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88화 (88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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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시장은 제 앞마당이 아닙니다.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벨린 투자의 펀드 매니저가 외환 시장에 손을 쓸 수 있지 않습니까? 특히 국내 외환 시장에 말입니다.”

“주식하고 외환은 좀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벨린 투자를 통해서 하는 규모는 조 단위가 넘어갑니다. 그 정도 규모라면 단순히 주식에만 집중할 수 없습니다. 외환이나 채권 쪽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뇨. 전 그쪽은 생각 없습니다.”

“좀 답답하시네요. 주식 투자자라면 모를 수 없는 내용입니다.”

단순히 주식만 투자하는 투자 회사는 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주식에만 집착하는 투자자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단순했다. 그는 불행히도 국채, 외환 쪽은 잘 몰랐다. 옵션, 선물과 같은 투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아는 건 전생의 인지 범위 안쪽의 것들이었다.

불행히도 외환 쪽은 잘 몰랐다.

아니면 전문 인력을 뽑아서 일을 줘야 하는데, 굳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전 안전 자산을 선호합니다. 주식 투자도 제가 아는 주식에만 집중합니다. 다른 주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원칙입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은 공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외환 시장을 위해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최민혁은 그제야 이환채 차관이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특히 자신의 주시하는 이환채 차관의 모습에서 범인을 취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는 대놓고 기분이 나쁘다고 말할 풋내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 이걸 죽여? 아니면 살려?’

“에플 투자로 재미를 자주 봤습니다. 아, ARN 지분도 있군요. 굳이 잘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그렇다면 최근 한국 외환 시장이 크게 흔들렸는데, 그 사태와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 자금 태반이 KD 통신, KD LCD 지분 매각 대금이었습니다.”

최민혁은 의외로 집요한 이환채 차관의 말에 혀를 찼다. 그는 의외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아니라고 계속 대답했다.

몇 번을 반복하자 상대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습니까. 으음, 좋습니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님이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제에 큰 충격을 줄 투자는 좀 자제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죠.”

최민혁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환채 차관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었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상대가 재정 경제부 차관이라서 듣기만 했는데,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는 IMF와 관련해서 정부 쪽에 그 어떤 정보를 줘서 나비 효과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조언한다고 이 작자가 내 말을 제대로 들을까? 아니, 몇몇 공무원은 내 말을 들을 수도 있어. 그런데 정부 조직이 들을까?’

문득 이환채 차관은 의외로 외환 문제에 신경을 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기 외환 쇼크 때문이겠지.’

최민혁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한번 힌트를 줘보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금 보유한 외환 보유고 말입니다. 재작년 기준으로 볼 때 277억 달러 정도 되죠?”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멕시코가 OECD 가입 전에 외환 보유고가 254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을 말이죠. 그 전까지는 외환 안정화에 집중했는데, 갑자기 외환 시장을 개방했죠. 그 결과는 금융 위기였고요.”

“허허허, 우리 한국 경제는 멕시코와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멕시코의 OECD 가입이나 우리나라의 OECD 가입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요. 그 이유 때문에 이번 단기 외환 쇼크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제가 아니라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환채 차관은 단호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선뜻 확신하지는 못했다. 분명 멕시코의 경제 위기는 OECD 가입 이후로 일어난 일이었다.

페소화의 갑작스러운 평가 절하 때문에 말이다.

‘설마?’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민에 빠진 이환채 차관을 쳐다보았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이제까지 제 말이 제법 잘 적중된 것으로 압니다. 주식 투자가 대표적이죠. 그렇다면 환율 문제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뜬금없이 절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멕시코 경제 위기를 참조하는 게 어떨까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죽거렸다.

“두고 보면 알겠죠. 하지만 경제 언론사 인터뷰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할 겁니다. 만약 그런 조언이 있었는데도, 문제가 터지면 이환채 차관님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야 할 겁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죠!”

그는 화를 내면서도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환채 차관의 표정을 보면서 혀를 찼다. 자신이 뭔가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 보였다.

‘이 시점에 한번 확실히 해둬야지. 예언자 코스프레를 하려면 지금쯤 한마디 해야 할 테니까. IMF를 막기 위한 노력을 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 하지만 아마 변화는 어렵겠지.’

* * *

이환채 차관은 최민혁 실장과 잠깐 대화를 나눈 후에 씩씩거리면서 돌아갔다. 그는 최용욱 회장이 설득하는 말도 무시했다.

황당한 것은 최민혁 실장이었다. 원래 신비주의를 고수했는데, 자신과의 만남 이후 불과 이틀 만에 SBC 시사 토론에 참여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KM 전자의 최민혁 기획실장입니다. 저도 많이 망설이다가 이번 단기 외환 시장 변동에 대해서 우려를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사실 이번 외환 단기 쇼크 사태는 하나의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자본 시장 개방에 따른…….]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2조 6천억의 초대박 이후로 최민혁 실장에 대한 방송 출연 요청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최근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자기 생활도 설명했고 말이다.

사실 단편적으로 보면 별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이 프로그램에서 외환 보유고와 기업 부채에 대해서 경고했다.

[이번 단기 외환 시장 쇼크는 우리 경제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자본 시장 개방과 더블어서 그 문제가 터졌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외환 보유고로는 자칫하면,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 일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대응책을 고려해야 합니다!]

최민혁 실장도 극단적인 표현은 자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순화된 표현 역시 자본 시장 개방에 따른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남발했다.

당연히 패널 참석자와 이 토론에 참석한 시청자는 크게 반발했다.

심지어 한 패널 참석자는 최민혁 실장에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 단기 외환 쇼크와 재정 경제원 실무진의 발표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재정 경제원 이환채 차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경제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한 겁니다. 경제 전문가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제가 장담하지만 단기 외환 충격이 크게 온다면, 최악의 경우에 국가 자체가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나간 이야기에 패널 역시 폭발했다.

시청자 역시 항의가 넘쳐났다.

다만 의외로 최민혁 실장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았다.

완전히 허황한 이야기라고 매도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주장을 정책에 당장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은 많지 않았다.

최민혁은 새삼 자신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이환채 차관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이번 방송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을 예상한 것처럼 무덤덤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집중했다.

“…….”

이환채 차관은 며칠 만에 최민혁이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물론 성환수 보좌관은 그럴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최민혁 실장이 괜히 차관님을 자극해서 혹시라도 KM 블룸버그 사업을 방해할 것을 막을 의도로 한 말이 분명합니다!”

“…방송 인허가 말인가?”

“네. 관심사를 돌리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KM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케이블 TV 인허가가 있는 몇몇 업체가 정리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허가 재검토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중간에 나서서 그걸 막았습니다.”

케이블 TV 재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런데 KM 그룹 기획 조정실 기준을 맞춘다고 해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걸 재정 경제원이 관련 기관을 압박해서 손을 쓸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아니, 심지어 재정 경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했다. 그들은 관련 정부 기관이나 언론을 이용해서 케이블 인허가에 제동을 걸 작정이었다.

특히 특혜 시비를 이용해서 재승인 전까지 제동을 걸 수도 있으니까.

다만 갑자기 블룸버그가 튀어나오면서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는 결국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을 다시 호출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데, 최민혁 실장님의 우려가 마냥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금융 시장을 갑자기 개방하는 경우에 그 충격파를 무시 못 합니다. 한국은 멕시코 경제 위기가 마냥 남의 사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OECD 가입을 똑같이 볼 수는 없잖아?!”

“그렇죠. 크게 우려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기업들은 부채 규모를 너무 키웠습니다. 거기에 단기 자본도 문제입니다. 만약 이 부분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큰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거야 추론이잖아? 이번 외환 단기 쇼크에서는 그런 문제가 전혀 나오지 않았어!”

“이번 외환 쇼크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KD 통신, KD LCD 지분 매입과 관련된 자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업 부실과 관련해서 동일한 사건이 터진다면 상황이 심각할 겁니다!”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은 인내를 가진 채 차분하게 설명했다.

한국, 멕시코, OECD 관련된 부분 말이다.

특히 자본시장 개방에 따른 구체적인 통화 흐름도 설명했다.

확실히 성환수 보좌관과는 좀 달랐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증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환채 차관은 김웅배 장관의 성정을 떠올렸다. 이런 보고를 올렸다가는 욕만 잔뜩 들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자신은 이 불확실한 내용을 덮고 싶었다.

최민혁 실장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는 고민한 끝에 일단 김웅배 장관에게 다시 보고했다.

하지만 김웅배 장관의 반응은 역시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봐 이 차관, 자네 일을 제대로 하기는 하는 거야? 왜 자꾸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자본 시장 개방에 따라서 경제 혼란이 일어난다니. 설마 우리 한국이 멕시코와 똑같다고 비웃는 건가?!”

“…아닙니다.”

‘젠장,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그리고 최민혁 실장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한 경제 언론지와 정말 인터뷰를 했다.

“최민혁 실장 때문에 그래? 최민혁 실장이 무서워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 며칠 전에 나온 최민혁 실장 인터뷰 때문에 그래? 하, 이 친구 참.”

“…죄송합니다.”

“자신 없으면 그만해.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길 테니까.”

“아, 아닙니다.”

이환채 차관은 기겁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갑일 때와는 달리 을이 되니, 불안감을 더 크게 느꼈다.

자신이 성환수 보좌관에게 이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김웅배 장관처럼 똑같이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너무 불안해. 최민혁 실장이 그렇게 나올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데릭 모건 이사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 * *

데릭 모건 이사는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 때문에 치를 떨었다.

그는 설마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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