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
그가 원한 것은 이런 일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인공지능 무선 드론 개발을 위한 군용 드론 기술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잘 이용하면 쇼용 인공지능 무인 드론 기술을 확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 조루 미니 드론이 아니라 쓸 만한 수준의 미니 드론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샐로먼 브러더스 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 자신이 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샐로먼 브러더스를 타격하는 일이니까.
‘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으니.’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다.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든지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한 가지 문제를 더 걱정했다.
지금 자신은 미국 정부를 이용하기 위해서 너무 깊이 미국 정부의 일에 손을 댔다.
이건 그 자신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IMF가 정말 걱정이다. 싫든 좋든 IMF 일에 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정확히는 최민혁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했다.
그가 가진 자본과 기술이 문제였으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IMF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봐야 사람들이 믿지 않겠지. 그게 사실 더 큰 문제야. 그렇다면 차라리 합리적인 선까지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만 어느 정도가 효율적인지는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재정경제원 내부 일에도 손을 써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재정경제원 애들이 원하는 이상 나도 끝까지 갈 수밖에 없어. 이쪽 내부도 한번 살펴봐야겠어.’
* * *
최민혁 실장은 이전에도 말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환채 차관이 굳이 최민혁 실장의 일에 끼어들지 않은 이유는 최용욱 회장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알아서 고위 관료를 만나서 기름칠했다.
실상 이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국세청 일도 그랬다.
이것 역시 행정부가 먼저 나서서 최민혁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해 당사자끼리 살짝 갈등이 있었던 것뿐이니 말이다.
서로 어느 정도 타협을 본 이상 더 끼어들기에는 어려웠다.
이때는 최민혁 실장이 한창 무서울 정도로 영향력을 키울 때였다.
하지만 최근 일은 좀 달랐다.
최민혁 실장이 미국 재무부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ARN 지분 매각에 왜 그렇게 많은 투자 은행이 연루되었는지.
심지어 오성 그룹은 왜 최민혁 실장에게 저자세인지 같은 일들 말이다.
심지어 안건민 회장의 행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환이 될 싹을 밟아버릴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데릭 모건 이사라니.
‘아, 갑자기는 아닌가. 최문경 부회장과의 대립 때문에 샐로먼 브러더스와 갈등이 있다고 했으니.’
이환채 차관은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고서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윗선 분위기도 안 좋아.’
사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후환 때문이었다.
누군가 먼저 총대를 메야 했다.
다만 그라고 해서 이 일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서 부총리겸 재정경제원 장관인 김웅배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봤다.
[최민혁 실장? 글쎄.]
실로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다.
최민혁 실장의 명성은 몇 달 전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최근 미국에 가서 영향력을 넓힌 이후에는 더 달랐다.
지금까지는 국내에서 유명한 기업가였다면, 이제는 글로벌 기업가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재무부 미팅을 한 후에 최민혁 실장은 오히려 더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주지사를 만나서 투자 약속도 잡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일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환채 차관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지만, 답을 듣지는 못했다.
김웅배 장관은 국무회의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떠나 버렸다.
[난 잘 모르겠네.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지. 지금은 필리핀 인사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일을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설마 일이 터지면 나보고 다 책임지고 뒤집어쓰라는 소리일까?’
그랬다.
이제까지 한국 행정부 내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나왔다.
최민혁 실장 관련 사안을 공식적으로 보고해도 답이 없었다.
즉, 이건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이환채 차관은 결국 성환수 보좌관에게 지시해서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아는 인물을 불렀다.
그런데 상대는 뜻밖에도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과 조동선 과장이었다.
“…음.”
이환채 차관은 두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고는 눈살부터 찌푸렸다.
최근 말도 안 되는 글로벌 X 리포터라는 보고서를 올린 인물들이었다.
사실 그도 처음에는 보고서 내용이 워낙에 그럴듯해서 놀라기는 했다.
그런데 예언서에 가까운 보고서 따위를 파고들 수는 없었다.
“…….”
김우석 심의관은 이환채 차관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올린 글로벌 X 리포트가 조용히 씹혔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나서서 설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 같지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에게 미안하네.’
물론 최민혁 실장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다 알았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남 좋은 일을 시킨 것은 글로벌 X 리포트를 통해 그나마 안목이 있는 공무원 몇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IMF에 대한 대비로써 말이다.
겸사겸사 최민혁 실장 자신에 대한 평판도 키우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씨앗을 뿌려놓아야 나중에 적절한 핑계를 댈 수가 있었다.
[제가 이미 IMF 리스크를 알렸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제가 당시 얘기했던 내용은 사전 정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IMF 대응책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습니다. 정말 모릅니다!]
요렇게 대답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미래까지는 잘 모르는 이환채 차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심의관이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안다고?”
김우석 심의관은 흠칫 놀랐다. 그는 혹시 휴가 내서 최민혁 실장을 만난 것 때문에 불려온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래도 공무원과 사업가가 사적으로 만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면 업데이트된 X 리포트를 굳이 공식적인 채널로 보고할 수가 없잖아. 그 일 때문에 다들 당황했어.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라서.”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결국 계속해서 커졌다.
이환채 차관은 결국 두 사람을 내쫓아 버렸다.
“당장 나가!”
* * *
최민혁이 딱히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우석 심의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져서 고민 중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네?]
[국가 일은 한 개인에 의해서 결정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이 보여주신 선의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최민혁은 내심 비웃고 말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선의 따위가 아니었다.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과 직후에 자신이 얻을 이익에 대한 명분이 필요할 뿐이었다.
사전에 이렇게 약을 쳐놓았으니, 자신을 비난할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물밑에서 IMF를 이용해서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를 아주 결딴낼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정경제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기업가입니다. 가능한 냉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정 그러면 위기에 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한 방파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물론 윗선이 어느 정도 수용할 조치를 해야겠죠. 이왕이면 행정부 내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도 좋습니다.]
[그들이 믿을지 걱정입니다.]
[굳이 그런 점을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주식 시장 개방과 관련해서 생길 부작용을 언급하고, 여기에 대한 규제를 추가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미 외국인 투자에 대한 대응책은 정부에서도 살펴보는 중이다.
다만 외국인 투자 한도를 무조건 폐지하자는 의견이 강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 부분은 증시안정기금과 관련해서 손을 쓸 방법이 많았다.
최민혁은 굳이 지금 진행 중인 무리한 정책을 막기보다는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런 정보는 그의 전생 기억에 제법 잘 나와 있었다.
[…정말 잘 아시네요. 오히려 저보다 더 행정 전문가 같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보세요. 이환채 차관도 결국 전문가를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실제로 글로벌 X 리포트 내용 자체는 대부분 최민혁이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가리키는 바가 문제였다.
만약 이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지금 행정부는 그만한 책임을 져야 했다.
차라리 보고서를 보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보고도 모른 척하기에는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다들 쉬쉬했다.
김우석 심의관 역시 글로벌 X 리포트를 다시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정말 놀랍구나. 보면 볼수록 새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글로벌 X 리포트는 다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그 본질을 알기가 쉽지가 않았다. 심지어 미래에 일어난 일도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환채 차관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김우석 심의관을 다시 호출하고 말았다.
“자네, 지금과 같은 행동은 곤란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은 최소한 최민혁 실장에게 확인했을 것 아닌가!!”
“X 리포트를 쓴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고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이환채 차관은 손짓으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미 파다한 이야기잖아. X 리포트가 세상에 나온 후에 말이 많았어. 그런데 돌아가는 스토리를 잘 보면 이 때문에 이익을 본 사람이 최민혁 실장뿐이잖아.”
실제로 그랬다.
X 리포트는 단순히 한국 경제 몰락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 경제를 위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최민혁 실장의 행보였다.
그는 X 리포트가 그리는 미래 로드맵대로 움직였다.
이런 결과론은 ARN 지분 매각 이후에 나온 이야기였다.
특히 KM DVR이 초대박을 친 이후에 하나의 일관성 있는 흐름이 되었다.
김우석 심의관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관심을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최민혁 실장의 초대에 순순히 응한 것도 마찬가지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 X 리포트가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찌라시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출처가 확인도 안 된 X 리포트를 행정부에서 직접 참조하자고? 그건 지금도 죽어라 일하는 한국 공무원을 무시하는 말이야. 자네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아, 좋아,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하지만 그 일이 중요합니다. 당장 지금도 이미 많이 늦었습…….”
“왜, 한국 경제가 파산할 거라고? 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자. 아, 생각해 보니, 미국 행보도 X 리포트 때문이었어? 최민혁 실장 말이야. 도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건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채널로 이상한 이야기가 계속 들어와. 미국 재무부 미팅이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속된 말로 우리 쪽에서 최민혁 실장에게 손을 쓰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어.”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이상하기는 하지. 글로벌 X 리포트는 미국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아, 아닐…….”
이환채 차관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만약 글로벌 X 리포트처럼 한국 경제가 폭삭 망했을 때 이익을 볼 이들 중의 하나가 미국 정부였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일단 김우석 심의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김우석 국제경제 심의관은 마치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 글로벌 X 리포트에 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