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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 실장 역시 여유를 가진 덕분에 오성 그룹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구조조정이라니.’
KM 그룹을 모티브로 한 구조조정은 작년에 한 구조조정과는 그 규모와 스케일이 많이 달랐다.
수익이 나지 않은 사업부는 다 정리하고, 도려내 버렸다.
지역화라는 정부 정책을 이용해서 최대한 구조조정을 드러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다만 오성 그룹의 두 번째 구조조정은 한계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애니 솔루션을 명분 삼아서 전문화를 추구한 부분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민혁은 이 일을 오성 그룹만이 아니라 LH 그룹에서도 동시에 진행한 것을 보고받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HY 그룹도 일부 따라 했다니.’
미래가 바뀐 것이었다.
물론 IMF를 대비해서 진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KM 그룹의 구조조정을 벤치 마크해서 조직 자체를 개편해서 효율을 끌어올렸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런 과정에서 기업 부채가 대폭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런 상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모델 하우스 안에는 이미 자신을 기다리는 권태성 실장이 있었다. 이환채 차관은 물론 덤이었다. 그래도 양복 중대 병력이 동시에 최민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얼마 전에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하하, 그때는 별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최민혁 실장을 반겼다.
그건 오성 전자 사장에게도 하지 않은 놀라운 변모였다.
임권수 부장이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최민혁 역시 권태성 실장이 아부와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딱히 권 실장님과 이야기하기는 좀 그래요.”
“이거 실망입니다.”
“실망 많이 하시고요.”
그는 이환채 차관과도 인사했다. 그런데 이환채 차관의 태도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을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보여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니, 이 차관님이 이렇게 절 환대해서 적응이 잘 안 됩니다.”
“저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제가 최근 집안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난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래요.”
최민혁 실장은 이환채 차관의 태도 변화에 오히려 움찔했다.
그는 바뀐 두 사람의 모습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
김우석 심의관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면서 이환채 차관을 째려봤다. 그가 이제까지 재정 경제원에 있으면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김웅배 장관에게도 저러지는 않던데…….’
“…….”
조동석 과장은 패닉에 빠졌다. 이환채 차관은 나름의 능력이 있다. 남에게 저런 식으로 아부하고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환채 차관은 효율을 중시해 조직 내에서도 잘 처신한다.
아부만 일삼는 전형적인 고위 공무원과는 많이 달랐다.
실제로 그런 태도 덕분에 재정 경제원에도 이환채 차관을 따르는 사람은 많았다.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기획실 직원 역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 역시 재정 경제원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이환채 차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덕분에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부 고위 공무원과 대기업 기획실장에게 받는 아부가 편치 않았다.
꼭 뱀을 자신 목에 걸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대로 인공지능 모델 하우스에 매우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놀랍네요.”
이환채 차관 역시 최민혁 실장의 뒤를 따르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파트 혁명입니다. 사실 이런 물건만 있다면 미분양 따위는 정부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쉽습니다. 전국 아파트에 다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아마 어려울 겁니다.”
최민혁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네? 다른 업체와… 아, 전자 회사가 문제군요. 그건 우리 재정 경제원에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는 일단 거절부터 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랬다간 너무 큰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력 충원부터 시작해서 할 일이 너무 많아져. 안 그래도 IMF가 멀지 않았는데, 굳이 순리를 어길 필요야 없겠지.’
인공지능 아파트.
단순히 이 아이템만으로 뭔가가 크게 바뀔 거라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가 이어진다면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었다.
달러가 국내로 반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IMF와 관련된 미래는 다 헝클어진다.
이는 최민혁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를 박살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권태성 실장은 그래도 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환채 차관의 모습은 그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정 경제원 내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 * *
최민혁은 모델 하우스 관람을 끝낸 후에 재정 경제원 쪽을 다시 들여다봤다. 역시 처음에는 이환채 차관이 주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부 여러 기관이 합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산으로 가버렸다.
그는 한편으로는 내심 좋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좀 씁쓸했다.
다만 그도 이환채 차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았다.
국가 부도설 대응책은 진짜였다.
최민혁으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의아스러워서 보고서를 살피다가 결국 답을 알았다.
‘나이기에 그랬다고?’
아마 오성 그룹 안건민 회장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자신이기에 재정 경제원도 반응이 심각했다.
오성 그룹의 권태성 실장 역시 비슷했다. 그가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아부까지 한 이유였다.
그로서는 불편한 일이었다.
당분간은 잠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때마침 데니스 샐로먼 이사에게서 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참 집요하네.’
이미 거절한 연락이었다.
[제가 좀 바빠서 당분간은 어렵겠습니다.]
다시 거절했다.
샐로먼 브러더스 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괜히 만나서 스티븐의 기조연설 관련된 정보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때문에 이제는 스티븐의 기조연설 날짜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다시 추가로 보고받은 보고서 항목 하나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획실의 배종대 과장이 록히드마틴 관련된 부분을 따로 조사한 것이었다.
“록히드마틴 쪽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나오는 겁니까? 메이런 프로젝트를 언급한 것은 또 뭐죠? 이해할 수가 없네요.”
조성돈 팀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일단 여러 가지 보고를 받으면, 취합하기는 해야 했다. 록히드마틴은 KM 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KMBOOK이 관련이 있지만, 최민혁 실장이 선을 그어버렸다.
“록히드마틴이 최근 로렐과 합병했지 않습니까.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는데,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 대상 중의 하나가 KMBOOK입니다.”
“그건 더 이상하죠. KMBOOK이 비록 방산업체 라이센스를 얻었다고 해도 메이런 프로젝트에만 한정됩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예요. 록히드마틴이라고 해도 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어요.”
“그건…….”
최민혁 실장은 조성돈 팀장이 록히드마틴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배종대 과장을 바로 호출했다.
이번 보고안을 쓴 배종대 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조창호 차장님이 KMBOOK 연구를 도와주면서 록히드마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들은 정보를 토대로 해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밀리아머는 그럴 수가 있다고 해도 록히드마틴은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
그는 최근 계속 자신에게 연락을 취해 온 샐로먼 브러더스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곧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방산업과 관련해서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밀리아머와 테일러 박사에 한정해야 했다.
테일러 박사는 지금 이지수 박사 성추행과 관련된 천문학적인 소송에 걸려서 똥오줌을 못 가리는 상황이었다.
이지수 박사가 과거 테일러 박사에게 당해 온 성추행 관련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소송 덩치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국 국방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메이런 프로젝트 관련된 연구원 수십 명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밀리아머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 패닉에 빠져 버렸다.
최민혁은 이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지금 이지수 박사가 진행하는 일도 자칫하면 이 일에 함께 엮여 버릴 소지가 다분했다.
그는 결국 조성돈 팀장에게 한 가지를 더 지시했다.
“혹시 모르니, 메이런 프로젝트 관련된 특허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세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특히 록히드마틴하고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빼먹지 마세요. 그리고 이건 잘하셨네요. 변화가 생기면 즉시 보고를 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샐로먼 브러더스에게서는 시선을 떼지 마세요. 왠지 그쪽 냄새가 많이 나니까. 제가 협상을 거부해서 다른 대안을 찾았을지도 모르죠.”
“…명심하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다소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달랐다. 그는 한 건 했다는 마음에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만나는 것까지는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예 만나지조차 않으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데릭 모건 이사는 놀라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이다. 재정 경제원이 오죽하면 최민혁 실장이 벌일 일에 대해서 겁까지 먹겠는가.
다만 그도 그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한국 내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최민혁 실장의 동선을 알아봤다.
그중에는 애니 모델 하우스도 있었다.
이걸 보더니 비중이 큰 역할을 하던 제임스 러너 이사가 감탄하고 말았다.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최민혁 실장만이 아니라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회장님이 관심을 두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맙소사 설마 회장님도 한국 시장에 관심을 둔 겁니까?”
“네.”
샐로먼 브러더스 그룹은 그저 단순히 한국에 투자한 것이 아니었다.
장기적인 포석으로 투자했다.
그리고 한국 투자 파트너로 삼은 이가 다름 아닌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KM 그룹이 천문학적인 차입금 융통이 이 가능한 이유였다.
“하지만 비자금 사건이 터진 후에 한국 주식 시장은 여전히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한국 재벌과 정부 간의 유착 문제는 늘 나오는 화두였습니다. 오히려 이번 비자금 사건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정화될 겁니다.”
“과연 그 사건을 교훈으로 여길까요?”
“그보다는 대기업 지배 구조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따로 대안이 있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그 부분까지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한 공시와 같은 시스템이 좀 문제가 있지만, 한국 투자 가치는 나쁘지 않습니다. 당장 최민혁 실장이 좋은 예입니다. KM 센서, 미래 기술과 같은 계열사가 그 증거고요.”
“확실히…….”
데릭 모건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격한 반응에 반감을 품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그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다만 이렇게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미국에 좀 갔다 와야겠습니다.”
“네? 그러면 한국은…….”
“아뇨. 최민혁 실장이 굳이 만나지 않겠다면, 스스로 나오게끔 하면 됩니다.”
“최민혁 실장의 미국 내의 일이라면…….”
“메이런 프로젝트죠.”
“아.”
두 사람은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메이런 프로젝트에 대한 것은 최민혁 실장을 조사하면서 최근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른 것을 떠나서 이 프로젝트에 투자자가 꽤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