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영민 부장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그도 주식 매각 대금 규모를 확인하면서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한 번 거래에 수십억, 아니, 수백억 규모였다.
이 주식을 사고팔면서 거래를 해야 했다.
총 주식 규모는 무려 12조다.
시세 차익까지 고려하면 더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주식을 사고, 팔고 하는 규모가 이 정도였다.
이게 순순하게 주식만 팔아서 생긴 이득이었다.
하지만 그는 강준석 팀장을 한 번 쳐다본 후에 실무진을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에플 주가가 120달러는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 이상 주가가 오르면 더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차라리 지금 이 시점에서 한번 눌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월가의 잔뼈가 굵은 이들은 이런 일 처리가 결국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시 사안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후일 여론이 나빠져서 SEC가 조사를 시작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우영민 부장님이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우영민 부장은 SEC, 어쩌면 FBI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조언에 울컥했다. 하지만 말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내키는 대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우영민 부장, 아니, 이 새로운 직장인 벨린 투자를 걱정했다.
그들은 이미 벨린 투자가 모건 스탠리와 싸워서 협상에서 이긴 것도 알았다.
자기 삶의 터전이 잘못되기를 원치 않았다.
“모든 것이 법대로 되면 좋습니다. 아마 한국인은 우리 미국 법이 합리적이라서 법대로 된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도 엄연히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사회적인 여파가 커지면, 어떤 형태로든지 메스를 댈 겁니다.”
“그건…….”
“왜 샐로먼 브러더스가 요즘 와서 맥을 못 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과거 저지른 죄악 때문에 미국 정부에 찍혀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이 굳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쪽에 투자를 늘리는 것도, 중국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말하는 이는 조엘 맥클레인으로, 직급은 수석 펀드 매니저였다. 덩치가 무려 190㎝를 넘었지만, 이지적인 눈빛을 가진 이였다.
멕시코 혼혈이어도 하버드 대학을 나온 이답게 오히려 토종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골드만 삭스에 있을 때도 탁월한 실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곧은 성격이 문제였다.
특히 의사 결정에서 합리적인 고집을 한 덕분에 상급자를 들이박아 버려서 찍힌 인물이었다.
우영민 부장도 자기가 보스였다면 회피할 인물이지만 최민혁 실장의 성향을 뻔히 아는 터라 쿨하게 입사를 허락했다.
그는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최근 벨린 투자 규모가 커져서 인원을 대거 충원한 터라 이런 문제를 경험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인정할 정도로 조직 관리 능력이 탁월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에게 한번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긴장했던 조엘 맥클레인이 오히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주장을 한 것은 다시 사과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한자리에 우르르 몰려온 벨린 투자 임직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 벨린 투자는 늘 자유롭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바가 있다면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서 주장하셔도 됩니다. 그게 맞다면 내일이라도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
조엘 맥클레인을 비롯한 다른 펀드 투자자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우영민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벨린 투자호에 오르면서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아무래도 벨린 투자의 보스가 아시아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최종 보스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아는 터라 기대도 했다.
그 기대는 역시 틀리지 않았다.
* * *
최민혁 실장은 우영민 부장에게서 에플 주식 매각에 대해서 재검토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딱히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검토 안건은 에플 주식 매각 규모였다.
12조 물량을 단기에 매각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그 역시 안다.
다만 그는 투자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다.
‘하긴 한 세대 후에 12조도 천문학적인 자금인데, 지금 이 시대 기준에 12조라면 많기는 많지.’
생각해 보면, 한국이 IMF 시기를 거친 후에 IMF 측에 요청해서 받는 자금 규모가 20억 달러, 100억 달러 이런 수준이었다.
12조면, 아니, 나머지 여유 자금까지 합친 15조라면 무려 200억 달러가 훌쩍 넘어간다.
생각해 보면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이번 에플 주식 지분 매각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가 더 큰 문제였다.
2조 6천억과 15조는 격이 다른 액수였다.
‘으음, 미국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아.’
IMF 시기가 왔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정부는 사채업자 빚을 갚는 서민처럼 달러를 구하기 위해서 돌아다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들고 있는 2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한국 정부가 협박하면 들이박아 버리면 간단했다.
그런데 자기 손을 잡고 울부짖으면서 도와달라고 할 때.
과연 안 됩니다라고 거절할 수 있을까.
애국심을 호소할 때 말이다.
‘뭐, 그만한 이권을 챙기면 되니까. 애초에 내 목적이 우리 최문경 부회장을 매장시키는 것이니. 하지만 그래도 좀 부담스럽네.’
그는 고민하다가 이건 정말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에플 주식을 팔기는 팔아도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최민혁 실장의 호출을 받고 나타나서는 순순히 수긍했다.
“확실히 뉴욕 주가가 폭등하고는 있지만, 말이 많습니다. 당장 미 경기 회복 조짐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금리 인하에 기대할 뿐입니다.”
다만 금리 인하가 미국 주식 시장에 호재인 것은 사실이었다.
금리 인하로 갈 곳이 없어진 자금이 증시로 흘러들어 갈 테니까.
다만 지금 뉴욕 주식 시장은 기업 실적이 없이 이루어진 거품 장세였다.
외부 충격이 있다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민혁도 곰곰이 생각하고서야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지금 진행하는 모든 일을 일단 중지하고, 이번 일을 기획 팀에서 검토해 보세요. 크로스체크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기획 팀은 간혹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더군요. 이번에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이건 정말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 *
미국 주식의 갑작스러운 폭등은 금리 인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실제로 다른 원인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모건 스탠리는 오히려 이런 시점에서 에플을 비롯한 최민혁 실장 계열사를 거론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에플의 부활은 관련 IT 기업에 큰 영향을 준다. 이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이에 따른 혜택을 본 기업에 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이들 기업은 파급 효과가 크다. 따라서 실적 없는 활황이라는 말은 맞지가 않다. 우리 미국 경제가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모건 스탠리의 주장이었지만 의외로 미국 투자자들은 수긍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에 의외로 월가 투자자들도 꽤 있었다는 것이다.
“…….”
주식 전문가인 배종대 과장은 오히려 허탈한 표정으로 관련 자료를 살폈다.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정성근 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절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지금 월가 분위기가 그러니까.”
“월가가 미쳤다니까.”
미국 월가도 거품이 잔뜩 낀 뉴욕 주식 시장이 불안했다.
투자자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넘겨야 했다.
하필이면 그 대상이 에플이 된 것뿐이다.
박상기 차장이 두 사람의 지방방송을 보면서 툴툴거렸다.
“이봐, 배 과장, 에플 공매도 물량을 감안하면 확실히 변수가 되지 않을까?”
“당연히 문제가 되겠죠. 이런 시기에 에플 주식 12조 물량을 던진다라…….”
배종대 과장은 양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번민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획 팀원은 다들 자신이 조사한 보고서만을 살필 뿐이었다.
그들은 사실 주식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번 일을 지시받고 나서 자신이 직접 일을 하기도 했지만, 외부 용역으로 외주를 주기도 했다. 주식 전문가에게 말이다.
기간은 이틀, 용역비는 듬뿍 해서 말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내막을 정확하게 알릴 수가 없어서 돌려서 질문했을 뿐이다.
그 보고서 내용은 천차만별로 달랐다.
변수가 어떤 식으로 생길지 몰랐던 것이다.
이정원 과장은 안 그래도 요즘 유럽 쪽을 쏘다닌 터라 피로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우리가 왜 이런 검토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최민혁 실장님이 단독으로 검토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요?”
거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최민혁 실장.
그라면 어떤 결정을 해도 이제는 다들 따를 것 같았다.
조성돈 팀장이 회의 분위기가 산으로 갈 것 같자 태클을 걸었다.
“최민혁 실장님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잖아. 기술 분야라면 나름 전문가이지만 주식 투자 쪽은 달라.”
“과거 종잣돈으로 500억이 넘는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건 주식 전문가가 아니라면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거야…….”
조성돈 팀장도 바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맞는 지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배종대 과장이 이때 나섰다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님이 장기적인 안목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야말로 신의 투자자 수준이죠. 하지만 단기 투자로 변화가 많은 부분까지 알지는 못할 겁니다. 그걸 예측한다면 정말 주식 투자의 신이죠!”
“…지금도 주식 투자의 신 수준 아닌가요?”
정성근 대리가 배종대 과장 주장을 맞받아쳤다.
그런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투자 결과는 상리적으로 맞지가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에플 주식 매각 예상 대금 12조였다.
기획 팀도 겉으로야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들 허탈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이런 시기가 언젠가는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막상 현실로 접하자 탄식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신입 소리를 듣고 있는 네 명은 다들 입을 딱 벌린 서로 소곤거리기 바빴다.
[맙소사, 12조 물량을 팔아치운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최민혁 실장님 자산이 많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어?]
[도대체 지난번 2조 6천억 수익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돼.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야?!]
다만 그들도 따가운 조성돈 팀장의 시선을 받자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은 뒤늦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 실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도 엄연히 사람이잖아.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어. 이 지시를 내린 것이 그 증거이니까. 다만 워낙에 규모가 큰일이니, 좀 더 세밀하게 살펴야 할 거야.”
배종대 과장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벨린 투자가 전문가이지 않습니까. 그쪽에서 검토할 텐데, 왜 우리 쪽까지 이걸 확인해야 합니까?”
“크로스 체크이겠지. 다르게 보면 우리 기획 팀 능력을 믿는다고 봐야지.”
“흠.”
배종대 과장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은 정말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릴 때는 기획 팀의 자문을 구하기는 했다.
다만 그는 자신 앞에 12조 물량의 에플 주식 여파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은데…….’
* * *
배종대 과장의 예측처럼 최민혁 실장도 12조 물량 매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파를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과거 미국 주식 시장 사례를 참조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우존스도 지금과 같은 시기는 과거에 잘 없었다.
금리 인하를 이용해서 주식에 자금이 흐르도록 했으니까.
다만 최민혁 실장은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