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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득 헤지펀드가 배드 캅이라면, IMF가 굿 캅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오해입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한국 정부도 함부로 못 하는데, 감히 IMF를 건드릴 담력이 있겠습니까. 서로 소통이 없어서 오해한 겁니다.”
“…….”
피터 어빙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IMF 내에서 그렇게 고민한 일이 단순히 오해라는 말에 허탈감마저 느꼈다.
‘안병우 차관보가 잘못 알았다는 말인가?’
의구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리 질문해도 최민혁 실장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답답하시네요. 제가 지금 한국어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영어로 말하는 중입니다. 노라고 분명히 말해도 믿지 않는군요.”
“하지만 샐로…….”
라고 말하다가 입을 슬그머니 다물고 말았다.
샐로먼 브러더스 이야기는 여기서 나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최민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째려봤다.
“샐로 뭡니까?”
“아, 아닙니다. 샐로판과 같은 새로운 사업에 관심이 많나 싶어서요.”
“그런 사업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피터 어빙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민혁 실장을 떠보려는 이야기를 해봤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정말 순수한 차익 차원에서 주식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못을 박았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 그래 보였다.
‘그래도 이상해. 아무래도 좀 더 알아봐야겠어. 최문경 부회장도 있고 하니.’
* * *
최민혁 실장은 피터 어빙과의 만남 이후에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일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IMF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 정도겠지.’
이번 일로 데릭 모건 이사의 역량 한 가지를 알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의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리스트를 쭉 떠올렸다.
그중에 손을 쓸 수 있는 곳 말이다.
이번 에플 기조연설, CES와 관련해서 손을 쓸 곳은 많지 않았다.
‘한다면 에플 정도겠지.’
그가 만약 에플을 노린다면 뭐가 있을까.
전생 기억을 하나씩 다시 떠올려 보았다.
몇 가지 리스트를 작성해 봤다.
그중에 한 가지 안이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티븐에게 전화해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부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주변을 한번 잘 살펴보세요. 아무래도 기조연설을 방해하려고 할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CES 전시회 자체를 엎어버리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굳이 에플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도 문제가 될 수가 있었다.
[기존 제품 라인을 한번 잘 살펴보세요. 구조조정을 해도 여전히 판매 중인 제품 라인은 문제가 터질 수 있습니다.]
스티븐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 진행하는 모든 일은 최민혁 실장의 손길을 탔다.
‘도대체 무슨 소리지?’
* * *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의 조언을 받고 나서는 한동안 고민을 해봤다.
최민혁 실장이 저런 조언을 했다는 말은 뭔가 터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결국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을 불러서 원점에서 재검토를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 가지 일이 터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랩톱 일부에서 문제가 생겼다니?”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은 스티븐의 눈치를 봤다. 그로서는 스티븐이 한 지시에 놀랐다. 솔직히 처음에는 스티븐이 어디 아픈가 싶었지만,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 올라온 보고는 일부 사용자의 불만조차 아니었다.
시스템 다운과 모니터의 색상 변화였다.
언뜻 보면 사용자 과실 정도였으니까.
지역 AS 측에서도 사용자 불만을 듣다가 그냥 제품을 교환해 주었다.
문제는 결국 이 불량 제품이 제대로 위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역 AS 쪽에서 괜히 좋은 에플 분위기에 재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묻혀 버린 일이.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이 다시 확인해 보고서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놔두었으면 크로니클지에 기사화되었을 겁니다.”
정확히는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이 중간에 클레임을 건 고객을 찾아가서 교환을 해주는 것으로 협상을 봤다. 거기에 차기작 쿠폰도 주고 말이다.
스티븐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설마 크로니클에서 의도적으로 일을 부풀리려고 했던 거야?”
“그런 점도 있습니다. 제가 크로니클 쪽에 따로 알아본 바로는 윗선에서 이번 일을 최대한 파려고 사전 작업 중이었습니다.”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은 만약에 대비해서 불량 클레임을 주장한 고객과 협상도 했다. 만약 이 일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면 고소미를 먹여주겠다고 말이다.
“…자네 생각은 어때?”
“단순히 일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파워북 일부 모델과 파워맥 라인 몇 가지였다.
해당 제품들의 불량을 자세히 확인한 결과, 다 같은 연장선의 문제로 파악되었다.
스티븐은 황당했다. 그 역시 불량 내역을 수차례 확인하고, 담당 엔지니어를 불러 검토를 한 끝에야 진실을 알았다.
담당 엔지니어도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직 불량에 대한 클레임조차 제대로 올라오지 않아서 분석도 안 된 일을 말입니다.”
“…….”
이에 딱히 스티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잘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경험한 일은 그런 기대를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뭘 말입니까? 아, 불량 말입니까? 당연히 어떤 제품이라도 불량이 있게 마련입니다. 요는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거죠.]
[정말 그게 다입니까?]
[네. 일단은 그렇게 보시죠. 이번 일을 해결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해 드리죠.]
[최민혁 실장님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지금은 예민한 시기이니만큼 문제를 만들 수는 없죠. 관련 불량 제품은 전부 다 리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상을 벗어난 지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네? 저, 전부 다 말입니까?]
스티븐으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에플은 차세대 제품 출시를 앞두고 한창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과거 제품에 관한 관심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그건 에플 엔지니어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그들은 더 심했다. 그들은 죄다 이번 CES에 출시될 제품에만 눈이 돌아가 있었다.
실상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이번 제품은 초기 생산 물량이 아이팟만 해도 500만 대에 가깝다.
이 물량은 에플에서 전량 생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성, LC 전자에도 일부 외주를 줬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났다.
생산 수량에 따라서 제품 단가가 달라지니 그에 따라 전부 협상을 따로 해야 했다.
400만 개, 500만 개, 600만 개 물량에 따라서 제품 단가가 달라진다.
특히 낸드 메모리는 이 협상과 관련해서 단순하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에플 역시 시장 조사를 해도 정확히 얼마나 판매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재고를 너무 많이 만들어도 문제였다.
결국 에플 엔지니어 태반은 이 차기작에 매달려 있었다.
그 탓에 기존 파워북 라인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AS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도 이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전생 기억을 서칭해서 안 사실이 있다면 파워북 라인 일부를 에플이 리콜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일을 조금만 부풀려도 에플 신뢰에 큰 악영향을 줄 겁니다. 그건 차기작 매출에도 영향을 줍니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안 그래도 요즘 에플 주가 때문에 말이 많지 않습니까. 에플이 리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게 에플 주가에도 큰 영향을 줄 겁니다.]
일테면 에플 주가 폭락 말이다.
에플 공매도를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스티븐만 믿겠습니다.]
[…네.]
* * *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의 충고를 듣고 나서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는 일단 문제가 될 파워북 수량부터 파악했다.
적지 않은 양이었다.
분명 지금 에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다고 확신했다.
“문제가 된 파워북 라인을 전부 다 리콜해. 아니, 일단 언론을 통해서 기사부터 내.”
황당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마크 실러는 스티븐의 지시를 절대 거역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관련 부서에 파워북 라인에 대해 전량 리콜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이 나가고, 리콜을 시작하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문제가 터져 나왔다.
재충전 배터리가 타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모든 모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제품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제품이 있었다.
리콜해서 분석을 진행하자 뒤늦게 간헐적으로 이 문제가 터져 나왔다.
스티븐은 리콜된 물량 중에서 일부가 실제로 기름이라도 뿌린 것처럼 활활 타는 모습을 실험실에서 직접 확인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상태가 나쁜 모델은 마치 신나에 불을 붙인 것처럼 확 타올랐다.
물론 확률상으로 볼 때는 아주 작은 비율이었다.
문제는 저런 화재가 집이나 건물 안에서 났을 때다.
크로니클이 아니라 다른 메이저 언론사에서 저걸 기사화했다면, 에플에게는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크, 큰일 날 뻔했어.”
마크 실러 역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도 사태가 저렇게까지 나빠질지는 상상도 못 했다. 한편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엔지니어를 붙잡고 질문을 해봤다.
하지만 그들 역시 회로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도 저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님은 도대체 저런 것을 어떻게 예상한 것일까요?”
스티븐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전부터 저런 문제를 잘 알고 있었어.”
“아니, 제 말은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아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번 불량은 몇몇 고객도 확신하지 못한 눈치였습니다. 저희도 제품을 다 리콜하는 중에야 안 사실 아닙니까?”
“…….”
스티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 * *
스티븐은 따가운 마크 실러 수석 부장의 시선을 무시했지만, 속속 올라오는 정보를 파악하고 최악의 경우까지 예측해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바로 최민혁 실장에게 연락했다.
[아, 그거 말입니까? 벨린 투자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플 쪽을 실사한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제품 하자 문제를 찾았고요.]
[하면…….]
[아, 정확히 그 문제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조차 그걸 이용할 마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될 수도 있죠.]
스티븐은 영문을 몰라서 바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 스티븐과는…….]
[아무리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완전히 바보는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은 스티븐의 반응에 내심 감탄했다. 그가 자신의 충고를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지금 스티븐은 한창 과거 전성기 시절의 위상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스티븐이라면 얼마든지 당당하게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최민혁은 내심 감탄했다. 그는 결국 최근 IMF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IMF의 피터 어빙이라는 사람이 절 찾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우리 할아버지를 이용해서 압력을 넣으려고 왔습니다.]
[네? I, IMF 관료가 말입니까? IMF 관료가 한국 사기업을 찾아갔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죠. 그런데 IMF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 주도적인 의결권을 가지고 있어요. 그 미국 배후에 있는 자본과 엮어본다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죠.]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이 돌려서 하는 말뜻을 잘 알았지만 차마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