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9.
마이클 블룸버그는 따가운 스티븐의 시선을 슬쩍 피해 버렸다.
그 역시 경영자로서 창피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진행하는 사업 중에는 자신과 간접적으로 엮이는 일도 있다.
원래는 그 협상과 관련해서 최민혁실장을 만나려고 했다.
알고 보니, 결정은 그 계열사 경영진이 했다.
문제가 된 것은 최민혁 실장 관련 계열사 경영진이 앞뒤가 꽉 막힌 인간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고집이나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죄다 배 째라 식으로 나왔다.
결국 최민혁 실장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알아본 결과로는 그것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최민혁실장은 어지간해서 의사 결정에 참여 하지 않았다.
결국 최민혁 실장보다는 다시 경영진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당연히 좋지가 않았다.
특히 구골과 같은 회사를 무시할 수가 없었고, 앞으로 서로 협업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다만 마이클 블룸버그는 역시 결과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여전히 선을 지켰다.
"물론 최민혁 실장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는 사업과 아이디어는 전혀 다릅니다."
"……."
최민혁 실장은 마이클 블룸버그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저자세를 보이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는 상대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이 뒤로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속삭이면서 쪽지를 내밀었다.
블룸버그와 자신의 계열사 간의 관계가 나와 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뒤늦게야 안것이었다.
최민혁은 힐끗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억울했다. 그가 계열사를 관리해도 경영에 직접 간섭하지는 않았다. 블룸버그와의 협업 역시 계열사 경영진이 결정할 일이었다.
더욱이 이미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은 일을 최민혁 실장에게 보고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계열사 경영진이 자신에게야 그나마 고분고분한 사람이지, 본래 성깔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눈앞에 스티븐이 그 증거였다.
실제로 스티븐은 마이클 블룸버그의 태도에 분개했다.
최민혁 실장은 스티븐이 결국 열받아서 나서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어젯밤에 시간을 내서 자신의 전생 기억 일부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 하나를 내밀었다.
동행한 조성돈 팀장조차 흠칫했다.
그 역시 모르는 보고서였다.
"……?"
마이클 블룸버그는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제목도 없는 보고서를 받아서 한 페이지를 넘긴 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과거 선행 팀에서 미래 사업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제출한 내용과 너무 비슷했다.
그런데 그 보고 내용은 향후 e 비즈니스 미래를 향한 로드맵이었다.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인터넷 콘텐츠를 토대로 구현된 것이었다.
물론 상업적인 완성도는 떨어진다.
그 사업을 그대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블룸버그 TV와 같은 시스템에 이미 적용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즉 그 보고서 안에 담긴 내용은 향후 4~5년간 블룸버그가 할 미래 사업의 청사진이었다.
그렉 파넬 이사가 창백한 마이클 블룸버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어깨 너머로 보고서를 봤다. 그는 내용을 일부 읽기가 무섭게 마이클 손에서 보고서를 빼앗았다.
"맙소사!"
경악.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최근 검토 중인 e 비즈니스 관련 보고서를 꺼냈다. 두가지를 교차로 확인한 후에 이를 악물었다.
"……."
마이클 블룸버그 역시 그 보고서를 받아 확인하고서야 탄식하고 말았다.
그렉 파넬 이사가 버럭 소리쳤다.
"이, 이게 뭡니까?! 설마 최 실장, 당신이 우리 회사 기밀을 다 빼돌린 겁니까?!!"
마이클 블룸버그는 그렉 파넬 이사의 분노를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 역시 굳은 얼굴로 말했다.
"최 실장님, 지금 이 보고서에 대한 진실을 당장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조치를 다할 걸세!"
최민혁은 분노로 불타오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당신네가 만든 거야!'
물론 6년 후쯤 말이다.
"다시 자세히 읽어보기 바랍니다. 구체적인 내용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테니까."
"……."
마이클 블룸버그는 그제야 자신의 판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가지 보고서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차분하게 보고서를 교대로 읽어 봤다.
확실히 비슷한 블록이 있다. 기술적인 방향 자체가 똑같다는 거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부분에는 오히려 자신의 보고서가 나았다.
그런데 완성도 면에서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이 정리한 보고서가 나았다.
심지어 상업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몇 단계 앞서 나갔다.
'이건 마치… 초기 보고서와 최종 보고서 정도의 차이 같잖아? 아니, 그 이상인가. 좀 더 시간을 두고 다듬는다면 비슷해지겠어. 적어도 6년인가.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랬다.
마이클 블룸버그가 블룸버그 성공으로부터 6년 후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 일이 바로 최민혁 실장이 만든 보고서를 이용한 강연이었다.
덕분에 명성도 얻었고 말이다.
디지털 시대 미래를 예언하는 이 강연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이 만든 보고서는 그 자신이 그렇게 떠들었던 강연을 토대로 해서 정리한 것이었다.
그렉 파넬 이사도 아차 싶었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다시 양 보고서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읽어보았다.
확실히 두 가지 보고서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보고서에서 설명되지 않은 몇 가지 아이템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템은 자신들이 좀 더 고민해야 고안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두 사람은 그제야 두 가지 보고서를 분석하면서 패닉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보고서는 자신들의 보고서보다 몇 단계 앞서 있는 셈이었다.
그렉 파넬 이사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무려 300명을 동원해서 미래 사업 아이템을 검토 중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달랑 자기 혼자 이 보고서를 만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보고서를 만든 사람, 보고서 형식이 나와 있지 않았다.
보고서 곳곳에 오타도 많았다.
통일성도 떨어지고 말이다.
마치 대학생이 리포트를 급하게 만들기 위해서 반나절 바짝 고생해서 만든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보고서 구석에 인쇄로 찍은 날짜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 자신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 역시 마이클 블룸버그의 표정을 보자 고민했다. 그는 마이클 블룸버그가 누구인지 잘 알았다.
'가볍게 볼 사람은 아니지.'
디지털 세상에서 블룸버그와 같은 콘텐츠의 가치는 논하기 힘들다.
자신이 나아가려는 세상 말이다.
블룸버그의 도움을 얻는다면, 그 가치를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거, 데릭 모건 이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CES 전시회 때문에 정작 마이클 블룸버그의 가치를 얕잡아 본 셈이다.
최민혁은 새삼 자신이 많이 커서 주변을 가볍게 생각한다고 자책했다. 그는 미래 지식을 이용해서 편법으로 성장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도 뛰어난 인재는 꽤 많았다.
당장 마이클 블룸버그가 그랬으니까.
그는 결국 가지고 온 미니 드론 박스를 열지 않았다. 솔직히 미니 드론보다는 오히려 다른 대안이 좋을 것 같았다.
'블룸버그 TV라면 이용할 곳이 많아. 데릭 모건 이사를 자극하려면 차라리 마이클을 이용하는 것이 더 좋겠어.'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은 대충 알겠어요. 구골과의 협업 같으니까. 다만 구골은 지금 다급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시스템 안정화가 대표적인 예죠. 그래서 그쪽 제안을 그냥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일단 스티븐 기조연설 문제는 없던 걸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계약서도 사인해 주시고요. 그다음은 블룸버그 TV는 한국 시장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이왕이면 우리 그룹과 같이 투자해서 합작 회사를 만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최민혁 실장 말이 이어지자 정작 놀란 것은 조성돈 팀장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내민 조건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뒤늦게 최민혁 실장이 미니 드론 상자를 뒤로 미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최 실장님은 정말 기회를 놓치지 않는구나. 하긴 블룸버그는 무시할 수 없지. 협업하기 위해서 그렇게 매달린 곳이었으니까."
실제로 KM 그룹은 블룸버그와 같은 회사에 선을 넣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이 KM 그룹 따위는 무시했고 말이다.
그는 솔직히 마이클 블룸버그와 대판 크게 싸울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일은 없었다.
굳이 데릭 모건 이사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윈윈이 될 수 있는 제안을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블룸버그 TV에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 당장은 유럽 TV 시장 때문에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1년 후에는 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상 싫어도 구골과 원하는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들어줘야 했다.
"…좋습니다."
"설마 스티븐에게 했던 것처럼 뒤통수치지는 않겠죠?"
마이클 블룸버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스티븐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는 실제로 스티븐에게 허리를 숙였다.
"……."
스티븐은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마이클 블룸버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가 자세한 내막은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최민혁 실장이 떠나기 전에 상자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런데 그 상자는 무엇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조커라고 해둡시다."
"…조커?"
그는 영문을 몰라서 눈동자만 굴리고 말았다.
***
마이클 블룸버그는 최민혁 실장과 구두 협상을 한 후에 데릭 모건 이사 쪽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는 휴가를 핑계 대고는 잠적해 버렸다.
당연히 데릭 모건 이사는 길길이 날뛰었다.
영국 신사 소리를 듣는 평소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잘 보여주는 결과였다.
다만 그로서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이클 블룸버그가 왜 저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마이클 블룸버그는 최민혁 실장 협박따위는 씹어버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데릭 모건 이사의 행적을 한국에 도착해서야 들었다. 정확히는 블룸버그 임직원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데릭 모건 이사의 동영상을 찍어서 그 증거로 보내온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힘이 있고 봐야 해.'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릭 모건은 그냥 두실 생각입니까?"
그는 쓰게 웃고 말았다.
"지금 당장은 데릭 모건 이사를 직접 건드릴 방안이 없습니다. 무리하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 샐로먼 브러더스 경영진이라서 말씀하시는군요. 더욱이 이미 KD 통신, KD LCD에 손을 써놓은 셈이고요."
"그렇죠. 당장은 CES 전시회에 오히려 집중해야 하니까요. 이번 계약을 하면서 CES 전시회 효과를 키울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그러면 미국에서 일을 진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원칙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요. 데릭 모건 이사와 연결될 고리는 우리 첫째 큰아버지이니까. 아마 데릭 모건 이사가 굳이 마이클 블룸버그를 찾아간 것은 최문경 부회장하고 관련이 있을 겁니다."
"하면 데릭 모건 이사에 대한 보복으로 최문경 부회장 통해서 하실 생각입니까?"
"비슷합니다."
"…결국 블룸버그 TV를 이용하실 생각이군요."
"네. 방송국은 어려워도 케이블 TV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이쪽 사업은 할아버지가 눈독을 들였던 사업이고요.
TRS도 저 때문에 접어야 했는데, 이사업이라면 나쁘지 않을 겁니다."
"설마 회장님 때문에 한국에 오신 겁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