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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은 뭘 해도 다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의 HY 전자 낸드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티븐의 기조연설이나 아이팟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안 것 같습니다.”
“수작 부리는 애들 말인가요?”
“네. 마이클 블룸버그까지 이용한 일이 무리수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애니 문제가 아닙니다. MP3가 지금 봐서는 오히려 덩치가 더 큽니다. 그래서 애니 가치를 더 추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긴 그런 문제도 있죠.”
“전 최 실장님이 왜 이번 일을 기획 팀을 통해서 철저하게 한 번 검토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일단 거기까지만 하죠.”
최민혁 실장은 간단히 단언해서 조성돈 팀장이 이상한 소리 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고민을 더 깊이 한 끝에 이번 일에 대한 보복을 미루기로 했다. 대신 소니 뮤직 사안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음반업체 몇 곳이 합작한 MP3 서비스 업체에 디지털 웨이와 소니 뮤직이 서로 손을 잡은 정보를 슬쩍 흘려 버리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HY 전자에 대한 직접적인 조치는 뒤로 미루죠. 그렇다고 MP3 음원 서비스가 갈라파고스군도가 되는 것은 곤란해요. 가볍게 한번 흔드는 것으로 해보죠.”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자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 * *
이 시점만 해도 아직 음반사끼리 내부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디지털 웨이와 소니 뮤직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정보가 퍼지자 음반사 역시 무조건 계속 대립할 수는 없었다.
아니,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음원 소송을 하던 이들도 다들 일단 소송을 중지하고 말았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서였다.
일단 할 수 있는 서비스를 당장 해야 했다.
이들은 혹시라도 소니 뮤직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온라인 시장을 먹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한 곡 다운로드 가격은 900원.
공짜로 MP3를 내려받는 네티즌은 비싸다고 비난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 MP3 서비스는 결국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박용혁은 HY 전자 전무라는 처지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가 원한 것은 애니 아파트 솔루션에 불과했다.
그런데 정작 이 일이 이제는 HY 전자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제는 김광현 사장 일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일이었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LC 전자 차원에서 최민혁 실장을 분석한 한병수 실장조차 허둥지둥하는 시점이었으니.
박용혁 전무로서는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 그는 한병수 실장에게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그걸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HY 전자 내부에 일을 시켜도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최민혁 실장과 직접 부딪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최민혁 실장을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최민혁 실장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죠. 모임에서 본 것 같은데, 이후로는 끝이었으니.”
시작은 지난 만남 건.
다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박용혁 전무는 꼰대 기질이 다분한 재벌 3세답지 않게 정중하게 나갔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단기에 조사하고 나서야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재벌 3세라도 MP3 관련 뉴스를 틀면 나오는 MP3의 아버지 최민혁 실장을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MP3 서비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요즘 소니 뮤직이 이 MP3 온라인 서비스업에 뛰어든다는 루머 때문에 난리였다.
그 소문의 출처가 디지털 웨이였다.
마냥 허황한 뉴스는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재벌 3세답지 않은 박용혁 전무를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가 아는 재벌 3세와는 모양새가 너무 달랐다.
그가 조사한 바로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최 실장님 앞이어서 그럴까? 하긴 최 실장 면전에서 수작 부릴 사람은 많지 않으니.’
하지만 박용혁 전무도 한 달 전이었다면 최민혁 실장을 온갖 행패를 부렸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최민혁 실장은 박용혁 전무가 이 자리에 나타나도록 손을 쓴 것이었다.
“그래요? 뭐 HY 그룹을 무시할 수는 없죠. 명색이 한국 10대 대기업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는 기업 아닙니까?”
묘하게 비꼬는 말투.
박용혁 전무는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성질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KM 전자를 조사해 보고 나서야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는 최민혁 실장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니, 그는 그제야 오성 전자와 최민혁 실장의 관계를 이해했다.
‘설마 이래서 이랬던 거야?’
오성 전자와 최민혁 실장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반대였다.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았으니까.
박용혁 전무도 그 사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 실장을 접하자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것이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부딪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말을 더해갈수록 고분고분해지는 박용혁 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드라마 속의 재벌 3세 모습이었다.
“저랑 HY 전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애니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한 번 이야기를 해보죠.”
“…네.”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나 버렸다.
최민혁 실장은 유능한 낚시꾼처럼 미끼만을 던져놓고 물러난 것이었다.
* * *
첫 만남 이후에.
박용혁 전무는 새삼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낸드 메모리 추가 오더 물량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에플이 진짜 장난 아니니까.’
그런데 막상 생각해 보니, 에플 지분 32%를 들고 있는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이었다.
박용혁 전무는 그제야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연결 고리를 생각하자 골치가 아팠다.
최민혁 실장이 홱 돌아서 에플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을 다 엎어버리고, 오성 전자에게 다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최민혁 실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 한 문제였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정신병자로도 악명이 자자했다.
그도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다.
결국 박용혁 전무는 다시 마음을 다진 후에 최민혁 실장을 찾아갔다.
최민혁 실장은 단단히 각오한 박용혁 전무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오성 전자처럼 애니 아파트 솔루션을 원하는 겁니까?”
“아, 그, 그러면 더 좋고요.”
“그건 곤란합니다.”
박용혁 전무는 자신이 원치 않은 가장 최악의 답을 듣자 크게 당황했다. 그가 굳이 한병수 실장을 만나서 사전 정지 작업을 한 이유였다.
“…최, 최 실장님, 애니 아파트는 한 기업이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그도 이해관계 때문에 HY 전자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얼마든지 있었다.
“귀사가 그걸 판단한 문제는 아니고요. 당장은 그 일도 이제 시작 단계라서 외부 기업과 추가로 손을 잡을 수는 없어요. 대신에 이렇게 하죠. 혹시 자동차 애니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박용혁 전무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제안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네? 그게 무슨… 설마 차량용 인공지능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당장은 SF 영화 속의 자율 주행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차량 내부 시스템을 동작시키는 것은 가능해요. 라디오, CD, 자동차 연동 시스템, 일테면 애니용 모바일 시스템과의 연동도 가능하죠.”
“그건…….”
“잘 생각해 보세요. 모바일 기기 성능 제약이 있어서 인공지능 레벨도 제한됩니다. 하지만 자동차용 애니는 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단일 제품이 아니라 플랫폼이니, 계속 업그레이드도 가능합니다. 더욱이 플랫폼 개발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지금부터 해도 4~5년은 족히 걸리니까. 다만 선점만 한다면, 돈을 갈퀴로 긁을 수 있습니다.”
박용혁 전무로서도 당연히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도 HY 그룹 상위 연구소에서 늘 진행하는 회의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걸 지금 당장 개발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서, 설마 그게 가능합니까?”
최민혁 실장은 당연히 이 시기의 사람이 미래 공상 과학 영화에나 가능한 기술이라고 생각한 것을 순순히 수긍했다.
“지금은 제약이 있어요. 하지만 2년 후라면 어떨까요? 3년 후에는 다를 겁니다. 4~5년 후에는 다른 차원의 문제죠.”
“하면 애니 아파트도…….”
“그렇죠. 분양은 4~5년 후의 일이니까. 그때를 보고 투자한 거죠. 오성 전자와 오성 물산은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겁니다. 차량용 애니는 애니 아파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미래 시장을 개척하는 겁니다.”
“…….”
박용혁 전무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다만 그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투자를 바라시는 겁니까?”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설마 그럼 공짜로 기술을 먹으려고 한 겁니까? 그 일에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아시죠?”
“그거야 기술을 준다는 전제라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할 리가…….”
“당연하죠. 로열티는 받아야 하니까. 다만 그건 귀사에 큰 도움이 될 일이니, 투자금은 받아야죠.”
“…혹시 그 투자금은 얼마 정도로?”
“1,000억, 아니, 2,000억이 좋을까요? 3,000억이면 더 낫고요. 아, 물론 자세한 계약서를 만들어야죠. 판단은 그쪽에서 하는 겁니다.”
“…….”
박용혁 전무는 그제야 썩은 감자를 먹은 사람처럼 침묵하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이제까지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런데 막상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동차용 애니라니.
정확히는 자동차 인공지능 플랫폼이었다.
이건 한번 만들어주면, 10년이고, 20년이고 써먹을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미래 자동차를 위한 최상의 투자인 셈이었다.
최민혁 실장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자동차용 솔루션과 관련해서는 특허 관계가 복잡할 겁니다. 아마 그런 문제는 귀사에서 먼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와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박용혁 전무는 마치 백만 톤의 바윗덩이 압력을 받은 사람처럼 굳은 얼굴을 한 채 사무실을 나서고 말았다. 그의 수행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설마 오성 전동차에도 저런 제안은 한 것일까?’
바로 이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HY 그룹의 박 회장이 이번 애니 아파트 때문에 열을 받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호락호락 이권을 넘길 것 같지가 않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그런 점을 느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뭐, HY 그룹이 하겠다고 하면 할 수도 있어요. 나쁜 일은 아니니까. 다만 고민이 많을 겁니다. 개발 기간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요.”
정확히는 자신이 손을 쓰기에 따라서 10년이고, 20년이고 답이 없었다.
최민혁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만한 자금을 내놓는다면…….’
더욱이 그가 원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HY 전자가, 아니, 더 나아가서는 HY 그룹이 굴복하는 모습을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HY 전자, 정확히는 HY 그룹이 나대지 않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