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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근 사장의 KM 센서 보직 이동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KM 센서는 덩치만 봐서는 KM 전자보다는 못하지만, 그 잠재력은 오히려 더 나았다.
수출 시장 확보가 된다면 반년 안에 KM 전자 매출을 넘어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영근 사장은 노익장임에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미국도 자주 방문했다. 미국 연방 정부 관료를 찾아다닌 것이다.
오히려 최민혁 실장 자신보다 친화력이 더 뛰어나서 영업력을 더 넓혀 나갔다.
짧은 시간이어도 표가 날 정도로 말이다.
KM 전자 사장으로 있을 때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최민혁은 새삼 인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서 깨달았다.
‘뭐, 두 사람의 인성은 전생에서 검증되었으니까.’
사실 검증이 안 된 사람은 그로서도 선뜻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것도 사내에서 요즘 말이 무성했다.
최민혁 실장 라인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KM 전자는 오히려 이 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만 KM 그룹은 좀 달랐다.
최민혁 실장의 눈 밖에 나는 순간, 회사에서 그만둬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내 군기가 점점 더 심해졌다.
최용욱 회장이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이들은 없었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의 측근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재떨이에 맞아서 입원해 있다가 다시 복귀한 후에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봐, 주 이사, 왜 그래?!”
주호석 이사는 이미 정리된 KM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인 KM 지오텍 이사로 있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만 믿고 버티다가, 운 좋게도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한 업무는 TRS 관련 업무였다.
“TRS 사업 말입니다. 사업권 쟁탈이 심해지면서 TRS 기술 표준도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술 표준을 둘러싼 갈등은 밥그릇 문제가 있어서 쉽게 해결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 공급 문제에 관심이 대두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확정된 것은 없었다.
“기술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TRS와는 달리 PCS의 경우에는 이미 CDMA 방식을 기술 표준으로 정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최민혁 실장님의 조언에 따라서 TRS 사업을 정리했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매각한 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TRS 기술 표준 역시 곧 방향이 나올 거야.”
“아뇨, 제가 정통부에 확인한 바로는 아직 방향조차 설정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이지?”
“TRS 사업권 쟁탈전이 격화되면서 표준 이야기는 다 따로입니다. 기술 방식이 다 달라서 어디로 갈지 정해진 바도 없습니다.”
정확히는 몇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주파수 호핑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덴 방식이다.
기술 표준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전혀 달랐다.
외국계 방식이 된다면 국내 TRS 기술 표준은 아웃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저게 언제 확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주호석 이사는 자신이 KM지오텍에 남아 있었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매출은 고사하고, 기술 방향성이 잡히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 적자가 누적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민혁 실장님 말이 다 옳았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니, 사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말없이 몸을 돌리는 주호석 이사.
그런데 통로를 오가는 임직원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다들 최문경 부회장을 믿는 시선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분노를 쉽게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결국 접촉할 수 있는 인사는 다 알아보았다.
혹시라도 최민혁 실장에게 반감이 있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바로 재정 경제원이었다.
그들이 최민혁 실장을 따로 조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과거 자신이 최민혁 실장을 경험하면서 느낀 내용을 정리해서 재정 경제원 쪽에 슬쩍 흘렸다.
물론 이 일을 한 사람은 권재홍 비서실장이었다.
‘재발 재정 경제원이 그나마 손을 쓰기를 바라야겠어.’
* * *
최민혁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주기적인 보고 과정에서 사내 기강이 점차 잡혀간다는 소식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때문에 무리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세한 일을 더 살폈다.
그중에는 당연히 재정 경제원 분위기도 있었다.
“…재정 경제원이 요즘 시끄럽다고요?”
조성돈 팀장은 ‘송도연 임신설’ 이야기할 타이밍만 보면서 계속 고민하면서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이상할 정도입니다. 개정 X 리포트에 대한 분석 인력 역시 늘렸습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정부 조직에서 개정 X 리포트를 살핀다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그 답답한 공무원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설마 이번 단기 외환 혼란 사태를 가지고 말하는 겁니까?”
“네. 그게 시발점이 맞습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님에 대해서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않았습니다.”
“쯧, 누가 보면 제가 헤지펀드 같은 악당으로 보이겠습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잠깐 주춤했다. 이번 사태도 따지고 보면 최민혁 실장 때문이었다. 황당한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원래 재정 경제원은 X 리포트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최용욱 회장님 지분 매각 과정에서 15억 달러 가까운 자금이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외환 시장에 일시적인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게 X 리포트에서 경고한 부분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전생에서 모기지 사태를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그도 이미 익히 아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아, 스트레스 테스트군요.”
“네? 스트레스 테스트가 무엇입니까?”
“금융 건전성을 테스트하는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가만, 지금 X 리포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봐서는 저를 이번 사태 주범으로 확정한 겁니까?”
“…네.”
“아니, 불과 며칠 전에 외환 혼란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이미 보고했지 않습니까?!”
조성돈 팀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의 의견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는 어제까지 재정 경제원 내부를 속속들이 살폈다.
그는 덕분에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얻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에 대한 결론의 소스가 최문경 부회장인지는 몰랐다.
“그 과정은 어떻다고 해도 시작은 최민혁 실장님이 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 점을 더 파고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이미 관계가 없다고 사전에 보고한 일은 뭐죠?”
“공적인 결론은 그렇지만 비공식적인 결론은 그 반대입니다. 단기 외환 소동 역시 최민혁 실장님을 배후로 보고 있습니다.”
“쩝.”
그는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확신하자 혀를 내둘렀다.
“설마 그 일도 우리 최문경 부회장이 보복으로 한 일은 아니겠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재정 경제원의 정보 소스가 너무 다양해서 말입니다. 다만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요? 하긴 우리 최문경 부회장이 그 일의 배후일 수 있겠군요.”
그는 일단 조성돈 팀장을 사무실에서 내보냈다.
‘이거 판단 잘해야겠어.’
* * *
최민혁은 재정 경제원의 태도에 혀를 찼다. 언론을 통해서 기사로 나가지는 않지만 재정 경제원 자체는 최민혁 실장을 헤지펀드와 같은 투기 자본으로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도 최근 국내로 들어와서 최용욱 회장을 자극한 일을 떠올렸다. 최민수에게 지분 증여도 좀 도와주고 말이다.
착한 손자 코스프레한 사실 말이다.
물론 그 일이 다 미끼였지만 말이다.
‘좋은 일은 아니었군.’
그런데 재정 경제원 공무원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일을 처음부터 다 재조사했다면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의심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이번 일의 배후라고 확정 지은 것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이건 우리 부회장님 솜씨가 틀림없어.’
굳이 최문경 부회장 동선을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재정 경제원은 자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재정 경제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퉁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조사를 해야 했다.
결국 하루 정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조성돈 팀장을 다시 불렀다.
“설마 이번 일을 핑계 삼아서 재정 경제원이 관련 부서를 동원해 방송 허가를 취소하지는 않겠죠? 블룸버그 합작 회사니까 건드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 말입니다. 다만 케이블 TV 인허가 쪽도 들여다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것도 저 때문인가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악명에 대한 선입견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결국 선수 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게 또 애매했다.
한국 외환 시장은 취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최민혁 자신이 재정 경제부를 박살 내기 위해서 외환 시장을 건드리면, 극단적이면 IMF가 자신 때문에 올 수도 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하지만…….’
그런데 또 모를 일이다.
자신이 이제까지 진행한 일을 보면, 꼭 자신이 짠 계획대로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더 극단적으로 흐른 예도 있었다.
자신이 취약한 한국 외환 시장을 계속 흔들면 정말 큰 사고로 확대될 수가 있었다.
IMF가 그렇게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샐로먼 브러더스가 끼어들 소지도 있어. 그러면 내가 통제하기는 힘들어.’
“좋습니다. 일단 재정 경제원의 내부 분위기부터 살펴보죠. 정 아니다 싶으면 재정 경제원 내부에 손을 댈 필요가 있어요. 다만 환부만 도려내는 방식으로 가죠. 괜히 일을 만들어서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딱히 최민혁에게 조언하지 않았다. 재정 경제원이 KM 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먼저 선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우리의 적이라면…….’
중요한 것은 더 있다. 최민혁 실장의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슬쩍 ‘송도연 임신설’ 관련 보고서를 최민혁 실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당한 제안이기는 한데, 자신이 과거 한 지시에 대한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 자신과 송도연의 임신설.
잘만 요리하면, 한국 전체가 시끄러워질 수가 있었다.
더욱이 이 사태가 터지면, 설사 미국 언론이 난리를 쳐도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덮을 수는 없었다.
스티븐 기조연설의 여자 주연이 다름 아닌 송도연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도 어리고 말이다.
다만 최민혁은 이 황당한 기획안에 대해서 일단 킵하는 것으로 했다.
“이건 제가 고민해 볼게요. 도연이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 신중하게 가죠. 일단 계속 문제가 되는 재정 경제원 문제부터 확인합시다. 최문경 부회장님과 같이 상황이 엮일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최민혁이 한 우려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전생에서 정부 부처를 최대한 악용해서 상대를 쳐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특히 샐로먼 브러더스를 최대한 이용해서 정부 부처를 제어했다.
다행이라면 지금 상황은 전생과는 좀 많이 달랐다.
아직 최문경 부회장이 정부 기관과 관계가 깊지가 않았다.
‘IMF 시기를 거치면서 인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니까. 거기에 미국으로 몸을 피한 후에 더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그때 영향력은 정말 엄청났지.’
다행히 그런 미래는 없었다.
다만 그도 한 가지는 아쉬웠다.
‘하필이면 이 시기라는 점이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