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7.
마이클 블룸버그도 막상 지난 일에서의 협상을 떠올리자 자신이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티븐 역시 마이클 블룸버그의 경고장을 보고 그냥 있지는 않았다. 그는 마이클 블룸버그와 약속을 잡고는 바로 나타났다.
스티븐이 뉴욕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마이클,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제 말과 행동이 과했던 거에 대해선 사과도 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책상을 쾅 내리치는 스티븐의 표정은 마치 적을 눈앞에 둔 장수 같았다.
하지만 마이클 블룸버그는 이런 허장성세에 주눅 들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스티븐 당신에게 속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속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스티븐은 이 사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이클 블룸버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버럭 목소리를 울렸다.
"본인이 스스로 한 말을 벌써 잊은 겁니까? 자신이 발표하려고 한 것은 단순히 융합 제품에 대한 트렌드로, 제가 하려는 미래 디지털 제품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진다고?!!"
실제로 그랬다. 스티븐이 직접 마이 클 블룸버그를 앞에 두고 무려 세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한 말이었다.
마이클 블룸버그는 당시 스티븐의 열정에 감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달랐다. 그는 오히려 스티븐의 말발에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데릭 모건 이사의 제안을 받아 준 것은 단순히 이해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아직 신문의 가치를 잘 압니다. 따라서 임의적인 접근에 따른 마케팅 역시 무시하기는 힘듭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에게 경제학 강연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길길이 날뛰는 스티븐의 모습은 마치 분노한 황소 같았다.
하지만 마이클 블룸버그는 오히려 스티븐에 대한 반감이 들었다. 그도 스티븐의 귀환 가치를 믿기는 하지만 자신이 꼭 스티븐보다 못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니까.
"내가 성급하게 판단했습니다. 내 실수입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끝난 일 아닙니까?"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도 입장이란 게 있습니다. 저에겐 CES 기조연설 자체가 꽤 중요합니다."
스티븐은 솔직한 마이클 블룸버그의 말에 뒤로 물러나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잠시 시선을 슬쩍 피하는 마이클블룸버그를 째려봤다.
큰 소란에 안으로 들어온 비서 역시 마이클의 손짓에 슬그머니 나가고 말았다.
스티븐 역시 마이클 블룸버그의 사정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혹시 정치 입문 때문입니까?"
"네, 정치에 입문하려는 저로서는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스티븐은 황당한 눈으로 마이클 블룸버그를 쳐다보다가 반박했다.
"…좋습니다. 이유는 알겠는데, 갑자기 이러는 동기가 뭡니까?"
"다시 말하지만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기존 연설에 대한 우선권은 아직 저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기조연설일 뿐입니다. 그게 꼭 애플 마케팅에 필수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랬다.
기조연설의 후보가 된 것은 나름의 가치 있는 일이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물론 스티븐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는 이번 일에 생각보다 공을 많이 들였다. 최민혁 실장이 밀어준 것 때문이었다.
더욱이 마이클 블룸버그 기조연설에 대한 권리는 그에게 있었다.
법적인 문제는 스티븐이 아직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설마 마이클 블룸버그 같은 거물이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정말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까?"
마이클 블룸버그는 이제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건 사람 같았다. 그는 데릭 모건 제안 때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이 일을 결정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여기에 대안 보상은 하겠습니다. 위약금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하겠습니다."
"……."
스티븐은 패닉에 빠진 채 마이클 블룸버그를 노려보았지만, 감정을 폭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될 일도 아니었다.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최민혁은 이미 KM 전자 내에 설립한 경호 팀 인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과 얽혀 있는 세력을 철저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특히 샐로먼 브러더스가 마이클 블룸버그를 상대로 작업 중인 정보 말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역시 이 때문에 난 감한 상황에 빠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은 미래를 위해서도 꽤 중요했다.
난관에 빠진 스티븐을 도와주는 일이니 말이다.
'스티븐이 사람이라면, 이번에 도움을 받으면 날 배신 따위는 하지 않겠지.'
물론 유효 기간은 있을 것이다.
그건 그때 이후로 생각하면 된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스티븐이 갑자기 자신에게 연락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최민혁은 스티븐이 '마이클 블룸버그' 이야기를 꺼내자 겉으로는 스티븐에게 공감하는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달랐다. 이번 일로 스티븐에게 또 한 번의 빚을 지우는 셈이니까.
다만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스티븐이 마이클 블룸버그 배신에 대해서 한 가지 사실을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마이클 블룸버그와 헤어진 후에 이번 사안에 대해서 다각도로 조사를 한 것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데릭 모건 이사그 새끼 짓이 분명합니다!"
'데릭 모건 이사라…….'
전혀 생각도 못 한 인물은 아니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앞장서서 나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샐로먼 브러더스는 이전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격적인 포지션을 취한 셈이 된다.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는 빠르네.'
최민혁 실장은 이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마이클 블룸버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사업가이지만 후일 정치 쪽에 뛰어들 사람이었다.
'시작은 역시 뉴욕 시장이겠지.'
그다음은 미국 대선 후보로도 나설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이상하지 않았다.
스티븐은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최민혁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번 일에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법적인 문제가 없도록 사전에 손을 써야 했는데, 마이클 블룸버그를 너무 믿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대안을 찾으면 될 테니까."
"네?"
그는 축 늘어진 스티븐 옆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기가 팍 죽은 스티븐의 침울한 눈을 보면서 밝게 웃었다.
"데릭 모건 이사가 마이클 블룸버그를 설득했다면, 우리도 못 할 것이 없어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데릭 모건 이사가 내건 조건이 프랑스 내의 블룸버그 TV 이권과 관련이 있는 일인데, 거기에 대응할 만한 조건을 내걸기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몇 가지 대안을 떠올렸다.
"꼭 하려면 방법은 있죠. 블룸버그 T V에 독일 채널 넣는 방식 말입니다. 뉴스, 인터뷰, 주식과 같은 정보 채널이라면 나쁘지 않죠."
"서, 설마 독일 정부 쪽에 이미 알아본 겁니까?"
"확인만 해봤습니다."
블룸버그 TV가 독일 시장을 확보하는 거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실제로 스티븐 쪽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쪽도 고민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런 일로 정력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겁니까?"
"차세대 기술이죠."
"네?"
최민혁은 앞으로 4년 후에 블룸버그가 지향하는 미래를 떠올렸다. 그들이 특히 집중하는 일이 'e 비즈니스'란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비서를 통해서 들어온 따스한 주스 한 잔을 스티븐에게 내밀었다.
그다음에 다른 한 잔으로 입술을 적시면서 스티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앞으로 디지털 세상이 열리면, 세상에 변화가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뜨는 신사업 중의 하나가 e비즈니스입니다."
마이클 블룸버그는 이 e비즈니스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멀티미디어 단말기를 이용해서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스티븐으로서는 그런 미래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지금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MP3, 아이컴과 같은 아이템은 블룸버그가 원하는 비즈니스와 꽤 관련이 있습니다. 마이클이 원래 이번 기조연설에 나선 것도 그런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면 제 설득에 넘어간 것은 오히려 제가 나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블룸버그 비즈니 스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차라리 스티븐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마이클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e 비즈니스 미래와 관련이 있는 기술 말입니까?"
"그렇죠."
"하지만 당장 그런 아이템은……."
"있습니다."
그는 스티븐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바로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이지수 박사에게 이걸 준비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이 내민 쪽지를 보고는 바로 이지수 박사를 호출했다.
스티븐은 영문을 몰라서 두 사람을 교대로 쳐다보기만 했다.
최민혁은 그런 스티븐을 계속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도 결국 잘 해결이 될 테니까."
"하지만 제가 실수해서……."
"경영하다 보면, 실수는 하게 마련입니다. 그게 뭐 중요합니까. 우리는 동맹입니다. 서로 미래를 같이하는 동맹 말이죠. 전 스티븐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티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물론 사무실을 나가면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이 보낸 메모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불과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최민혁은 이지수 박사를 보자 인공지능 미니 드론 OS 수정에 대한 것을 확인해 봤다.
이지수 박사는 이미 메이런 프로젝트개발 진행을 통해서 과거 메이런 프로젝트 개발 때 얻은 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녀는 그 기술을 기존 인공지능 미니 드론에도 적용했다.
"…대략 한 시간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대략 4배 정도 사용 시간이 늘어났군요."
최민혁은 스티븐 때문에 대충 말하고 넘겼지만 내심은 좀 달랐다.
그가 아는 전생 기억에서 이 정도 퀄리티 있는 인공지능 드론은 나오지 않았다.
하드웨어 한계를 고려하면 한 세대 이상을 앞선 기술이었다.
'절름발이라고 봐야 할까? 하드웨어 기반 받쳐준다면, 그 이상도 될 텐데, 아쉽네. 뭐 어쩔 수 없지. 이번 일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지금도 너무 앞서 나간 기술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이런 점을 지적했다.
"안정성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파워 소모와 관련해서는 아예 따로 모듈을 독립시켜서 하드웨어와 병렬로 동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지수 박사는 옆에서 기가 푹 죽은 스티븐에게 눈인사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 질문에 계속 답했다.
새로운 구조는 아예 전력 파트와 기능 파트로 나누어 버렸다.
다행이라면 이 작업은 큰 구조 변경없이 가능했다.
이미 사전 개발 시에 이런 문제를 감안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 기능을 쓰게 될까 싶었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능이 전체 시스템을 통괄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지수 박사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기존의 모든 기술 블록을 수정했다.
특히 각각의 블록으로 나누어서 다른 파트에서 얼마든지 이식할 수 있게 하였다.
그녀가 고안한 인공지능 논리 블록이 이 시스템과 결합한 것이었다. 다만 아직은 안정성이 완전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