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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스로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자세한 사안은 모르니까. 그보다는 에플 이사회를 한번 살펴보세요. 저라면 그쪽에 손을 댈 겁니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스티븐이 알아서 진실을 알기를 바랐다. 더욱이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 자신과 놓인 상황이 달랐다.
‘내가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지. 시간도 시간이지만 너무 번거로워.’
거기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바로 나비 효과.
자신이 손을 쓴 덕분에 스티븐의 미래가 바뀌었다.
그와 관련된 인맥 역시 변화가 일어났다.
최민혁 자신이 그들에 대해서 일일이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스티븐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최민혁 실장이 벨린 투자를 통해서 에플을 살펴보게 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정확히는 벨린 투자가 에플의 이상 상태를 찾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 것이 말이다.
다만 이대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에플 이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로스 페리 이사에게 전화해.”
* * *
로스 페리는 한때 스티븐이 창업한 NEXT에 투자할 정도로 스티븐을 믿었다. 그는 스티븐의 잠재력을 끝까지 신뢰했다.
그는 스티븐이 에플에 복귀하는 모습을 보자 즉시 에플 지분을 사들였다.
그다음에 한 일은 에플 이사회에 합류해서 스티븐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스티븐을 지원하는 지지자 역할을 한 것이었다.
로스 페리의 이런 행보 덕분에 스티븐의 경영권은 반석처럼 탄탄했다.
최민혁 실장에 이어서 스티븐의 든든한 지지자가 된 것이었다.
다만 로스 페리 역시 욕망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야망 말이다. 그가 굳이 스티븐의 지지자로 있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아, 물론 스티븐 등골을 빨아먹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윈윈 전략이다.
그는 때문에 미국 재선을 앞두고 이제 슬슬 선거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에플 이사회 이사 자리 역시 이제는 물러나야 했다.
에플 지분도 일부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플 주가가 무려 150달러를 돌파한 것이었다.
그로서는 의도치 않게 초대박을 터뜨린 셈이었다.
아니, 그는 스티븐의 잠재력을 믿을 덕분에 언젠가 이런 초대박이 터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일정이 좀 빨랐을 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그가 에플 지분을 막 정리하려는 시점에서 갑자기 최민혁 실장이 에플 주식을 시장에 막 팔아치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로스 페리는 장기 투자자답게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행동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단숨에 무려 8% 가까운 물량을 패대기친 것이었다.
에플 주식 장외 시장에 물량이 끝도 없이 쓰나미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에플 주가가 100달러 밑으로 추락한 다음이었다.
아니, 에플 매수세가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제는 에플 주식을 장내가 아니라 블록딜로도 팔아치우기가 어려웠다.
다들 겁을 집어먹고 쉬쉬한 것이었다.
이젠 에플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로스 페리가 데릭 모건 이사의 방문을 받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물론 데릭 모건 이사 면전에서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당신 말은 참고하겠습니다.”
하지만 데릭 모건 이사는 넌지시 유혹이 가득 담긴 말을 했다.
“이번 대선에 뛰어들 것으로 압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측에서 이사님을 돕겠습니다. 이사님이 꿈을 이루도록 말입니다!”
“…흠”
로스 페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데릭 모건 이사의 도움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샐로먼 브러더스의 도움 말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샐로먼 브러더스를 정말 싫어했다.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기 편으로 써야 했다.
그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간접적인 지원은 할 수가 있었다.
일테면 마쿨라 이사의 에플 이사회 복귀 말이다.
그 자신의 후임자로 선택해도 나쁘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전 최민혁 실장을 에플에서 몰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흠.”
로스 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최민혁 실장의 갈등은 이제 미국 정가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도 의문이 많이 떠올랐지만 한 가지는 정말 궁금했다.
“최민혁 실장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까?”
“이사님하고 입장이 똑같습니다. 이번에 에플 지분 폭락 때문에 손실을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아…….”
그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 본인이 알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 매각은 정말 미친 짓이었다.
“대답은 바로 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마쿨라 이사 복귀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일단 비공식적으로라도 에플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릭 모건 이사의 표정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가 스티븐의 연락을 받은 것은 마침 이 일 때문에 고민하던 시기였다.
스티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치 진실의 일부를 사전에 안 것 같았다.
로스 페리 이사는 결코 자기 생각을 숨길 마음은 없었다.
[사실 제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 기회에 미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도 이제까지 스티븐을…….]
* * *
최민혁 실장 역시 로스 페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이번 미국 대선에 다시 끼어들어서 클린턴과 싸우고, 그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스티븐에게서 이 로스 페리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설마 로스 이사가 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머뭇거리는 스티븐이었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스티븐과 로스 페리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혹시 대선 자금 때문입니까?]
[하, 정말 속일 수가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로스 페리는 저의 든든한 후원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제가 에플에서 물러났을 때도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NEXT 창업할 때에 절 밀어준 사람이 그였으니까요.]
아무리 괴팍한 스티븐이라고 해도 로스 페리의 도움을 잊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이후라 더 로스 페리에게 감사했다.
[혹시 에플 지분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네.]
[하면 이번 선거 자금이 문제가 되겠군요. 이거 본의 아니게 스티븐에게 피해를 준 셈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보다는 클린턴 쪽에서 오히려 이 상황을 더 환호합니다.]
[아.]
최민혁 실장은 혀를 찼다. 그는 뒤늦게야 에플 주가를 흔들어 놓은 덕분에 클린턴의 정치 숙적인 로스 페리에게 한 방 먹여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린턴 대통령이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미국 정부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물론 불만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그건 비공식적인 라인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클린턴 선거 캠프 쪽에서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정말 시세 차익으로 돈 좀 만져볼 생각으로 에플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었다.
덤으로 200억 달러가 넘는 자금, 아니, 어쩌면 3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았다.
솔직히 IMF도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요즘 그의 심정이 그랬다.
IMF 관료가 찾아와도 심드렁한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희로애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이 생각보다는 많았다.
최민혁 실장도 지분과 현금의 차이를 이번에 실감했다.
[…앞으로는 좀 조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되는 것은 에플 이사회 분위기입니다. 로스 페리가 제 쪽에서 손을 떼는 상황이 되자 다른 이사들 역시 갈등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분 문제였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에플에게 한 방 먹일 대안이 많았다. 당장 특허 로열티만 올려도 에플은 숨을 헉할 테니까.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쿨라 이사인데, 이자가 다시 에플 이사회로 복귀했습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요청하겠습니다.]
[…네.]
스티븐이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는 로스 페리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쿨라 이사가 다시 복귀하다니.’
* * *
스티븐은 로스 페리를 만나서 ‘마쿨라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한동안 허탈했다. 그는 로스 페리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이 진행된 사항이었다.
“…마쿨라 이사라니? 언제 마쿨라 이사가 다시 에플 이사회에 합류한 건가?”
마크 실러 역시 크게 당황해서 사실을 확인해봤다.
“…아직 공식적인 사안은 아닙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볼 때는 지난주입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지만 또한 그렇게 보기는 힘들었다.
마쿨라 이사가 이전에 그를 찾아와서 압박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 일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마쿨라 이사 일은 다 지난 일이다.
그런데 또다시 마쿨라 이사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에플로 귀환까지 해서 말이다.
스티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지분을 팔면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다.
아니, 솔직히 손해를 좀 보더라도 블록딜로 믿을 만한 이에게 지분을 매각해도 될 일이었다.
‘하, 그건 무리인가? 하긴 150달러는 과해도 과했지. 정말 돌아버리겠네.’
* * *
데릭 모건 이사는 IMF를 이용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서 최민혁 실장을 견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그 일이 원한대로 풀려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최민혁 실장은 IMF와 붙어서 싸울 생각마저 한 것이었다.
문제는 IMF가 이걸 무시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 말이다.
그가 설사 IMF 내에 자기 측근을 최대한 이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리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압력을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재정 경제원은 이제 최민혁 실장을 무서워하고 말이다.
그들 역시 국제 수지 적자가 올해 들어서 급증하는 일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로서는 최민혁 실장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징글징글한 놈이네.’
데릭 모건 이사는 자신이 계속 무리하면 IMF를 통해 견제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효과가 확실치가 않았다.
그는 결국 다른 대안을 생각해야 했다.
다만 그런 중에 제임스 러너 이사에게서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얼마라고요?”
그도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을 막 팔아치운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문제는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쪽에서 그 지분 일부를 받았다는 거다.
아니, 꽤 많은 자금을 퍼부었다.
“한화로 3조가 넘는 자금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본사에서 말인가요?”
“네.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을 막 패대기친 터라 일부 물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플 주가가 기대한 것보다 더 가파르게 폭락했을 것이다.
만약 에플 주식 수급이 무너진다면 에플 주가는 대폭락할 수밖에 없었다.
에플 공매도 이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답이 없다.
결국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쪽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에플 물량을 받아야 했다.
어차피 에플 공매도를 위한 물량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미친 일을 벌였다는 말입니까?”
“…본사 쪽에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에플 주가가 너무 무너지면, 오히려 계획이 다 엉망이 된다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