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
두 사람은 물끄러미 최민혁 실장이 내민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다.
그런데 확인이 쉽지가 않았다.
당장 가능한 대상이 KD 통신인데, 그들이 이 연구에 투자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KD 통신은 막대한 적자 때문에 연구비를 줄이는 추세였다.
더욱이 무선랜이 가지는 가장 큰 한계가 존재했다.
애초에 무선랜은 유선랜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다음은 서비스 범위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단점을 극복할 만한 서비스 요금 장점이 있었다.
이는 신기섭 실장도 잘 아는 부분이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이 내민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살펴야 했다. 아무리 봐도 그럴듯하기는 했다.
최민혁의 전생 기억으로는 실제로 몇 년 후에 이쪽으로 연구하는 업체도 있기 때문이다.
‘쫄딱 망하지만.’
딱히 이 연구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CDMA 서비스 기술 발전이 너무 빨랐다는 것이 정확했다.
최민혁은 때문에 IP 시티폰 서비스가 가지는 장점과 기술까지 섞어서 감언이설을 했다. 그는 물론 그냥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1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네?”
“아, 1차로 하는 투자입니다. 투자 성과를 보고 2차 투자 규모를 결정하겠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주로 소프트웨어 관점에서 진행하는 연구였다.
핸드오프 역시 소프트웨어적인 방식은 있으니까.
이를 기반으로 해서 나머지 기술을 응용하라는 요구였다.
신기섭 박사도 크게 당황했다.
“…이건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전 신기섭 박사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신 박사님이라면 제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신 박사님과 제가 손을 잡는 일입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신기섭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자신에 대한 태도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것 참 당황스럽네.’
* * *
신기섭 실장은 정기섭 박사를 비롯한 자기 측근을 불러 모아서 협의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성과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가능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정말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아니, 설사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그의 아이디어를 이용하자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제안과 기술입니다. 절대로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이전 결과가 그걸 증명합니다.”
“그거야 그렇지.”
“아니, 이번 일을 놓치면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오현종 박사가 우리 연구 팀을 실속이 없는 팀이라고 회식 자리에서 대놓고 비웃었습니다.”
최근 오현종 박사는 최민혁 실장 지시를 받아서 신기섭 박사 팀을 대놓고 비웃었다. 회식 자리에서 아예 작정하고 신기섭 연구 팀을 깐 것이다.
사소한 것 같아도 모욕적인 언사였다.
신기섭 실장은 내심 이를 갈았다. 다만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이 문제였다. 그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왠지 걸리는 문제를 발견했다.
무선랜이 가지는 불안정성과 음성 통화는 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불완전한 부분은 그 역시 나름의 연구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보고서에는 그 부분이 다소 부족했다.
수치상으로 표현할 때는 대략 90% 남짓했다.
이 10% 수치가 작은 것 같지만 실상 소비자가 불만을 요구하는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도 이건 대기업과의 협업을 통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신기섭 실장은 선뜻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지는 못했지만, 또한 거절하지도 못했다.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아서 성공하지 않은 엔지니어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제안이 없던 것이 된다면 그 자신은 진짜 무능한 이로 낙인찍힌다.
차라리 최민혁 실장과 협상하지 않은 것만 못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연구진 내에서 반발하는 이들이 나올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의 입지에 정말 안 좋은 일이었다.
‘아뿔싸.’
그는 다급하게 정기섭 박사를 불러 입단속을 하라고 지시했다.
“네? 이미 다 알 겁니다.”
“젠장.”
입 싼 측근이 그사이를 참지 못해서 미주알고주알 다 퍼뜨렸다.
이제는 자신이 이 일을 먼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기업이 미래 기술이다. 이들은 허접한 전자 부품 연구소의 허종진 팀장 도움을 받아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신기섭 실장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할 때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았다.
다름 아닌 최문경 부회장과 권재홍 비서실장이었다.
두 사람이 경호원 열 명을 거느린 채 그 자신을 찾은 것이었다.
이들은 물론 최민혁 실장의 동선을 파악하자 바로 즉시 ETRI를 방문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번 KD 통신, KD LCD의 최용욱 회장 지분 매각 건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였다.
신기섭 실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방문에 크게 당황했다.
“…최문경 부회장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피로에 절어 있는 최문경 부회장은 신기섭 실장의 아부를 무시했다.
“신 박사님의 명성은 잘 압니다. 굳이 그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그냥 생각 없이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네?”
그는 크게 당황했다. 이제까지 대기업과 협업하면서 고위직 인물을 많이 만나기는 했지만 그 최대 선이 고작 사장 정도였다.
지금껏 부회장이나 되는 거물을 만난 적은 없었다.
대체 뭔가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이틀 전에 박사님이 제 조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조카라면…….”
“민혁 말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더 익숙합니까?”
신기섭 실장도 깜짝 놀랐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은 과학계의 히어로였다. 이 영향력이 너무 커서 KM 그룹과는 바로 연관시키지 못했다.
‘아, 맞아.’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너무 빠르게 바뀌면서 일어난 인지 부조화였다.
“아, 최민혁 실장이 부회장님의 친조카였습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아, 그랬군요. 어째 최민혁 실장이란 소리가 입에 익다고 생각했는데, KM 전자의 기획실장이었군요.”
KM 그룹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신기섭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최문경 부회장은 신기섭 실장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았다. 지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례되는 이야기입니다만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네? 그건…….”
“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제가 KD 통신 대주주 중의 한 사람입니다.”
“아, 네? 네!”
그는 화들짝 놀랐다. KD 통신 경영진은 몰라도 실무진 선과는 협업 때문에 안면이 있었다. 즉 투자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하긴 KD 통신 자금을 나누어서 냈다고 했지. 여러 기업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오성 전자 역시 지분 투자를 했잖아.’
신기섭 박사는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에게 몇 마디 더 듣고서야 그가 원하는 것이 최민혁 실장에 대한 정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그 나름대로 이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뱀처럼 눈을 굴리는 신기섭 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평판에 대한 것은 충분히 조사해서 아는 터라 더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혁이가 한 제안을 듣고 싶습니다. 그 녀석이 내성적이라서 저에게는 잘 이야기를 안 합니다. KD 통신 투자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라서 양해를 부탁합니다.”
신기섭 박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의 뇌 구조는 단순했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서 자금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님이 100억을 제안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순간 기가 막혀서 폭발하려고 했다.
다급히 이걸 막은 사람은 권재홍 비서실장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무선랜 쪽에 하는 사업이 없어요. 차라리 우리 KD 통신이 신 박사가 하는 일과 연관됩니다.”
신기섭 박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믿었다. 더욱이 그는 이들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다행히 그는 최민혁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 사이에 경영권 갈등에 관한 기사를 떠올렸다.
‘아하.’
그제야 상황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는 넌지시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을 차분하게 늘어놓았다.
물론 전부 다 말하진 않았다.
다만 그 일부만으로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 하면 무선랜 기술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기섭 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건 그도 알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런데 물주를 앞에 두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도 실제로 테스트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불행히도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투자자를 앞에 두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신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내세웠다.
“뭐, 최민혁 실장이 고안한 기술인데, 어지간히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늘 당해왔던 그 방식이었다. 정말 뼈에 사무치게 당했던 그 방식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사실 아직 확인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만 기존 기술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아이디어이니까요.”
최문경 부회장과 권재홍 비서실장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들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안 것이었다.
실상 이런 일은 수십 번도 더 있었다.
그들은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다행히 그들이 한 걸음 더 빨랐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슬쩍 나섰다.
“200억이면 되겠습니까?”
“네?”
신기섭 박사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지는 몰랐다.
최문경 부회장이 슬쩍 나섰다.
“250억입니다.”
“조, 좋습니다.”
신기섭 실장은 결국 두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최민혁 실장의 아이디어가 잘될 것이라 확신했다.
‘틀림없이 잘될 거야.’
* * *
최문경 부회장은 일단 신기섭 실장과 계약 체결을 한 이후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리스크였다.
정확히는 최민혁의 술수에 말려서 무리한 투자를 한 탓에 자금 상황을 걱정했다.
더욱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틀어진 관계도 문제고 말이다.
“가만, 이번 일은 무리수를 두지 말자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해. 이렇게 하지. 샐로먼 브러더스에게 지분 일부를 넘기는 것은 어떨까?”
“네? 진심입니까?”
“뭐, 대안이 없잖아. 아버지도 이 제안을 무조건 거절하지는 못할 거야. 공평성 문제이니까. 거기에 두 회사 사정이 지금 좋지 않은 것도 있지. 리스크를 고려하면 샐로먼 브러더스가 더 나은 상대지.”
“샐로먼 브러더스가 받으려고 할까요?”
“걔들 생각도 나와 비슷할 거야. 민혁이 그놈에게 이를 갈고 있으니까. 아마 아버지 지분이 민혁이 그놈에게 넘어가는 것은 절대로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정 뭐하면 신기섭 박사가 진행하는 성과물을 보여주면 되겠지. 민혁이 그놈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말하면 좀 달라질 거야. 다만 바로는 그렇지.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아, 장 실장이 좋겠어.”
“…알겠습니다. 제가 회장님, 아니, 장승일 실장을 만나서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도 이번 일에는 직접 나서지 않기로 했다.
이런저런 변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네놈 뜻대로 안 될 거다!’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이번에 최민혁 실장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면 초로또 대박이었다.
그야말로 장밋빛 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