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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압니다. 의도적으로 외환 시장을 흔들 목적이었다면 우리 재정 경제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사고였다는 것도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외환 시장에 좀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이 정보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이걸 자신에게 왜 순순히 말하는지가 의아했다.
그런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우리 외환 시장은 어느 정도 제약이 있습니다. 외화 보유액이나 수출 규모에 따라서 외환 영역이 정해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채권, 국채, 금리와 같은 변수도 무시하기 힘듭니다. 외환 혼란은 쉽게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다는…….”
“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안 됩니다. 다만 달러가 단기에 급격하게 요동치면, 그 한계가 벗겨집니다. 맞습니다. 이번 외환 쇼크도 일주일 간격이었다면 문제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설마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달러 충격이 생긴다면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
성환수 보좌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 결과도 운 좋게 찾았다.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과 조동석 과장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에게 받은 X 리포트를 참조해서 문제점을 찾아냈다. 그럼 결국, 최민혁 실장은 지금 이 사태를 사전에 알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되면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의 배후라는 설도 탄력을 받는다.
‘도대체 어떻게?’
더 심각한 건 이런 내용을 누구에게 밝히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딱 예외적인 시점이 되어야 일어나는 일이다. 더욱이 그 상황이 된다고 해서 똑같은 문제가 생긴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재정 경제원이 최민혁 실장의 황당한 발언에 제동을 걸지 않는 이유였다.
물론 윗선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말이다.
최악의 상황은 이 사태가 다시 일어났을 때다.
그때는 성환수 보좌관을 비롯한 실무진이 책임을 뒤집어쓸 확률이 높았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님은 최민혁 실장님에 대해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들었습니다. 태국으로 가기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방송에서 나온 국가 부도 사태와 관련해서 들은 것이 있습니까?”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태국으로 가기 전에 성환수 보좌관을 만나서 작별 인사를 고했다. 다만 그때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았다. 상대가 왜 자신에게 귀중한 정부 내부 정보를 말하는지 이제야 안 것이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충혈된 성환수 보좌관의 모습에 결국 입을 열었다.
“저희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지금은 그저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다만 재정 경제원의 일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최민혁 실장이 의도한 바가 있어서 일을 꾸미는 것일 테니까.”
“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최민혁 실장과 대립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성환수 보좌관의 태도에서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이환채 차관을 건드렸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나 다 두들겨 맞기 전에는 그 뒤의 상황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바가 있는데, 재정 경제원이 걸림돌이 되어서 건드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방송 나가서 국가 부도설을 부추긴 것은 단순한 이벤트…….”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주 개연성이 없는 사건을 얘기할 사람은 아닙니다.”
“가, 가만. 그러, 그러면 저, 정말 한국에 국가 부도가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겉으로야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 내심은 좀 달랐다. 그는 과거 데릭 모건이 연 한 파티에서 들은 몇 가지들을 사실을 뒤늦게야 떠올렸다.
그중에는 한국 경제 시스템이 취약해서 흔들기 좋다는 말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웃고 넘겼다.
그런데 지금 와서 최민혁 실장의 행동을 보면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온 플랜과 너무도 닮았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당시 그 자리에 없었으니, 지금 상황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환수 보좌관은 간절했다.
“이사님, 좀 도와주십시오. 한국 상황이 힘들어지면, 투자 은행에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규제가 더 강화될 겁니다!”
“그건 저도 한번 확인해 봐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정말 상상 그 이상이군요. 설마 재정 경제원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니.”
“맙소사.”
성환수 부좌관도 화들짝 놀랐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반응을 통해서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최민혁 실장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질문이 딱 그런 방향과 일치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안색도 좋지가 않았다. 그는 성환수 보좌관을 통해서 상당히 구체적인 최민혁 실장의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온 얘기들을 합쳐보면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최민혁 실장의 타깃에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이 본 보고서에서 발견한 이상한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거 안 좋은데…….’
* * *
성환수 보좌관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와 잠깐 이야기를 한 후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바로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대놓고 자기 감정을 피력하지 않았다.
조용히 뒤통수를 치는 타입이었다.
미국 재무부를 상대로 보여준 최민혁 실장의 활극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랐다. 놀라운 것은 결과였다. 미국 재무부가 최민혁 실장과 타협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태어난 기업이 다름 아닌 KM 센서였다.
미국 연방 정부에 무려 15,000달러 최고 옵션 KM DVR를 납품하기로 했다.
PC DVR은 기본 옵션이 6,000달러가 좀 안 되지만 풀 옵션은 무려 15,000달러가 넘는다. 더욱 발전된 인공지능 옵션이 들어가서다.
한 대 가격이 무려 1,000만 원이 넘었다. 생산 제조 단가가 고작 30만 원이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 정부는 흔쾌히 이 계약을 진행했다.
보안 때문이다.
PC DVR의 풀 옵션은 인공지능 논리가 최대한 반영된다. 따라서 허가받지 않은 인물이 연방 정부 안으로 들어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설사 들어왔다고 해도 입체적인 PC DVR 감시를 피해 가기는 어려웠다.
성환수 보좌관은 불과 어제 들어온 이 납품 계약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이환채 차관에게 보고했다.
“…대단하네.”
이환채 차관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아는 미국 연방 정부 조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온갖 트집을 다 잡을 것이다.
사실 연방 정부에 납품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당 1,0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무려 1만 대나 팔아치우다니.
‘천억 물량이구나. 하, 설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게 가능한 건가?’
성환수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관님이 굳이 최민혁 실장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만만한 인사는 아닙니다.”
이환채 차관은 호들갑을 떠는 성환수 보좌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날 보고 무능하다고 질책하는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상황을 좀 달리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KM 블룸버그의 케이블 인허가 같은 부분은 그냥 패스하고요. 이유는 외환 쇼크 문제는 단기간에 확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분간은 최민혁 실장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이봐, 성 보좌관,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 최민혁 실장이 우릴 상대로 보복을 진행 중이야. 그 일을 과연 멈출까?”
“하지만 우리 재정 경제원에서 나선다면 최민혁 실장도 지금처럼 적대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서로 반감을 품었을 뿐입니다!”
“흠.”
이환채 차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성환수 보좌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가장 큰 것은 역시 최민혁 실장이 만든, 아니, 만들었다고 보이는 단기 외환 쇼크였다.
“좋아, 그렇다고 하지.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지. 단기 외환 쇼크는 최민혁 실장이 만든 것이 맞아? 그럼 그가 사전에 우리 외환 시스템의 문제를 알았다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몰랐다면 국가 부도설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가지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으음.”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이 나간 시사 프로그램 녹화본을 가져와서 다시 확인해 봤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딱히 걱정하는 모양이 아니었다. 국가 부도가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건조한 어조를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최민혁 실장을 비난하는 이들조차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국가 부도설이 꽤 힘을 받았다.
아마 어지간한 인사가 국가 부도설을 말했다면 ‘미친놈’ 취급받겠지만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이라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성환수 보좌관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주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측 인사를 통해서 들었는데, 그쪽도 최민혁 실장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합니다. 최민혁 실장이 최근 미국에 가서 한 일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대립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심지어 모건 스탠리까지 건드렸다고 합니다.”
이환채 차관은 경악했다.
“저, 정말이야?!!!”
모건 스탠리라니.
그 명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정부 관료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네. 모건 스탠리 쪽은 결국 최민혁 실장과 타협해서인지 요즘 침묵 중입니다. 하지만 샐로먼 브러더스 측은 전혀 다릅니다. 그쪽도 최민혁 실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환채 차관은 데릭 모건 이사를 통해서 늘 정보를 얻었기에 매우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도 샐로먼 브러더스와 최민혁 실장이 붙어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하, 진짜 말릴 수 없는 인물이네.’
그는 그제야 뭔가 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 * *
이환채 차관은 최민혁 실장에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자 김웅배 재정 경제원 장관에게 직접 이 사안을 보고했다.
그런데 김웅배 장관은 놀랍게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최민혁 실장의 위험성을 잘 아는 눈치였다.
불과 며칠 전의 인터뷰 사건도 크게 걸고넘어가지 않았다.
이환채 차관은 결국 시간이 더 필요해서 휴전안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외환 쇼크 부분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심각해?”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대체 자네가 아는 게 뭐가 있어? 괜히 내막도 모르고 막 들이대기만 하잖아!”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자는 게 아냐. 내 말은 무리수를 두지 말라는 거야. 괜히 법의 범위를 벗어나면 결국 자네가 다 책임질 테니까.”
감방에 간다는 말이었다.
“…네.”
이환채 차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내심 김웅배 장관 욕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김웅배 장관은 자신에게 전권을 줬다.
일이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맞았다.
최민혁 실장 일만 해도 그렇다.
최민혁 실장이 방송에 나가 국가 부도설을 떠벌리는 것에 대해 딱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이 일 역시 추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물론 최민혁 실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방송에 나가서 그 짓을 했다면 공권력을 동원해서 매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좀 달랐다.
“외환 쇼크 부분과 관련해서 각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구석이 좀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은행입니다.”
정확히는 은행 부실이었다. 지금 한국 경제 성장이라면 문제가 없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경제 성장에 대해
역성장하는 경우다.
“저도 처음에는 기우라고 생각했는데,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습니다. 멕시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작년 한 해에만 마이너스 7% 성장하면서 큰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은행 부실이 생긴 거군.”
두 사람 다 답답했다. 사실 그들이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지 못한 진정한 이유였다.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은 뭔가 있어도 있었다. 다만 그걸 지금 당장은 모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