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10화 (910/1,021)

#

카일리 로엔 박사는 원래 격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최민혁 실장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병신이지.’

지금 봐서는 자신의 여동생 치료를 데릭 모건 이사가 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여동생의 희귀병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을 착취하려 할 것 같았다.

그는 배신감에 사로잡힌 채 충혈된 눈으로 데릭 모건 이사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KMBOOK에 입사해서 요직을 차지하라고 지시한 분은 데릭 모건 이사님입니다!!!”

“…하.”

데릭 모건 이사는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분노하는 카일리 로엔 박사를 지긋이 째려봤다.

그가 분노하지 못하는 이유는 있었다. 카일리 로엔 박사의 지적이 실제로 확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일리 로엔 박사는 정말 내막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카일리 로엔 박사는 실제로 데릭 모건 이사의 목적을 잘 몰랐기도 했다.

그는 물론 이 일이 최민혁 실장의 도움을 받아서 한 일이라는 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는 좀 달랐다. 그녀가 무인 항공기를 추락시킨 후에 오히려 미국 국방성으로부터 더 일거리를 많이 맡았다.

그중에는 사드도 있었고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크로스체크의 의미였다. 거기에 이지수 박사가 미사일 시스템에 대해서 경험을 쌓아야 사드 개발에도 손을 댈 수 있고 말이다.

사드 협업에 앞서서 슬그머니 손을 써둔 것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분명히 노라고 대답했지만, 아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는 때문에 이지수 박사를 슬그머니 떠올렸다.

‘아니면 이지수 박사가 카일리 로엔 박사를 이용해서 일을 벌인 걸까?’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이지수 박사가 밀리아머, 샐로먼 브러더스에 얼마나 많은 반감을 품었는지 잘 알았다.

다만 데릭 모건 이사는 카일리 로엔 박사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계약할 때만 해도 순둥이 같았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최민혁 실장의 의도대로 스티븐의 기조연설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당장 지금 이 일이 더 급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정보를 사전에 꼭 보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카일리 로엔 박사도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가이드해 준 로드맵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자신이 이러려고 KMBOOK에 입사했나 싶었다. 그런데 록히드마틴에 입사한다고 해서 다를 것 같지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는 서늘한 눈으로 카일리 로엔 박사에게 경고했다.

“분명히 경고하는 겁니다. 똑같은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카일리 로엔 박사도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록히드 마틴과의 협업을 떠올리면서 결국 반박했다.

“하지만 사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애니에 집중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애니 시스템이 결코 가벼운 기술이 아닙니다. 지금 이지수 박사는 인공지능 모듈 설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카일리 로엔 박사의 이야기에는 진심이 많이 담겨 있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불행히도 그 의미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카일리 로엔 박사나 이지수 박사는 전혀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외부인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 봐야 제가 알아듣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요청대로 하죠.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카일리 로엔 박사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였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

솔직히 메이런 프로젝트만 해도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무선 항공기 시제품 하나가 추락한 후에 프로젝트가 일시 중지되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카일리 로엔 박사를 협박하기보다는 부탁조로 얘기했다.

“휴우, 잘 좀 부탁합니다.”

“…네.”

카일리 로엔 박사는 겉으로야 데릭 모건 이사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랬다. 다만 내심 희희낙락했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에게 한 방 먹인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설마 최 실장님이 원하는 게 이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까지 을로 살아오다가 갑이 된 것에 환호했다.

* * *

최민혁 실장은 카일리 로엔 박사를 통해서 데릭 모건 이사가 뭘 원하는지 들었다. 심지어 그가 무슨 일을 진행하는지까지 말이다.

그는 피식 웃기는 했지만, 곧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밀리아머와 록히드마틴의 사이가 이렇게 좋았던 것일까?’

두 회사의 만남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샐로먼 브러더스까지 합치면 마치 서로 가족과도 같았다.

그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았다.

‘기술이 너무 잘 소통이 돼. 이게 말이 되나?’

밀리아머와 록히드마틴 사이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런데 데릭 모건 이사의 행동을 보면, 두 회사는 마치 친족 회사처럼 대응했다.

데릭 모건 이사는 사령탑 역할을 하고 말이다.

‘그 말은 두 회사가 내부적으로 기술을 공유해야 가능하다는 소리잖아. 설마 무인 항공기와 사드 기술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건가?’

겉으로 봐서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무인 항공기에 불필요한 옵션을 다 빼고, 실상 보면 요격 미사일과 다를 것도 없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지수 박사를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 더 있어.’

* * *

이지수 박사가 일하는 연구실은 무려 백여 평이나 됐다.

그 안에는 수십 대의 컴퓨터와 다양한 설비가 놓여 있었다.

벽면 한쪽에는 복잡한 차트, 수식, 무인 항공기 비행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그 화면을 제어하는 노트북 앞에는 이지수 박사가 업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다른 연구원 수십 명 역시 다들 정신없이 일한다고 바빴다.

그들은 각자 맡은 무인 항공기 파트를 분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름 아닌 무인 항공기 추락 원인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최민혁 역시 이미 보고를 받은 사실이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무인 항공기 기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다른 연구원에게 손짓해서 끼어들지 못하게 한 후에 이지수 박사의 뒤편에 가서 입을 열었다.

“무인 항공기 궤적이 마치 자폭 드론 같네요.”

이지수 박사는 ‘자폭 드론’이라는 말에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헬렌 역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다만 목소리가 낮았다.

주변의 다른 연구원은 듣지 못했다.

이지수 박사는 크게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죠?”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마 무인 항공기 추락 때문에 그러세요?”

“그거야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죠. 이지수 박사님이 다 책임진 일이니까.”

“아, 네.”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헬렌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에 최민혁 실장을 소회의실로 안내했다.

최민혁은 이지수 박사 뒤를 따르면서도 무인 항공기 추락 궤적을 다시 살폈다.

‘이상하네. 저게 무슨 항공기 궤적이야. 차라리 요격 미사일 궤적이라는 것이 정확하겠어. 설마 진짜 자폭 드론을 테스트한 건가?’

이지수 박사가 자신에게 압력을 넣는 미국 국방성 관료를 상대로 엿 먹으라고 무인 항공기를 추락시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테스트를 했을 수도 있었다.

* * *

최민혁 실장은 문득 이지수 박사와 관련된 전생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지수 박사를 처음 만난 이후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확실히 차이가 있어.’

처음에는 이지수 박사가 그냥 자기 선친 유언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바뀌었다.

아니, 몇 년이 지난 후에는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때쯤에 사드 개발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아. 설마 아니겠지?’

최민혁 실장도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혹시 사드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까?”

“네? 그게…….”

“솔직히 너무 이상해서 그럽니다. 사드 분석과 관련해서 상원에 넘긴 보고서 말입니다. 제가 골격을 잡기는 했지만 중요한 데이터를 첨부한 것은 이지수 박사님이니까요.”

“그거야 최 실장님이 카일리 로엔 박사를 도와주라고 해서…….”

카일리 로엔 박사의 사드 테스트 분석 보고서는 당연히 그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걸 가공한 사람이 카일리 로엔 박사다.

다만 이 보고서에 들어간 사드 관련 기술 데이터는 카일리 로엔 박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이지수 박사가 손을 쓴 것이었다. 그녀는 사드와 관련해서 현실적인 다양한 리포트도 추가했다.

미국 상원이 이 보고서를 신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최민혁 실장이 이 내막을 모르지 않았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지수 박사님은 사드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음.”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녀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으음, 지난 일이기는 한데, 사실 사드 개발 관련해서 자문을 해 준 적이 있어요.”

자문이라니.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록히드마틴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지수 박사님에게 조언을 받을 리가 있습니까?”

이지수 박사의 능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사드 관련 정보는 군사 보안 정보였다. 더욱이 록히드마틴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지수 박사와 협업할 리가 없었다.

이지수 박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맞아요.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미국 국방성이 중심이 된 프로젝트라면 상황이 달라요. 미국 국방성은 미래 전장을 대비하기 위한 통합 솔루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사드나 무인 항공기는 그 축 중의 하나였어요.”

기술이 달라도 인터페이스 자체가 똑같다는 의미였다.

서로 정보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하고 말이다.

더욱이 이지수 박사는 전자 통합 솔루션의 뼈대를 만들었다.

그녀가 사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이유였다.

최민혁으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다.

“…통합 전자전이라면 설마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한 첨단 무기 정보를 연동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겁니까?”

이지수 박사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이 이런 정보까지 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히려 제가 더 이상하네요. 최민혁 실장님이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아는 거죠? 미래 통합 시스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미국 국방성 내에서도 손으로 꼽을 텐데…….”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당황했다. 미군의 미래 전자전 시스템 관련된 내용은 전생을 통해서 아는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이리저리 방산업체 뛰어다니면서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우연히라도…….”

최민혁 실장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이지수 박사님이 그 전자 통합전 프로젝트에도 관여한 겁니까?”

이지수 박사는 크게 당황하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이 이질적이었지만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님도 익히 본 거예요. 바로 메이런 프로젝트죠. 그 안에 담겨 있는 각 부분 시스템이 바로 그거예요.”

“…MP3, MPEG-2 표준 같은 솔루션인 겁니까?”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방긋 웃었다.

“역시 말하기 참 쉽네요.”

“그걸 다시 개발하게 되면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리겠군요.”

“아마 최소로 잡아도 10년은 걸릴 거예요. 현실적으로 15년 이상 걸리겠죠.”

미국 전자전을 위한 표준이었으니.

아마 그 이상이 걸려도 답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이지수 박사라는 놀라운 존재가 있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지수 박사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상업적으로 이익을 본 사람이 최민혁 실장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