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
하지만 곧이어서 나온 AC9701 칩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최영란 본부장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AC-Link에 대한 개념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건 인텔이 1년 후에 발표한 내용이었다.
심지어 인텔은 AC9701과 같은 환상적인 칩을 발표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방향만 제시했던 것이니 말이다.
AC9701은 몇 년을 앞서간 놀라운 아이템이었다.
최영란 본부장은 이런 점을 지적했다.
[물론 여러분의 걱정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 칩은 모바일 오디오 계열에서는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특히 지금 MP3 플레이어 업체는 저가의 A/D, D/A 컨버터를 사용하는데, 그 성능이 몹시 나쁩니다.]
그녀가 실제로 보여준 것은 AC9701을 사용한 시제품과 KM 전자에서 만든 세계 최고의 MP3인 KMP-01과의 성능 비교표였다.
약간의 전문적인 내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성능을 비교한 동영상 결과가 있었다.
특히 노이즈와 관련해서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
최용욱 회장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는 힐끗, 턱을 빳빳이 내세우는 최영란 본부장을 보더니 배후에 최민혁 실장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케이블 TV 타령하면서 날 찾을 리가 없지. 역시 그게다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다른 것은 다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AC9701 칩은 도저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힐끗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는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사장단 회의실에서 나왔다.
***
장승일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기획 조정실 실장이면서 정작 그룹내의 중요한 일은 모른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KM 전자는 그의 영향력 밖이었다.
그래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채 곧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승일 실장입니다.]
[장실장님, 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전과는 태도가 많이 달랐다. 과거 쌓인 푸념을 털어놓았다.
[…아뇨. 실장님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입니다.]
[그래요? 그거 이상하군요. 전 최근 미국에 가 있어서 장 실장님에게…….]
[AC9701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거 말입니까. 흠, 보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나. 사실 저도 몰랐다고 하면 믿지 않겠죠?]
[실장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실장님에게 그렇게 잘못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최소한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왜 그룹의 캐시카우가 될 아이템을 사장단 회의에서 들어야 하는 겁니까? 회장님의 실망한 눈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최민혁 실장도 울분이 가득한 장승일 실장의 목소리에 혀를 찼다.
그도 확실히 최근 와서 장승일 실장을 찬밥 대우하기는 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시기에 장승일 실장이 해준 것을 고려하면 최소한의 정보를 줘야 했다.
더욱이 상대는 KM 그룹 기획 조정실 실장이었다.
최민혁은 핑계를 댈까 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시 말하지만, AC9701은 저도 몰랐던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최병연 소장이 알아서 성과를 진행하면서 일군 성과입니다.]
[최병연 소장 말입니까?]
[네, 물론 제가 힌트는 주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업처럼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었습니다. 최병연 소장이 알아서 KM 전자 내의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필요한 스펙과 기술을 고안한 겁니다. 그건 최병연 소장의 능력입니다.]
[최병연 소장이라면…….]
장승일 실장은 잠깐 최병연 소장 프로필을 하나씩 떠올렸다.
확실히 보통 엔지니어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콜린스 신화의 기원이 된 핵심 엔지니어었다.
그런 그에게 최민혁 실장은 자본, 인력, 기술 모든 것을 다 갖춰줬다.
최병연 소장이라면 최소한 뭔가를 이룩하는 것이 당연했다.
[…확실히 최 소장님이라면 AC9701을 고안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저도 참 놀랐습니다. 역시 콜린스 대박도 단순히 운만은 아니었던 거죠. 조창호 차장 같은 걸물이 최병연 소장을 따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죠. 오성 전자도 멍청했죠. 그런 인물을 그냥 사내 정치 희생양으로 내버려 뒀으니. 저도 최병연 소장을 가볍게 생각한 것을 반성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내막을 잘 모르고 성급하게 최 실장님에게 함부로 말한 것 같아…….]
최민혁 실장은 쓰게 웃었다.
[장승일 실장님에게 소홀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요. 앞으로 그런 점을 조심하죠. 그룹 차원에서 서로 같이 협업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룹 차원에서 인사 관리 능력은 장승일 실장이 최고였다. 최민혁은 그 일까지 직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과 통화한 내역을 토대로 간단하게 문건을 정리한 후에 다시 사장단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는 최용욱 회장에게 간이 보고서를 슬쩍 내밀고는 조용히 한쪽에 가서 앉았다.
최용욱 회장은 보고서를 읽으면서 혀를 찼다. 그도 AC9701이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튀어나온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에 최병연 소장이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최훈열 전무가 한 일이 병연 소장을 내쫓은 거라면 최민혁장은 최병연 소장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었다.
'하긴 그 정도 인물이라면 이럴 수 있지.'
그는 보고서보다는 설명에 더 놀랐다. 이 칩 하나만 사용하면 MP3 플레이어에 사용될 칩 4~5가지는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MP3 플레이어 크기가 대폭 줄어 든다는 의미다.
[…국내 MP3 플레이어 예상 판매 수량이 대량 어느 정도지?]
최영란 본부장은 힐끗 장승일 실장을 일별한 후에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지난달 대략 500만 대까지 늘어났습니다. 물론 수출 물량을 포함해서입니다. 아마 올 상반기만 되어도 판매 수량은 가속도가 붙을 겁니다. 거기에 애플이 CES에서 내놓을 KMP-02B 물량은 뺐습니다. 지금은 시제품 테스트가 끝났고, 양산 단계인 것으로 압니다.]
MP3의 인기는 굳이 이렇게 묻지 않아도 방송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체감할 수 있다. 이제는 MP3가 생활필수품이 되어간다.
하지만 시장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MP3 시장은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에플에서 전량, 이 AC9701 칩을 채용할 생각인 건가?]
[회장님, 당연합니다. 이 칩을 채용하면, 사이즈를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불과 3~4달러 차이로 말입니다. 다만 우리 처지에서는 적어도 500만 개상의 칩을 팔아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 기준으로 말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은 무려 2,000만 달러 매출이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칩 생산 단가는 불과 300-400원 남짓이다.
이익률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매출 규모라면, 회사 하나가 갑자기 툭 생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최용욱 회장이 그렇게 꿈을꾼 반도체 사업 말이다.
최용욱 회장은 너무 당황해서 자신의 내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꿈을 이룩할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일이 쉬워도 너무 쉬웠다.
자신의 평생 꿈이었던 사업인데 말이다.
최영란 본부장은 망연자실한 최용욱회장의 모습에 당황하면서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이 제품은 단순히 MP3 플레이어에만 들어가지 않습니다. 핸드폰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데스크탑 PC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매출 2,000만 달러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액수가 바로 2억 달러, 아니, 5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 미래 수익을 감안하면 도저히 환산 자체가 어려웠다.
물론 후발 주자가 곧 뛰어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5~6년 동안은 AC9701이 독점입니다. 그 시간이면 계열사 하나를 만드는 것에서 아예 새로운 그룹 캐시카우 역할을 맡길 수 있습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최용욱 회장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저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사장단은 다들 크게 당황했지만, 곧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리는 열화와도 같았다.
최용욱 회장도 손뼉을 치기는 했지만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
최문경 부회장은 손뼉을 치면서도 최영란 본부장을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을 만난 일은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정작 AC9701이란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번 일은 KM 센서에 이어서 또 한번의 크로스카운터였다.
그 성과도 최용욱 회장의 평생 염원이었으니까.
'설마 또 당한 건가?'
다만 이번에는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AC9701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지 말이다.
***
최민혁이 딱히 원한 것은 아니지만, 최영란 본부장이 AC9701로 최문경부회장에게 또 스트레이트를 한방 날렸다는 소식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덕분에 KM 그룹 내부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안도했다.
다만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KM 전자 내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때문에 급한 일이 많아도 우선 KM 전자를 방문하기로 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KM 전자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KM 전자 입구 데스크에서 자신을 본 임직원은 기겁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대기업 재벌 회장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최민혁으로서는 의아했다. 그가 아는 KM 전자 임직원들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소수 몇 사람이 특이해서 그렇다고 생각한 채 묵묵히 자기 사무실로 걸어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임직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엘리베이트 한쪽으로 물러나 버렸다.
최민혁은 영문을 몰라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다행히 조성돈 팀장은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 AC9701 때문일 겁니다. 새로운 사업부가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건 더 이상하군요. 오히려 새로운 사업부가 만들어지면 좋은 일 아닙니까?"
"작년이라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오니까요."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제가 회사 임직원을 자르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아무래도 KM 그룹 구조조정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을 겁니다."
"…아니, KM 전자는 KM 그룹과는 전혀 다릅니다. 정말 황당하네요. 제가 강압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충분한 선택을 할 기회를 줬습니다."
"압니다. 실장님 입장에서 임직원을 생각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콜린스사업부 임직원들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잘나가는 사업부를 갑자기 정리한 것이니까요."
"…오성 그룹에 넘어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을 텐데요?"
"아, 물론 임직원 처지에서 월급이 오히려 오를 수가 있어서 좋기는 합니다. 하지만 또 아닌 이들이 있습니다.
오성 전자에서 과연 잘 적응할지 의문인 이들도 있습니다."
"…오성 그룹의 기업 문화 때문입니까?"
"네. 아무래도 KM 전자는 최민혁 실장님이 기업 문화에 손을 댄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아주 이상적인 직장으로 변해 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오성 그룹은 실적 중심입니다."
"흠."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수행원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따가운 시선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KM 전자 분위기가 더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