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62화 (962/1,021)

#

최민혁은 냉랭하게 소리쳤다.

“IMF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집단은 아닙니다. 빚만 없다면 두려워할 조직은 아니죠. 더욱이 우리 KM 그룹의 태생은 아시잖아요? 누구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최민혁 실장 각오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모습은 이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그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면 앞으로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의지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최민혁 실장은 전혀 예상도 못 한 지적에 무안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조용히 살기 위해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언제까지 질질 끌 수는 없어요. 이제는 끝장을 볼 겁니다!”

“…네.”

“그러니 우리 할아버지 상황도 실시간으로 확인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 * *

조성돈 팀장은 타박에 가까운 최민혁 실장의 질책에 탄식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바뀐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체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예외적이었다.

박상기 차장이 마침 그 모습을 발견했다.

“조 팀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가 슬쩍 내민 것은 자판기 커피였다.

조성돈 팀장은 피식 웃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곤 그나마 여유를 가졌다.

그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휴게실로 걸어갔다.

박상기 차장은 묵묵히 따랐고.

그런데 이미 휴게실 안에는 배종대 과장을 비롯한 기획실 직원이 빼곡하게 있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지 않은 이정원 과장 역시 한쪽 구석을 차지했다.

특이한 사실은 다른 팀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다른 팀은 다들 정신없이 바쁜 것 같습니다.”

왠지 조성돈 팀장을 타박하는 말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런 일이 늘 있던 일이라서 그저 맑게 웃었다.

박상기 차장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서 배종대 과장을 구박했다.

“배 과장, 조 팀장님이 정말 마음이 좋아서 참는 거야. 다른 홍보 팀장이라면, 정강이를 깠을 거야.”

배종대 과장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조 팀장님을 진심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우리 기획 팀에서 누가 조 팀장님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의 최측근 중에 측근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조성돈 팀장이었다.

KM 그룹의 모든 권력이 조성돈 팀장을 통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박상기 차장도 그걸 잘 알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아닙니다.”

배종대 과장이 역시 참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자꾸 그러니 불만을 사는 거죠. 조 팀장님은 만사를 혼자 다 끙끙 앓습니다.”

박상기 차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배 과장 말이 좀 심하기는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한 팀 아닙니까. 한번 말씀 좀 해보시지요.”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기획 팀의 따스한 시선을 의식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하게 할 말은 아닙니다. 그저 최민혁 실장님이 좀 변한 것 같아서요.”

박상기 차장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변하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이제까지는 재벌 3세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해왔는데, 에플 지분 매각 이후에는 재벌 3세로 시끄럽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아…….”

박상기 차장의 탄식.

다만 배종대 과장은 달랐다.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 그 답답한 재벌 3세 놀이를 집어치우고, 감추어둔 이빨을 드러내겠다고 한 겁니까?”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배 과장, 말 좀 가려서 하자.”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솔직히 간혹 최민혁 실장님 행동을 볼 때면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건 고구마도 고구마 나름이지 그러다가 보는 제가 설사를 하겠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하지만 그 조용한 이정원 과장조차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저 역시 어지간해서는 최 실장님 편이기는 합니다만 가끔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지나고 나면 이상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기는 합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렇게 찬성하지 못했습니다.”

정성근 대리가 슬쩍 한마디 했다.

“에플 지분 매각이 좋은 예입니다.”

“아, 맞다, 에플 지분 매각!”

그제야 기획 팀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역시 이번 에플 매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건 조성돈 팀장조차 잘 몰랐다.

“이제 겨우 8% 지분을 매각했고, 나머지 4%가 남았으니 상황이 어떻게 될지 끝까지 가봐야 알아. 지금 에플 주가가 95달러까지 밑으로 빠졌잖아. 생각보다는 이익 금액이 적을 수도 있어.”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최저가 12조는 넘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봐서는 14조나, 15조 선에서 결정이 나겠죠. 기존에 2조 5천억, 15억 달러까지 합치면 대략 20조는 넘을 겁니다.”

20조.

이 말에 기획 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금액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한 가지 의문을 더했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점은 전부 다 달러나 금으로 보관한다는 거죠. 도대체 왜 그렇게 달러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게 그렇게 이상해?”

배종대 과장은 툴툴거렸다.

“물론 금에 장기 투자한다면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님은 꼭 그런 것 같지가 않으니까요. 오죽하면 IMF가 이번에 최민혁 실장 때문에 한국 정부 일에 노골적으로 끼어들었다는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에이, 세상에 우연이 어디 있습니까. IMF가 불과 며칠 전에 행정부에 던진 자본주의 이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을 명분 삼아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을 셈이죠. 그리고 거기서 최근 한국 정부 일에 압력을 넣을 만한 일은 최민혁 실장뿐이잖아요.”

“…….”

다들 침묵했다. 배종대 과장 이야기는 의외로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박상기 차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설마 이번 에플 지분 매각 때문에 최민혁 실장님이 태도를 달리 마음먹은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하면 이번 IMF 조사도 결국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죠. 우리 기획 팀은 이제 IMF까지 관리를 해야 할 겁니다.”

배종대 과장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도 최근 KM 전자 기획실의 업무량이 양적으로 늘어나면서도 질적으로도 팽창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기획 팀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KM 전자 계열사를 관리하는 것만으로 미칠 것 같았다.

전부 그들이 처음 접한 기술이라서 새로 다 공부를 해야 했다.

그들은 그제야 조성돈 팀장 안색이 근심으로 가득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전과는 달리 공격적으로 나서면 일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조성돈 팀장 역시 팀원들이 두런거리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근심한 현실적인 이유를 깨달았고,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이 제발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바랐다.

‘일이 꼬이면,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갈 것 같아. 당장 최용욱 회장 문제도 꼬이고 있어. 결국,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 미국행은 연기되는 건가. 스티븐의 기조연설에 참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 * *

최용욱 회장이 최근 손자 민혁을 만나서 타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쪽저쪽에서 많은 압력이 들어와서다.

단순히 10대 대기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 기관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런 요청이 단순히 강압만은 아니었다.

당장 통상 산업부 쪽만 해도 부탁을 하는 자세였다.

그들이 굳이 국세청 같은 조직을 동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해 봤으니까.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한 번 국세청이 움직였다가 오히려 되치기를 당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협박할 수는 없었다.

부탁이 최선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그걸 알면서도 통상 산업부 공무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간단했다.

그래야 했으니까.

‘하, 원래 물어야 할 질문은 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서다니.’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에플 주식 매각 대금이다.

그걸 벨린 투자는 달러로 차곡차곡 보관했다.

정확히는 미국 메이저 은행도 포함해서 말이다.

더 황당한 것은 벨린 투자의 기업 형태다.

일반적인 기업과는 다국적 기업처럼 본사를 유럽 쪽에 두고 있었다.

천문학적인 에플 주식 대금이 결국 벨린 투자, 유럽, 미국 사이를 돌면서 국내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통상 산업부로서는 황당했다. 안 그래도 올해 들어와서 국제 수지 적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물론 섣불리 이 문제를 손자 민혁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 점을 예측했다.

“아마 최민혁 실장님도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니라서 그럴 겁니다.”

“아직은 정해지지 않았다?”

“예언가가 아닌 이상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맞아. 아마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도 믿지 않을 거야.”

“그게 최민혁 실장님의 고민일 겁니다. 최민혁 실장님의 미래 예측 능력은 탁월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슬쩍 내민 것은 개정판 X 리포트였다.

“…….”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X 리포트를 다시 읽어봤다. 작년에 읽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이미 상당수가 X 리포트대로 일어났다.

따라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항목이 그저 리포트 상의 보고서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전부 실제로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었다.

‘설마 정말 이렇게 될까?’

최용욱 회장은 이내 스스로 자책했다. 이미 증거를 충분히 봤다. 그런데도 믿지 않았다. 손자 최민혁의 처지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때마침 전화를 받았다. 최용욱 회장이 보고할 때는 전화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전화를 한 것은 급한 일 때문이었다.

그는 ‘IMF의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라는 말에 매우 놀랐다. 설마 그가 직접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는 몰랐다.

최용욱 회장에게 바로 보고했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

뭐 하는 사람인지 바로 기억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다행히 장승일 실장은 그 인물이 누구인지 사전에 알고 있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피터 어빙이 왜 자신을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 참.’

* * *

IMF는 최용욱 회장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다른 한국 10대 재벌 총수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때문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장승일 실장에게서 IMF,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 최근 한국 정부와 IMF 관계에 대해서 듣자 마음을 달리했다.

“…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다급하게 전략 기획실에 지시해서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에 관해서 조사를 시켰다. 일은 어렵지가 않았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 최근 한국 정부에 조언을 해주면서 이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실무형 거물인 셈이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오자마자 최용욱 회장을 찾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전에 약속을 정하지도 않고 이렇게 방문해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아니, 이번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언론에 알려진다면 자칫 오해를 만들 수 있고, 그러면 다시 보기 힘들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네.”

최용욱 회장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일단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겉으로 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