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
“기다려 주신 거요. 최 실장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에요.”
이지수 박사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다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심지어 최민혁을 꼭 안았다. 그녀도 최민혁 실장이 마음고생을 꽤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니 말이다.
“…….”
최민혁은 물컹한 촉감에 크게 당황했다. 이런 일은 예상 밖이었다. 사실 이지수 박사가 그렇게 빨리 자신이 원한 바를 이룰 줄은 몰랐다.
그도 다급하게 손을 써야 했다. 힐끗 헬렌을 쳐다보았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헬렌의 감정을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헬렌 역시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어느 정도를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는 전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이지수 박사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이것 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지수 박사를 끌어안으면서 헬렌의 암묵적인 인정을 받는 것 말이다.
달콤한 감정이 몸을 지배했다.
그러다 문득 헬렌과의 지난 섹스 씬을 떠올렸다.
‘젠장맞을.’
이지수 박사의 마음을 모르기에 나온 최민혁 실장의 반응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여태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메이런 프로젝트까지 어렵게 가지고 와서 다시 기회를 준 것을 말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애니 발전에 대한 감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인공지능 미니 드론 애니는 아직 연구 토대가 많지 않아서 새롭게 진행하는 일이다. 이 일이 결실을 맺으려면, 천문학적인 자금과 최저 1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무인 항공기 애니 경험이 이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건 이지수 박사 본인이 아니면 잘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마치 이지수 박사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다 들어주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굳이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다 이지수 박사님의 연구가 성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밀어준 것뿐입니다.”
“…네.”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마음을 알기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헬렌조차 최민혁 실장을 그저 조용히 째려볼 뿐이었다.
최민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질문인데, 국방부 쪽에 모든 개발 정보를 다 넘겨서는 곤란합니다. 아니, 넘겨도 문제가 없는 것만 내줘야 합니다. 사실 사전에 이 경고를 해야 하는데, 좀 늦었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말을 하면서도 손수건을 꺼내서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이지수 박사가 기대한 것보다 더 빨리 발전한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뒤돌아서 눈물을 닦으면서 쾌활한 어조로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바보 아니니까.”
헬렌이 슬쩍 끼어들었다.
“우리 이 박사님이 순진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전혀 아니에요. 마크 소령, 정확히는 마크 박사는 바보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요. 그럼에도 메이런 프로젝트가 왜 이제까지 지지부진했다고 생각해요? 그거 다 이지수 박사님이 행패를 부려서 그런 거죠.”
이지수 박사는 ‘행패’란 말에 눈을 부라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마크 프랭클린 소령이나 테일러 박사는 바보가 아니다. 두 사람은 동기가 좀 다를 뿐이지, 결국 각자의 욕망 때문에 메이런 프로젝트를 완수하려고 했다.
그런 그들조차 이지수 박사가 쳐놓은 덫에 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메이런 프로젝트 진행은 이지수 박사가 떡밥을 하나씩 뿌린 결과였다.
다들 이지수 박사에게 의혹을 품을 때마다 하나씩 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고 말이다.
모든 제대로 된 솔루션은 이지수 박사의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랬군요.”
최민혁 실장은 청초한 눈망울을 한 이지수 박사의 눈빛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랬던가. 하긴 내가 그녀를 마주한 것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이었지. 어쩌면 그들과의 갈등 과정에서 안 좋은 일을 경험했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이 일은 김명준 과장에게 따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 * *
최민혁이 굳이 이지수 박사의 아버지 데니스 리를 만나지 않은 것은 미래를 크게 바꿀 것을 염려해서였다. 전생대로 흘러가야 그의 사망 시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었다.
만약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미래가 바뀌면 그로서도 답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전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데니스 리와 밀리아머 사이의 연결 커넥션이 이지수 박사란 점.
그 이지수 박사가 전생과는 달리 메이런 프로젝트의 완성 실마리를 발견했다.
밀리아머는 최민혁의 전생과는 다르게 움직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최민혁은 결국 김명준 과장에게 이 내밀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이지수 박사가 지금 진행하는 메이런 프로젝트 가치를 말해주었다.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실장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박도 없이 조용히 사무실을 떠났다.
그는 이미 동선을 알고 있는 이지수 박사의 아버지 데니스 리를 따로 만났다.
감시 및 경호를 하는 인물은 공항 경찰을 이용해서 떼어냈다.
데니스 리만을 따로 만난 것이다.
다행이라면 데니스 리가 김명준 과장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민혁 실장의 선친 최병문 상무와 만나면서 이미 안면이 있었던 것이었다.
“김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맙소사. 설마 김 과장님입니까?”
그로서는 매우 놀랐다.
최병문 상무가 묻힐 때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데니스 리는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과 이지수 박사의 근황을 들었다. 그간 기사를 통해서 가끔 듣던 정보가 아니라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KMBOOK 지분과 같은 부분 말이다.
“…놀랍군요.”
“최민혁 실장님은 과거의 그 최민혁 실장님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최 상무님보다 오히려 더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 중입니다.”
“저도 언론을 통해서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데니스 리도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는 자세한 근황을 몰랐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들의 시선이 최민혁 실장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니스 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제 이지수 박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전 문제는 김명준 과장이 눈앞에 있는 걸로 확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그 자신이었다.
그는 이미 밀리아머에서 손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내밀한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
월가에서 일하다가 밀리아머와 얽히면서 마치 밀리아머 재무 팀 소속처럼 일한 것이었다. 그는 이 내막을 최민혁 실장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김명준 과장 입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메시지만 전했다.
“민혁에게 전해주십시오.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지수를 잘 부탁한다고 말입니다.”
김명준 과장은 예상 밖의 이야기에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죠?”
“후유.”
그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최병문 상무가 가장 믿는 이였다. 더욱이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지만, 최민혁의 측근이었다.
“…자세한 것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면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다만 제가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렇게 시작된 데니스 리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김명준 과장은 어느 정도 데니스 리의 사연을 듣고는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신 자신의 측근 세 사람을 경호원으로 붙여뒀다.
“꼭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지수 박사를 위해서입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가장 믿는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 * *
“최근 진행한 일은 중동 국가 쪽에 무기를 수출한 건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금입니다. 정상적인 채널이 아니었습니다.”
“탈세인가요?”
“그것도 그거지만 무기를 받은 쪽도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이란 같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복잡한 내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네? 그래도 모르니, 혹시 더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중동의 복잡한 정세는 굳이 전생 기억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에 데니스 리가 관련이 있다면 간단히 처리할 수 없다는 것도 파악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어요. 무기 판매는 미국 국방성과 관련되지 않으면 진행하기 힘들어요. 괜히 들쑤시다가 주목만 받습니다.”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최민혁은 9.11 테러,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중에는 음모론도 많았다. 다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본질은 하나였다.
‘무기, 기름, 전쟁, 주식으로 재미를 단단히 봤다는 거지.’
그는 굳이 몇 년 후 미래 일을 두고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하죠. 데니스 리는 따로 인원을 할당해서 보호하세요. 어차피 당장은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분이 살아 있어야 가치가 있거든요. 나머지 일은 지금 진행하는 일을 끝내고 나서 우리 힘을 더 키운 후에 처리해도 됩니다.”
김명준 과장도 데니스 리와 관련된 일이 ‘이지수 박사’에 대한 보험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단순히 경호 인력 외에 밀리아머 쪽도 샅샅이 살펴보세요. 필요하다면 우리 사람을 만들어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그제야 이지수 박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생의 일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이지수 박사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으니까.
‘인질이 가장 확실한 보험이지. 아버지인 데니스 리라면 최고의 대상일 거고.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어. 그 정도로 멍청한 이들은 아니니까.’
다만 데니스 리도 바보는 아니었다. 때문에 납치와 같은 무식한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데니스 리가 잘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족쇄를 거는 것이 훨씬 나았다.
‘월가의 유명한 투자자라고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아는 사실이 진실은 아니었던 거야. 미 국방성도 이지수 박사에 대해서 좀 알았을 수도 있어. 그래서 무리한 제안에 대해서도 들어준 것 같으니, 아무래도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그렇다면…….’
최민혁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이지수 박사가 섣부르게 행동해서 좀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미끼로는 차라리 나았다.
일단 미국 국방성도 곧 보고를 받아서 메이런 프로젝트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될 예정이니, 이 일에 더 탐욕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미국 정부라고 해도 무인 항공기 인공지능 기술에 탐욕을 부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좋아, 딱 좋네.’
* * *
이지수 박사가 수작을 부린 것은 단순히 일부분에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대지 않으면 메이런 프로젝트 자체가 굴러가지 않았다.
반대로 말해서 그녀가 손을 대기만 하면 메이런 프로젝트는 아주 잘 작동한다.
무인 항공기 테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프로젝트가 중지되어 있었지만 이지수 박사가 손을 댄 이후에 일단 KMBOOK 주변 건물 주변을 도는 비행은 순조로웠다.
딱히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첫걸음 정도였다.
테스트는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인 항공기가 한 번 추락할 뻔했다.
메이런 프로젝트 팀은 난리가 났다. 그들은 안 그래도 일정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게 한 터라 문제가 생기도록 놔둘 수가 없었다.
마크 프랭클린 소령은 당연히 미국 국방성에 호출당했다.
카스 프리먼 차관은 단단히 열을 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인공지능 1차 테스트는 성공했다면서? 애니가 살아났다고 보고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멀쩡한 무인 항공기가 추락해?!!”
“…전 애니가 정상적으로 동작만 했다고 보고했습니다만?!”
카스 프리먼 차관은 길길이 날뛰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 그린 시나리오대로 꼼꼼하게 지적했다.
“야, 마크 소령, 너 지금 나랑 맞장이라도 떠보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