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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가능하면 재정 경제원 쪽의 연락을 피했다.
그는 실제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KM 블룸버그 일만이 아니었다.
그는 재정 경제원을 잊기 위해서라도 이지수 박사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의 대답이 의외였다.
[실장님, 좀 기다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제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이번 기조연설 가치가 이전과는 달라졌나 보네요?]
최민혁도 굳이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처음과는 달리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에플 상황도 있습니다. 이번 기조연설은 에플 가치를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알겠어요. 다만 이곳 일도 만만치는 않아요. 당장 록히드마틴 쪽에서도 계속 연락이 오니까.]
[밀리아머가 아니라 록히드마틴이 말입니까?]
[사실 그걸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밀리아머 쪽에서 록히드마틴 쪽에 정보를 흘렸는지 모르죠. 록히드마틴과 로렐이 이번에 합병하면서 300억 달러, 20만 명의 직원을 갖춘 회사로 거듭났어요. 메이런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미래 로드맵과는 일치해서인지 계속 매달리니까.]
[…그건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뇨.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이번에 시제기 한 대가 추락해서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으니까요.]
[추, 추락요?]
[네. 사고였어요. 하지만 인공지능의 안정성 문제에 대해서 말들이 많아요. 록히드마틴 쪽도 요즘은 조용하고요.]
[…정말 사고가 난 겁니까?]
[사고 날 수 있죠? 설마 메이런 프로젝트 도중에 시행착오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최 실장님, 절 믿고 기다려 보세요. 일정은 최대한 맞출 테니까. 더욱이 제임스 감독님과도 이미 어느 정도 확인이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성급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재정 경제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뭐, 나도 좀 여유를 가져야 해. 자꾸 조급해지는 건 주의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그로서도 쉽지가 않았다. 이제 정상이 멀지 않았다. 자신의 복수가 눈앞이었다. 여기서 실수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제기 추락이라니. 그것도 한두 푼 들어가지는 않을 텐데…….’
그는 새삼 이지수 박사의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번에야 확인했다. 따지고 보면 테일러 박사와 밀리아머에 저항했던 이지수 박사의 성격이 외모처럼 좋을 리만은 없었다.
* * *
“누구야?”
“최 실장님.”
이지수 박사는 헬렌의 대답에 응해주면서도 힐끗 주변을 쳐다보았다.
이번 메이런 프로젝트 때문에 KMBOOK에 합류한 엔지니어 표정이 묘했다.
그들 역시 불과 지난주에 추락한 시제기 때문에 말이 많았다.
다만 시제기 폭발 이후에는 이지수 박사를 압박하던 국방성 관료도 침묵했다.
심지어 스토커처럼 이곳을 찾던 록히드마틴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헬렌은 입술에 불펜을 문 채 노트북으로 정신없이 작업했다. 그녀는 시리얼 케이블을 통해서 올라오는 정보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 일이 최 실장님에게 중요하기는 한가 보다. 계속 연락하는 것을 봐서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중요해.”
이지수 박사 역시 노트북을 통해서 앞에 놓인 장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은 무시했다.
다들 아직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 물건을 본 이들은 다들 놀랄 뿐이었다.
헬렌은 그 모습에 눈총을 줘서 다 내쫓았다.
“최 실장님은 이거 봤어?”
“아직. 마이클 감독님을 비롯한 이번 기조 연설 핵심 담당자만 확인했어.”
“아, 그런가. 깜짝 놀랐겠다.”
“어, 도연 씨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어.”
“하긴 그렇겠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일정이 생각보다는 촉박했다.
그렇다고 서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헬렌은 연구실 한쪽 구석에 잠들어 있는 조창호 차장을 쳐다보았다.
조창호 차장 덕분에 이 프로젝트를 그나마 진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초췌한 조창호 차장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힐끗 이지수 박사를 쳐다보면서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록히드마틴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걔들이라면 밀리아머에 밀리지 않잖아.”
“그건 모르는 이야기야. 밀리아머하고 록히드마틴이 관계가 있을 수 있어.”
“설마 매출 300억 달러 기업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겠어?”
“…그건 최민혁 실장님에게 이야기해 볼 생각이야. 어차피 그 일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할 수 있어.”
“그런가? 그래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지. 록히드마틴 쪽의 미사일 요격 시스템은 알아주잖아. 아무래도 그쪽에 인공지능을 넣으려고 할 테니까.”
“…….”
이지수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테일러 박사 일가가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안다.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록히드마틴이 끼어든 것은 그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록히드마틴의 영향력을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괜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모르니 이 사실은 최 실장에게 알려야겠어.’
* * *
최민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지수 박사에게 연락했다가 구박만 받았다. 다만 다음 날에 다시 록히드마틴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게 또 무슨 일이람?’
그는 전생의 기억을 샅샅이 확인해봤다. 그런데 록히드마틴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밀리아머까지가 다였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미국 관련 정보나 보고서를 살폈다.
그런데 특이 사안은 록히드마틴이 다가 아니었다.
단적인 예가 TDMA 진영에서 계속 CDMA를 노려서 선동을 벌이고 있었다.
CDMA 성능이 퀄컴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민혁은 CDMA 쪽만 잡고 볼 수가 없어서 그냥 간과했다.
그런데 이 일은 뜻밖에도 기획실의 정성근 대리가 대안을 찾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했던 특허 중의 하나를 이용해서 답을 내놓았다.
그 덕에 CDMA가 아날로그 방식과 비교하면 극히 성능이 떨어진다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그래도 정성근 대리가 그런 점을 잘 이용해서 해결한 것도 능력이니까.’
기획실 내에서는 정성근 대리는 참으로 든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성근 대리만 칭찬할 수는 없었다.
박상기 차장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직을 잘 이끌어 갔다.
그는 조성돈 팀장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에 팀장 대리 직무를 잘 수행했다.
‘역시 KM 전자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구나.’
재정 경제원의 요청에 간혹 귀가 솔깃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이 도와준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문제는 손을 대는 순간에 늪처럼 쉽게 떨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라도 배신을 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니까.’
그는 이 일을 보면서 재정 경제원보다 사내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뒤로 미룬 조직 개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중에는 기획실 확장과 관련된 부분을 빼놓기 어려웠다.
자신의 입장 역시 포함했다.
‘이제 실장으로 버틸 수만은 없겠어.’
미국에 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자신의 업무 영향력은 폭증했다.
기획실장 놀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 부사장 수준이 되어야 했다.
그로서는 고민되는 일이었다.
부사장 직급 정도 되면 실무에 직접으로 관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젊었다.
좀 더 실무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조정욱 인사팀장에게 결국 기존에 올린 조직 개편 관련 보고서를 추가해서 올리라고 지시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런 중에 온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온 연락을 씹어버렸다.
‘만나서 뭘 어쩌자는 건지?’
* * *
배종대 과장은 KM 전자를 둘러싸고 도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주식 취미 때문에 이런 사소한 정보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기획실 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오히려 다른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마침 사내 복도를 걸어가는 조정욱 인사팀장을 찾았다.
“조 팀장님!”
옆에 같이 자리한 정성근 대리가 그를 다급하게 막았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이를 무시했다.
“조 팀장님, 잠깐만요.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바빠서…….”
배종대 과장은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서 그의 앞을 막았다.
“요즘 우리 회사가 시끄러운 것은 저도 압니다. 인사 팀에서 이 일에 엮여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도 압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하, 말해보세요.”
조정욱 인사 팀장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최근 회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 경제원의 반응이었다.
그는 인사 전문가답게 아는 지인에게 연락해서 미리 대비하기도 했다.
인사 팀장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도 대비를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대규모 승진 인사 발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직 개편도 있고요. 그거 사실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조정욱 인사 팀장은 슬쩍 배종대 과장을 피해서 걸어갔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집요했다.
“제가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조직 개편할 때 우리 기획실은 어떻게 됩니까? 기획실이 확장된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것만 확인할게요.”
“전 모릅니다.”
조정욱 인사 팀장은 휑하니 돌아섰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집요했다. 정성근 대리도 뒤늦게 내막을 알자 슬쩍 물러났다.
그 역시 기획 팀 조정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미 카더라 이야기는 연초부터 꾸준하게 나왔다. 다만 제대로 진행된 일은 없었다.
조정욱 인사 팀장은 억지로 배종대 과장을 피해 가려고 했지만 거머리 같은 그의 노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배 과장님!!”
“제가 원하는 것은 승진자 명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기획 팀이 확장되는지만 묻는 겁니다. 그게 어려운 질문은 아니잖습니까.”
조정욱 인사 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신이 진행하는 일은 최민혁 실장의 지시에 따라서 비밀리에 하는 일이었다.
아직 결정이 난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해 줄 수 있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Yes!”
배종대 과장은 환호했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
“하면 팀장 숫자가 늘어난다는 말이군요. 두 자리는 아닐 것 같고, 세 자리? 맞죠? 그러면 기획실 내에 1팀, 2팀, 3팀이 생겨나는 겁니까?”
KM 전자 관리만으로는 3팀이나 필요가 없다. 하지만 KM 전자 계열사를 다 관리하려면 3팀만으로 오히려 부족했다.
다만 이 구조가 묘했다.
KM 전자가 에플을 관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에플은 1년 안에 KM 전자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기업이었다.
결국 모순이었다.
“…전 가보겠습니다.”
조정욱 인사 팀장은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배종대 과장은 쾌재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승진을 확신했다. 다만 팀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님은 실장이 될 거고, 박상기 차장님이 1팀장, 그러면 두 자리가 남잖아?!”
“…….”
정성근 대리는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그 역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실 기획실이 이제까지 해온 실적을 고려하면 한 직급 승진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팀이 3개로 늘어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기획실이 다루는 업무 영역을 감안하면 이것도 적은 것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 목을 비튼 채 구박을 주었다.
“야, 우리 정 대리, 눈빛이 심상치 않아. 설마 네가 팀장이 될 거로 생각해?”
“아닙니다.”
“에이, 이봐라, 속이 보인다.”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 눈을 째려봤다.
“이번에 미국에서 나온 그 이상한 리포트 해결했다고 그러는 거지?”
최근 미국 내에 CDMA 관련 보고서 하나가 올라왔다.
TDMA에 비해서 CDMA는 한 기지국에서 여러 신호를 받으면 통화 용량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문제였다.
이 미국 업체는 신이 나서 TDMA를 옹호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 언론사다. 이들 역시 이 업체의 보고서를 받아서 마구잡이로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