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55화 (855/1,021)

#855.

최민혁 역시 그제야 자신이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지수 박사나 헬렌은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자다. 그런 그들이 실수를 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잘 풀어갔으니, 어쩌면 지금까지가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어.’

“IMT-2000이라고 아세요?”

“…글쎄요.”

IMT-2000은 개발 당시 단일화된 세계 통신망이 목적이었다.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포함해서 통신 방식을 정한 것이었다.

아무리 이지수 박사라도 이 용어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지수 박사는 3G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거 혹시 3세대 이동통신 표준을 말하는 겁니까?”

최민혁은 역시 이지수 박사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확실히 3G 망이 있다면 멀티미디어 쪽의 수요는 다르겠어요. 스마트폰에 대한 기대치도 폭발한 것 같고요. 아, 최 실장님이 이제까지 본 시장이 바로 그거였군요.”

이지수 박사는 뒤늦게야 감탄하고 말았다. 그녀 역시 최민혁에게 스마트폰 시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당연하다.

이제 CDMA 시장이 막 만들어지는 시점이다.

영상 통화 기술은 제대로 오버한 셈이다.

최민혁 역시 그 점을 이제 확신했다.

“지금은 CDMA가 우선이니, 대충 3G 망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3세대 이동통신이 있어야 스마트폰 성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있어요.”

“하면 지금 하는 개발은 아예 써먹지 못한다는 건가요?”

“뭐, 부분 기능은 다 써먹을 수가 있죠. KM DVR이 대표적이니까. 스마트폰 선행 기술이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당장이 문제예요. 스마트폰을 써먹을 수 없다면 대안이 필요하니까.”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호출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바로 무인 항공기와 인공지능 미니 드론이었다.

“…혹시 그 대안으로 드론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최민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후보 중의 하나죠.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이번 일에 좀 더 시간 배분을 늘려 주세요. 완성도를 높여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스마트폰 관련 중재는 제가 따로 정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지수 박사는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헬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인공지능 무인 드론보다는 그 기술 자체가 응용 분야가 넓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인공 지능 무인 드론 기술이 안정화되면 그 기술을 다른 분야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쇼에 부합할 수준으로 개발을 진행했다면 이제는 완성도를 올려서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건 일의 성격 자체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인원을 추가하거나 아니면 관련 회사를 인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게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최민혁에게 몇 번이나 조언할까 하다가도 망설였다.

아직은 KMBOOK에서 진행하는 메신저 서비스가 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지수 박사는 그런 일을 천천히 생각했다.

최민혁은 굳이 일일이 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아서 잘하는 이지수 박사의 모습에 만족했다. 그는 대신 한 가지를 다시 당부했다.

“그러니 지금 진행하는 메이런 프로젝트와 인공지능 미니 드론 관련 기술도 처음과는 달리 완성도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처럼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네.”

“다만 상업 드론 관련 기술은 우선 제가 한번 살펴보고 다시 이야기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호출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무실을 떠나자 조성돈 팀장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자신이 실수했다. 그러니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확인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드론 관련 사업 보고는 기획 팀에서 우선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또 다른 실수도 나올 수 있으니까요.”

“…박 차장에게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 * *

박상기 차장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기획 팀을 향해 나 있는 회사 복도를 터벅터벅 걸었다. 오가는 임직원이 아는 척을 해 와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 시선에는 자신을 향한 부러움이 가득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주에는 영국 ARN 본사에 해외 출장을 갔다가 돌아왔다.

ARN과 진행되는 공통 기술과 관련된 업무 조율 때문이었다.

ARN 본사 역시 이전에는 자신을 냉대하기는 했다.

돈 많은 일본 기업가 수준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서 일을 하나씩 처리할 때마다 그들의 시선은 바뀌었다.

변환점은 역시 KM DVR 이후였다.

고성능 ARN 사업부까지 끌어들인 후에는 아예 저자세였다.

박상기 차장 역시 ARN 본사 측의 반복된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문했다.

‘저전력 CPU는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건 아주 신세계였다.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충격을 받은 일은 스마트폰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건 여러 회사에서 전문화된 인력이 다 붙어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그 자신조차 스마트폰 관련 전체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ARN 쪽은 이제 어느 정도 협조가 끝났다.

급한 일은 끝난 셈이다.

오랜만에 가족과 같이 휴가를 갈 꿈에 젖었다.

시차 적응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배종대 과장이 자신을 보자 소리쳤다.

“박 차장님, 빠, 빨리 오십시오!”

“…무슨 일인가?”

“실장님이 미국에서 뭔가를 보내왔습니다!”

“…….”

박상기 차장은 호들갑을 떠는 배종대 과장이 너무 미웠다. 그는 차라리 오늘 휴가나 내고, 좀 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박상기 차장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아예 막무가내로 박상기 차장을 붙잡고 끌었다.

회의실로 말이다.

* * *

회의실에는 기획 팀이 이미 다 모여 있었다.

최근 신입으로 들어온 최승진 외에 무려 네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신병답게 빠릿빠릿한 눈빛을 한 채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최승진은 자신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먼저 들어온 선배라고 그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쳤다.

박광민 사원은 곧 자신이 대리를 단다는 기대 때문인지 무게를 잡았다.

정성근 대리는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택배 물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들 갑자기 미국에서 온 이 물건에 고개를 갸웃했다.

박상기 차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요즘 미국에 가서 제대로 연락도 잘하지 않던 최민혁 실장이 따로 물건을 보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솔직히 내심 최민혁의 행동에 크게 실망했다.

KM 센서 쪽에 KM DVR 아이템을 몰아준 것과는 달리 KM 전자 쪽은 그 어떤 아이템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진지하게 검토 중이었다.

KM 전자 직원도 모이기만 하면 콜린스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 물었다.

그 자신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콜린스 사업부의 성향이 최민혁 실장이 추구하는 사업 방향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대안이 있느냐 하는 거다.

‘스마트폰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스마트폰은 완전히 새로운 사업이다.

아직 시장이 검증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는 최근 ARN를 비롯한 KM 전자 계열사를 돌아다니면서 식견을 키웠다. 그래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다소 걱정스러웠다.

최민혁 실장이 한국에 돌아오면 이 문제를 진지하게 따질까 싶었다.

그런데 오라는 최민혁 실장은 안 오고 달랑 물건 하나만 보낸 셈이었다.

그건 기획 팀 직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불만이 꽤 있는 눈치였다.

박상기 차장은 때마침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최민혁 실장이었다.

[영국 출장은 잘 갔다 오셨습니까?]

[아, 네, 실장님이 세팅을 다 해놓은 덕분에 별일 없이 일 처리를 끝냈습니다. ARN 조직 역시 그렇게 대단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일이 이쪽에서 말해줘야 거기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하면 ARN 쪽은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

[네. 특히 인공지능 분야를 따로 신설해서 우리 쪽과 손발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체계적인 대응이 가능할 겁니다.]

그랬다.

ARN 역시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손발을 맞춘다고 허우적거렸다.

그들도 KM DVR 이전에는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봤다.

그런데 KM DVR 초대박 이후에 태도를 달리했다.

이쪽에 인적 자원을 많이 배당했다.

신규로 뽑은 인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공지능 쪽에 할당했다.

다만 이 인원은 KM DVR 쪽과 서로 겹치는 구석이 많았다.

최민혁은 실장은 비록 국외 전화였지만 분위기를 충분히 파악했다.

[많이 바쁜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죠. 지금 받은 물건은 인공지능 무인 드론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원래는 상업화하기에 무리가 따라서 단순히 연구 쪽으로만 신경 썼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달라져서 판매 쪽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면 새로운 사업부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당장은 우리 KM 전자 다음 먹거리 후보 정도로 생각 중입니다. 물론 그 판단은 기획실 검토를 거쳐서 진행할 일입니다.]

[하면 지금 해야 할 일이…….]

[네. 지금 보낸 샘플을 가지고 한번 사업성을 검토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박상기 차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회의실에 모인 기획 팀의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배종대 과장이 귀를 쫑긋한 채 전화를 듣다가 냉큼 상자를 열었다.

상자 내부는 물품 방지를 위해서 스티로폼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포장지가 벗겨지면서 드러난 것은 여러 가지 서류, 전원 어댑터, 다양한 부품, 반경이 30㎝가 되는 동그란 물체, 여러 가지 부품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서류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물건부터 살폈다.

아니, 그는 다급한 마음에 전원 버튼을 그냥 눌러 버렸다.

LED가 깜빡였고, 그다음에는 둥그런 물체 앞에 달린 3인치 LCD 화면이 밝아졌다.

DOS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자가 쭉 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귀여운 얼굴 아이콘이 떠올랐다.

LCD 화면상에 떠오른 얼굴에는 눈도, 입도 있었다.

그러더니 아이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그다음에는 허공으로 휙 떠올랐다.

“……?!”

배종대 과장은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다가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

다른 기획실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들 경악해서 벽 쪽으로 붙고 말았다.

회의실 중앙에 떠오른 드론은 이리저리 회의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정성근 대리가 그나마 침착하게 들고 있는 설명서를 읽다가 소리쳤다.

[애니?]

시제품 애니는 그제야 정성근 대리에게 휭하니 날아가서 불과 10㎝ 떨어진 거리에서 멈추었다.

[반갑습니다. 전 드론 애니입니다. 사용자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어?]

드론 애니는 다시 질문했다.

[유저 이름은 뭐로 할까요?]

정성근 대리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정성근 대리.]

[등록되었습니다. 무엇을 할까요?]

[으음, 잠깐 대기.]

정성근 대리는 딱 여기까지 하고서야 자신을 째려보는 시선들을 느꼈다. 기획실 직원은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세, 세상에”

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정성근 대리는 센스가 좋아서 그냥 넘겼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KM 전자 기획 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SF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배종대 과장은 생각이 좀 달랐다. 그는 정성근 대리가 멋대로 행동한 것에 반발해서 크게 소리쳤다.

“야, 정 대리, 네 멋대로 사용자 등록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번 일은 과장님이 성급하게 전원을 눌러서 생긴 일 아닙니까. 여기 설명서 보면, 리모컨 버튼을 누른 후에 전원을 눌러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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