔다.

최민혁 실장은 이대로 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전 미국 정부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클린턴 행정부군요.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

이번에는 긴 침묵이 감돌았다.

조시 로버트는 이전만 해도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뛰었는데,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네? 굳이 한국에까지…….]

[제가 가겠습니다. 오늘 저녁 비행기 편으로 갈 테니, 내일 오전에 만나시죠.]

[…괜찮겠습니까? 미국 국무부 일로 많이 바쁜 것 같은데…….]

[최민혁 실장님 일이 그만큼 우리 국무부에도 중요합니다. 이전과는 상황이 또 달라졌으니, 그런 점은 신경을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찜찜한 얼굴이었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를 존중해서 약속 시간과 장소에 대한 선택은 상대에게 넘겼다.

* * *

미 국무부 아태 차관보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을 상대로 중요한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따라서 이를 상대하는 이는 한국 외교부 소송인 차관보급 이상 인사가 상대한다.

현황에 따라서는 또 달랐다.

필요하다면 차관, 아니, 장관급이 직접 마주할 수도 있었다.

이환채 재정 경제원 차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외교부를 통해서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가 갑자기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그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실제로 산업 통상부에서는 국장급 인선이 나갔고 말이다.

오히려 외교부에서 차관보급 인사가 나와서 이환채 차관을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공항에 나와서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행보는 관례에 가깝다.

다만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외교부에 자신의 행보를 알린 것에 불과했다.

“어? 여러분이 왜…….”

아차 싶었다.

최민혁 실장의 전화를 받고 나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서 한 실수였다.

이환채 차관만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뭔가 실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다른 급한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조시 로버트가 동행한 파르빈 라미네즈 국장을 쳐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설마 한국 외교부가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오히려 이상한 답변이었다.

미 국무부 아태 차관보는 결코 가볍게 볼 위치가 아니었다.

한국 외교부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외교부의 다른 부서가 나서는 것이 오버였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순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방한한 것은 엄밀히 말해서 비공식적인 행보였다.

다른 핑계를 댈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최민혁 실장이 최근에 사고를 치는 것을 봐서는 차라리 말을 해두는 것이 편했다.

“…최민혁 실장님을 따로 만나려고 방문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한국 정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환채 차관이 가장 눈치가 빨랐다. 그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나섰다.

“미 국무부와 관련된 일인데, 우리 한국 정부에서 몰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뇨. 미 국무부와 최민혁 실장 사이의 일입니다. 한국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한국인입니다만?”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일은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정 최민혁 실장 일이 궁금하면 최민혁 실장 본인에게 직접 들으셔도 됩니다.”

“…최민혁 실장이 말을 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겠죠?”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는 미국 국무부도 이제 함부로 못 하는 최민혁 실장을 한국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한국 정부를 통해서 최민혁 실장을 견제할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오히려 거꾸로 될 수도 있었다.

“제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딱 이 말을 끝으로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횡하게 떠나 버렸다.

다른 수행원도 같이 말이다.

이환채 차관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재정 경제원 차관인데, 미 국무부에게 퇴짜를 맞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중얼거리는 이야기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 거지?’

* * *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 클린턴과 조지의 개표 결과는 각각 43%, 37.4%였다.

클린턴으로서는 압승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3순위인 로스 페리가 무려 18.9%를 획득했다.

만약 조지와 로스 페리가 손을 잡았다면, 클린턴을 이겼을 수도 있었다.

그 로스 페리가 에플 주식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봤다면, 어떻게 될까.

클린턴 캠프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을 막 던진 덕분에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에플 주가가 결국 90달러, 80달러까지 폭락했기 때문이다.

계속 버티던 에플 주가 역시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의 지분 정리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다만 클린턴 캠프는 이런 사실을 외부에 말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과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어떻게 보면 이 일에 대한 감사 표시로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만약 최민혁 실장이 전화하지 않았다면, 먼저 나섰을 것이다.

다만 그 자신이 이전에 한 일이 있어서 슬쩍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최민혁 실장 역시 에플 지분 매각 때문에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 눈치를 봤다. 그가 전화할 때랑은 달리 의외로 분노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한 후에 그 이유를 알았다.

‘아하, 로스 페리 때문이구나. 하긴 에플 주가가 200달러일 때 지분을 매각했다면, 아후,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겠어.’

하지만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는 클린턴 캠프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쩔 생각입니까?”

“네? 별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괜히 미국 정부와 척을 지기 싫을 뿐입니다.”

“그런 분이 그런 행동을 합니까?”

“결과적으로 잘된 것 아닙니까? 로스 페리 수중에 천문학적인 자금이 놓인다면 선거가 생각보다는 어려워질 텐데요?”

“설마 그걸 알고 에플 지분을 팔았다고 하실 겁니까?”

“네.”

최민혁 실장의 뻔뻔한 대답.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기가 막혀서 최민혁 실장을 째려봤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잘된 것 아닙니까. 서로 간에 오해가 있어서 문제가 좀 있지만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최민혁 실장을 차갑게 째려봤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전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재벌 3세 놀이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미국 정부를 건드리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면 지금 일은…….”

“휴우, 어디까지나 차익 실현입니다. 그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1달러에 구입한 주가가 150달러를 넘어서니, 팔고 싶은 것뿐입니다.”

“금액이 크지 않습니까?”

“압니다. 그런데 저도 자금이 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미래 산업 때문에 자금이 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정말 미국 정부와 척을 질 생각이 없는 것 맞습니까?”

“네. 그건 확실합니다. 앞으로는 사전에 미리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장은 문제가 생겨도 미국 정부에서 손을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IMF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군요. 절 압박하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그냥 푸념 삼아서 한 말.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피터 어빙입니다. 아, 그리고…….”

최민혁 실장은 주섬주섬 기억나는 이름을 하나씩 말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도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말대로 일은 잘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 그래도 에플 이사회 때문에 골치가 아픈 터라 미국 정부와의 불화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잘 해결된 것 같아.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를 알아둔 것이 신의 한 수였어.’

그는 이번 일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에플 다음으로 자신의 약한 고리를 하나씩 떠올렸다.

그중에 한 사람은 최용욱 회장이다.

그런데 과연 최용욱 회장만이 문제가 될까.

최씨 일가 역시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최문경 부회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입을 다문 채 지켜보는 이들도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결국 고민을 한 끝에 최용욱 회장에게 연락했다.

[할아버지, 이번 가족 식사 일정은 당겨서 하는 것으로 하죠. 네? 아뇨. 그냥 확인할 일이 좀 있습니다. IMF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보험이라고 해두죠.]

그는 단순히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가족 구성원들의 행보를 일일이 다시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민수, 기범이 형이 좀 이상하군. 할아버지에게 너무 질척거리는데, 애들이 왜 이래? 가만, IMF의 피터 어빙이 방문한 이후부터 행동이 달라졌어.’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조용하기만 하던 최동영 상무의 행보도 이상했다.

‘설마 데릭 모건 이사 이 작자가 수작을 부린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동 통신에 관심을 둔다니. 일을 복잡하게 만드네.’

* * *

피터 어빙은 갑자기 소환을 받고 난 후에 직무가 정지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직 해고까지는 아니었지만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는 황당해서 윗선에 따졌는데, 돌아온 대답이 황당했다.

[그러게 자네도 좀 눈치를 봐 가면서 행동해야 할 것 아냐. 최민혁 실장을 건드린 후환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어?]

[네?]

황당한 일이었다.

그는 결국 다급히 데릭 모건 이사에게 연락해 보았다.

데릭 모건 이사도 능력은 좋아서 그 원인을 바로 파악했다.

[미국 정부에서 압력을 넣은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시간을 좀 가지세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봐줄 테니까.]

피터 어빙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을 돌봐주던 윗선 때문이다.

그들이 갑자기 침묵한 것이었다.

‘씨발.’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피터 어빙은 실상 데릭 모건 이사를 믿지 않았다. 그는 IMF 내의 윗선을 더 신뢰했다. 그들이라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확신했는데 이번에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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