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42화 (839/1,021)

#842.

김기범은 1심에서 보석으로 풀려났고,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DL 그룹 법무 팀이 손을 썼다.

그는 요즘 들어서 자신을 냉대하는 아버지 김용만 전무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방에 갔다 온 이후에 시선이 다들 달라졌기 때문이다.

최민수는 김기범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화급하게 부인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너도 날 우습게 보냐? 진영, 이 개새끼가 헛소리해서 손을 좀 봤는데, 하, 정말 사람 비참하네.”

김기범은 감옥에 있을 때보다 살이 더 쪄서 분노한 멧돼지 같았다.

그 위세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최민수는 김기범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 정말 아니라니까요.”

“이 새끼가 진짜 해보자는 거야? 나 아직 안 죽었어. 너, 내 말 한마디면, DL 그룹에 얼씬도 못 해. 솔직히 너를 도와준 곳은 본가인 KM 그룹이 아니라 외가인 DL 그룹이었어. 사람이 새끼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알아봤는데, 네가 일을 못해서 쫓겨난 거잖아!”

최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보통 재벌 3세와는 다른 비참한 대우 때문이다. 사실 최민혁만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하세요.”

김기범도 그제야 이 정도로 끝냈다. 그는 최민수의 반응이 달라진 것을 보자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 얘기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솔직히 형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왔는데, 도저히 대화할 수가 없네요!”

그래도 김기범이 최민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역시 최근 KM 그룹 내부에서 도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민혁이 그 새끼가 관련된 건가? 가만, 아버지가 전화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최민혁이 갑자기 국내에 복귀한 걸 두고 DL 그룹 내에서 말들이 많았다.

실상 DL 그룹 본사가 발칵 뒤집혔다.

DL 그룹 본사 차원에서 아예 최민혁 팀을 따로 꾸려서 움직인 것이었다.

방금 최민수를 갈군 데에는 그 탓도 있었다.

다행히 최민수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오해한 것 같은데, 일단 앉아 봐.”

“아, 됐다니까요.”

최민수는 갑자기 삐쳐서 아예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김기범이 그제야 그의 손을 잡아서 일단 자리에 앉혔다.

최민수는 기대한 것과는 다른 김기범의 모습에 크게 실망해서 계속 일어나려고 했다. 그가 그러다가 본 것은 최민혁 실장의 전신이 나와 있는 초대형 광고 패널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우리 한국대를 빛낸 현시대 최고의 영웅이다!]

거기엔 최민혁 실장이 집게손가락으로 디지털 세상을 가리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광고 한쪽에는 디지털 세상을 상징적으로 그려놓은 미래 도시도 있었다.

최민혁 실장 손짓을 따라서 새로운 첨단 기술의 심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초대형 사진은 한국대 내의 공과대학 건물 한 면을 다 가렸다.

건물 곳곳에 설치된 작은 광고에도 최민혁 실장의 영웅기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씨발.’

최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김기범 손에 마지못한 듯 앉고 말았다.

김기범 역시 혀를 찼다.

“너 아직 민혁 그 새끼 영향력을 모르는구나. 한국대는 이미 그 새끼 손아귀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야. 난 정말 역겨워서 여기 오기 싫다.”

최민수는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하, 알았어요. 사실 고민거리가 있는데…….”

김기범은 그제야 귀를 쫑긋한 채 최민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 *

최민혁 실장은 김명수 과장에게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한국대로 차를 몰았다.

다만 그도 최근 자신의 인기를 의식해서 평소에 입던 옷과는 다른 대학생 옷을 입었다.

흔히 입는 티에, 청바지를 걸쳤다.

메이커도 없는 옷이다.

이런 옷을 최민혁 자신이 입는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김명준 과장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더니 슬쩍 다른 옷을 제안해 보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전생의 기억 때문에 자기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한국대 입구에서 일단 내렸다.

괜한 시설을 끌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최민혁 자신도 입구에 있던 최민혁 실장에 대한 초대형 사진을 보고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귀환 최민혁 실장!]

‘앗, 깜짝이야!’

최민혁 자신은 한국대에 휴학계를 내고 관심을 끊었다.

그런데 한국대는 생각이 좀 다른가 보다.

그는 결국 슬그머니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착용한 채 몸을 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대에 들어간 이후에 여기저기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광고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최민혁 실장 그를 배우자!]

[최민혁 실장은 기존 구 재벌 3세와는 다르다!]

[최민혁 실장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최민혁 실장은 정말 조용히 살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신비주의를 내세워서 자신의 이미지를 개혁할 것일까?]

[최민혁 실장의 이미지를 이용한 기업 홍보 방법!]

“…….”

최민혁 실장은 한동안 자신의 광고 사진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이미지 때문에 대학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국대생의 최민혁 실장 사랑은 마치 히틀러를 떠올리게 했다.

김명준 과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기획실에서 몇 번 이야기를 해봤는데, 기업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으로 했습니다. 더욱이 회사 차원에서 손을 댈 수가 없는 일이라서.”

“…괜찮아요.”

최민혁 실장은 대신 걸음 속도를 올렸다. 그가 김명준 과장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이 바로 김기범과 최민수가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한국대 내에 있는 구석 벤치였다.

“여어, 민수형, 안녕, 여기 있었네. 안 그래도 대학교에 일이 있어서 찾았는데, 우리 인연 아닌가?”

손을 흔드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은 다른 한국대 재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가는 재학생 중에는 뒤늦게 스쳐 지나가는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일상복을 입은 최민혁 실장을 바로 알아본 이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사에서 최민혁 사진을 올릴 때는 정장을 입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초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에서도 역시 최민혁 실장은 주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대학생 모습을 풍긴 사진은 없었다.

그리고 자기들 강의 시간이 바쁜 것도 있고 말이다.

더욱이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바로 최민수를 설득하던 김기범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검지손가락으로 최민혁 삿대질까지 했다.

“너, 너, 최, 최민혁, 이 쓰레…….”

하지만 그는 말을 하다가도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제야 최민혁이 과거의 그 최민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일단 한국대 분위기.

최민혁 실장은 한국대에서 신화를 창조한 영웅이었다.

거기에 현실적인 면을 무시하기 힘들다.

에플 지분을 매각해서 만든 2조 6천억.

ARN 지분을 매각해서 번 15억 달러면 충분했다.

최민혁은 물론 김기범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안 그래도 DL 그룹 쪽에 정보를 흘리고 싶었다. 카더라 정보보다는 스킨십으로 말이다.

일단 자극이 먼저였다.

“어, 기범이 형 아냐? 감방에 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벌써 나온 거야?”

김기범은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까지 했다.

“이 개새… 어, 그, 그게, 변, 변호사를 써서 푸, 풀려났어.”

“비싼 전관 변호사를 썼나 보네.”

“그… 래.”

최민혁은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김기범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김기범도 이전과는 바뀐 거 같았다.

‘하긴 감방에 갔다 왔으니.’

그는 이제 김기범이 집행 유예로 풀려났든, 아니면 무죄 판결을 받았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김기범을 이용할 생각만 했다.

‘내가 노리는 것은 DL 그룹이니까. 이미 작업도 잘 진행 중이지.’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은 아직도 이성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DL 그룹이 그럴까는 의문이었다.

‘김상구 회장이 그냥 자리만 지킬 리는 없지. 워낙에 투자한 금액이 많으니까.’

“민수형, 이야기 좀 하자. 지분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그래.”

대답한 쪽은 오히려 김기범이었다.

“지, 지분이라니?”

“형에게 남의 집안일을 말할 수는 없잖아?”

“…알았다.”

김기범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일단 참기는 참은 것이었다. 굳이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최민혁의 말에서 뭔가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그렇다고 순순히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걸어가는 척하면서도 시선을 계속 돌렸다. 기회만 있다면 붙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굳이 자신이 여기서 더 작업 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힐끗 눈알을 열심히 굴리는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지분 일 때문에 김기범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제대로 된 사실을 다 말하지 않겠지만, 조언을 구하기는 좋았다.

‘역시 이 계획이 좋아. 굳이 손을 복잡하게 쓸 필요가 없잖아?’

두 사람의 집착이라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일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특히 자신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김기범은 말이다.

‘보자, 그래도 일을 해야지. 어떻게 작업 쳐야 할지 그게 더 중요하겠지.’

* * *

최민혁은 넌지시 최민수에게 지분 관련된 이야기를 말했다. 아직도 떠나지 않는 김기범에게는 ‘형, 너무 많이 알면 다쳐!’란 이야기를 계속했다.

KD 통신이나 KD LCD 지분 말이다.

흘러가는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김여정이 이 두 회사의 지분 증여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답이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저런, 그런 문제가 있구나. 난 둘째 큰어머니가 지분 증여를 반대할 줄은 몰랐어. 이거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아, 아냐, 그런 뜻은 아냐. 단지 어머니의 뜻은 안정적인 회사 지분을 확보하고 싶을 뿐이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세상 일이 안 쉬워.”

“아니, 민혁아, 너라면 어느 정도 조율을 해줄 수 있잖아?”

최민혁은 혀를 찼다.

“형, 나 바빠. 지금도 형을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시간을 낸 거야.”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최민수는 식은땀을 절절 흘렸다.

최민혁은 최민수의 태도에 만족했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한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하자 안부 인사만 하고는 훌쩍 떠나고 말았다.

“형, 다음 가족 식사 시간에 보자.”

김기범은 최민혁이 떠나자 최민수 눈치를 보면서 일단 기다렸다. 그는 최민혁에게 이야기를 듣고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았다.

그는 당황한 최민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야기를 한 번 해봐. 필요하다면 나도 도울 테니까. 더욱이 KD 통신, KD LCD라면 우리 DL 그룹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가 대주주라는 사실을 잊지 마!”

최민수는 결국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민혁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점까지 다 토로했다.

김기범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정말이야?”

“하지만 두 회사 다 재정 상태가 안 좋잖아. 그래서 엄마가 맹렬하게 반대해.”

김기범은 당연히 발끈했다.

“야, 너 말 함부로 한다. 그 두 회사 대주주가 바로 우리 DL 그룹이야! 그런데 이 새끼야, 네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최민수는 핏발이 선 김기범의 목소리에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야.”

“그러면 무슨 의도로 한 말인데? 민수 이 새끼, 너 간이 많이 부었다.”

“정말 아니라니까!”

최민수는 크게 당황해서 결국 사과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기범에게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최민수의 주리를 틀었다. 최민혁이 말한 것을 토대로 한 이야기였다. 최민수는 결국 숨겼던 이야기마저 다 말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 내용은 김기범에게도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두 회사의 지분과 관련된 이야기에 배가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씨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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