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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자신이 흥분해서 목소리가 올라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 흠칫했다.
다행히 아무도 최용욱 회장에게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최민혁은 실실 웃으면서 툴툴거렸다.
“할아버지가 너무 나가…….”
하지만 그의 말을 방해한 사람이 있었다. 재정 경제원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가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최민혁 실장에게 말했다.
“장관님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요?”
“네. 최 실장님.”
“제가 장관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조용한 곳에 가서 절 고문하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잠깐 이야기만 할 뿐이니까요.”
“당황스럽네요. 이번 간담회는 경제 5단체장이 주인공 아닙니까. 저같이 허접한 중견 기업 기획실장이 나설 일은 아닙니다.”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아닌데요?”
이죽거리는 최민혁 실장.
아예 작정한 행동이었다.
공무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최용욱 회장이 보다 못해서 등짝 스매시를 날렸다.
“야, 이놈아, 괜한 사람 그만 괴롭혀!”
“…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호출된 자신을 바라보는 최용욱 회장의 시선이 불편했다. 설마하니 경제 간담회 행사에서 따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 좀 갔다 오겠습니다.”
“인석아, 적당히 좀 해!”
“누가 보면 제가 일진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너 자꾸 그럴래?!!”
“하하하, 아닙니다.”
“민혁아, 네 녀석 힘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마. 자칫하다가 너도 힘에 먹힐 테니까.”
“…네.”
최민혁은 꽤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재정 경제원 직원 뒤를 따라서 조용히 사라졌다.
최용욱 회장의 주변에 있던 전경련 인사 몇 사람은 흥미로운 눈길로 최민혁 실장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재정 경제원 내부는 딱히 특별한 점이 없었다.
정부 부처 건물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민혁은 공무원 뒤를 따라서 걷기만 했다. 그러다 곧 회의실에서 멈추었다. 문은 곧 열렸다. 안에는 이미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성환수 보좌관을 비롯한 이환채 차관이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옆에는 조동석 과장,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도 자리했다.
가장 중앙은 역시 부총리겸 재정 경제원 장관인 김웅배 장관이었다. 오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흰머리가 가득했다.
김웅배 장관은 겉으로 봐서는 흔한 노인 같았다. 하지만 눈빛이나 서 있는 모양새는 어지간한 젊은이 못지않은 기백이 가득했다.
“명성이 자자한 최민혁 실장님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순순히 김웅배 장관이 내민 손을 잡았다.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곧 자리를 같이했다.
다행히 김우석 심의관이 자리해서 분위기를 좀 풀어주었다.
최민혁 역시 김우석 심의관이 중간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가 내온 차를 마시면서 간단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환채 차관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전 만남에서 보인 반감은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은 예상과 다른 재정 경제원의 분위기에 얼떨떨했다. 자신을 압박하는 그 재정 경제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은 최근 방송에 나가서 재정 경제원을 씹었다.
사실 어지간한 기업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매장당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재정 경제원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협상하자는 건가?’
이환채 차관이 슬쩍 나섰다.
“오늘 간담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정부는 이제 경제적 여건을 안정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정권 초기에 있었던 일은 오해일 따름입니다.”
“…설마 그 말을 하려고 절 부른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확히는 롤 모델 때문입니다. 오늘 간담회에서 할 이야기가 고금리, 고임금, 고부동산을 타파할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과 제가…….”
“한국 기업 중에서 이 세 가지를 타파한 유일한 기업이 KM 전자입니다. 특히 최근 설립한 KM 센서는 가장 이상적인 기업 형태를 보였습니다. 설립과 동시에 벌써 실제적인 1,000억 매출을 달성했고, 추가 계약이 넘쳐나는 것으로 압니다.”
“아.”
“네, 맞습니다. KM 센서는 단순히 매출만 놓고 본다면 큰 기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KM 센서 설립과 동시에 보여준 모습이 다른 대기업에 좋은 모델이 됩니다.”
“하면 간담회에서 KM 센서, KM 전자, 제 이야기가 많이 나오겠군요.”
“네. 이왕이면 최 실장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위기를 이끌어주었으면 합니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야 금융 규제 완화와 같은 일에 저희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KM 센서의 성장은 확실히 규제 완화와 관련해서 좋은 예를 보여준다. 단적인 예가 고임금과 같은 부분이었다.
KM DVR 하나 팔아서 버는 순이익률이 무려 90%가 넘었다. 고작 3~4% 남짓한 다른 대기업 와는 아예 격이 달랐다.
다만 최민혁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의아했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재정 경제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KM 센서와 KM 전자를 돕겠습니다. 공장 설립, 인허가, 세금 혜택과 같은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너무 파격적인 말에 최민혁은 눈만 끔뻑거렸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는 힐끗 김웅배 장관을 쳐다보았다.
김웅배 장관은 허허 웃기만 했다.
“하하하, 최 실장님, 우리 서로 좋은 인연으로 만났지 않습니까. 한번 멋지게 잘해봅시다.”
최민혁은 성질 같아서는 ‘No'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무사히 이용하는 것이다.
확실히 재정 경제원과 싸워서 끝장을 볼 필요는 없었다.
‘뭐, 어차피 나중에 손을 쓰면 되니까.’
“좋습니다. 다만 제가 나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재정 경제원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주세요. 저기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님이 잘 아실 테니까.”
“네? 그건…….”
최민혁 실장은 단호했다.
“이런 말을 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저는 재벌 3세로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굳이 나대서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재정 경제원이 절 건드리지 않는다면, 제가 그쪽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네, 네!”
김웅배 장관은 최민혁 실장 기백에 압도당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건 이환채 차관이나 다른 사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한마디만 하고 일어서서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게 진짜 최민혁 실장이었어.’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저 흔한 기업가로만 보였는데, 지금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내면의 일면을 보인 최민혁 실장은 차갑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 * *
재정 경제원 간담회는 생각보다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오찬회 형식으로 부드럽게 풀려갔다.
최민혁 실장의 조언처럼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이 나와서 KM 전자, KM 센서의 벤치마크 결과를 쭉 보여주었다.
[우리 기업의 고질적인 문제 중의 하나인 고임금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KM 센서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설립한 지 불과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 임직원이 받는 급료는 10대 대기업보다 무려 30%가 높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수익률은 다른 대기업을 압도합니다.]
실제로 대표적인 사례로 보여준 것이 이번 연방 정부 KM DVR 납품 건이었다. 풀옵션 형태로 판매 단가가 무려 1,000만 원이 넘었다.
생산 단가인 30만 원에 인건비, 유통비, 여러 가지 비용을 다 합쳐도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즉, 무려 900만 원이 남는다는 이야기였다.
금융 회사도 아닌 제조업이 보여줄 수 없는 수치였다.
[……!]
간담회에 참석한 10대 대기업 관련자는 다들 입을 딱 벌렸다.
그들 역시 KM 전자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잘 안다. 이 회사는 주로 로열티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 로열티 수익 상승률 자체가 제한이 많았다.
하지만 KM 센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 회사는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가 높은 회사였다.
덕분에 중소기업청 설립과 관련된 정책 이야기도 술술 잘 넘어갔다.
다른 이야기는 그저 양념에 불과했다.
KM 센서 이야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물론 간담회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귀는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을 향했지만, 눈은 최민혁 실장을 향했다.
최민혁 실장은 대단히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가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대한민국 재계가 다 모인 자리에서 주목받은 것은 편치가 않았다.
정확히는 더는 나대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간담회가 끝나 갈 무렵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용욱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갈 생각이냐?”
“네.”
“다른 사람도 만나봐.”
“괜찮습니다.”
“불편한 것은 안다. 하지만 저 사람들도 과거 난다 긴다 하던 사람들이야. 같이 있으면 배울 것이 많을 거다.”
최민혁도 최근 KM 전자 기업 분위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잘 알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겠습니다.”
“정말 가야겠니?”
“할아버지가 제 대리인을 해주세요.”
이 말이 다였다.
최용욱 회장은 슬그머니 일어나서 화장실 가는 것처럼 내빼는 손자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간담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몰려드는 대기업 회장들 때문에 당황했다.
안건민 회장을 위시해서 한국 10대 대기업 회장들이 와르르 몰려왔다.
“…최 실장은 어디 있습니까?”
“갔습니다. 바쁜 일이 있다고…….”
“최 회장님, 섭섭합니다. 분위기를 아시면서도 손자를 잡지 않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최용욱 회장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리 고집이 있다고 해도 한국 10대 대기업 회장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손자 최민혁이 왜 도망쳤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긴 이놈의 성격이라면 누구라도 들이받을 녀석이지. 이 양반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거야. 그게 좋은 모습일 수는 없으니.’
* * *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재정 경제원 간담회는 꽤 좋은 이미지를 줬다.
비록 그 롤 모델에 KM 센서가 꼽힌 덕분에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말이다.
다만 고임금 혁파를 위해서 KM 센서를 선택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KM 센서 임직원 급료가 대기업보다 월등히 많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KM 센서 수익률이 장난 아니었다.
대당 단품 원가 가격이 고작 30만 원인데, 판매 가격이 무려 1,000만 원.
날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장사가 실제로 된다는 점이다.
아니, 주문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감당을 못 하는 중이었다.
언론사도 이 KM 센서에 관한 여러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KM 전자의 모습이 퇴색되는 분위기였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재정 경제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에 이 정보를 바로 얻었다. 그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정 경제원이 왜 최민혁 실장과 타협한 것인지 알았다.
재정 경제원이 무슨 짓을 해도 최민혁 실장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겠지. 외압을 줬다가 들통이라도 난다면 외통수일 테니까.’
만약 그런 이슈가 터지면 차관급 선에서 대폭 물갈이될 수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단기 외환 시장으로 드러난 한국 외환 시장의 불안정성이었다.
아직 이 문제는 제대로 된 대안도, 현상 파악도 되지 않았다.
그저 최악의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대안을 강구할 뿐이었다.
‘과연 최민혁 실장!’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혀를 내두르면서 한국에 만들어 둔 인맥 몇 사람을 추가로 만났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입체적인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대안이 없이 최악의 상황만 고려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결국 데릭 모건 이사를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