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
그가 하려면 하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우석 심의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옆에서 눈치를 보는 조동석 과장 역시 크게 당황했다. 두 사람은 다른 고위 공무원과는 달리 한국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위기 상황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를 모를 뿐이다.
일테면 이론적으로 몇 가지 가정할 때 한국 경제는 수렁으로 빠진다 설이다.
그런데 이 바탕에는 작년 무역수지 적자인 110억 달러와 같은 데이터가 있다.
문제는 이 안을 들여다보면, 일본 엔화 고평가에 따른 수출 증대에도 무역수지 적자가 어마어마하다는 점이다.
이 원인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농축산물을 비롯한 소비재 물품을 마구잡이로 수입한 것이 있다.
김우석 심의관은 당장 한국 경제에 내재한 문제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자, 자세히 말씀을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두 분 태도에 달려 있어요. 설마 뇌물 따위나 애국심 따위를 빌미로 내세울 목적으로 이 자리에 오셨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최민혁의 말은 그들에게 고위 공무원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최민혁의 이런 행보는 이질적이었다.
“…….”
김우석 심의관은 자신이 아는 최민혁 실장인가 의심스러웠지만, 곧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은 이제 한국에 있을 때의 그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한 최민혁 실장의 말에 잠깐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힐끗 조동석 과장을 쳐다보았다. 조동석 과장은 바로 얼굴을 아래위로 끄덕였다.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투자의 신으로 불리는 최민혁 실장의 견해라면 자신이 미처 간과한 부분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늘공답게 최민혁 실장이 우선 원하는 것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때문에 이미 언론에서 주목하는 이슈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시작은 지방 저축 은행과 지방 건축 업체의 파산에 대해서…….”
최민혁은 경고도 아끼지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KM 전자까지 직접 찾아와서 경고까지 하신 김우석 심의관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핵심만 말씀하란 말입니다!”
김우석 심의관은 순간 갈등했다. 이제까지 그 어떤 기업인도 최민혁 실장처럼 대놓고 돌직구를 날린 적은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뇌물을 서로 주고받는 긴밀한 사이 정도일까.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다른 공무원보다 잘 알았다.
그는 지방으로 좌천된 후에도 지방 경제에 대해서 세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다시 재정경제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한국 경제 전반을 분석했다.
그 결과를 재정경제원 윗선에 다 보고했다.
물론 들은 대답은 없었다.
사실 그로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최민혁 실장의 미국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한국 경제 상황이 좋지가 않습니다. 특히 실무진 선에서는 우려가 큽니다. 당장 단적인 예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외화 보유액입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1년 단기 자금도 꽤 많습니다.”
그는 슬쩍 조동석 과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동석 과장 역시 그와 손발이 맞았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한 서류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외화 보유액에 대한 분석 자료였다. 그런데 이 자료는 단순히 그 자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 외환 자금 흐름과 연동시켜서 검토한 것이었다.
주 자금 흐름은 지방 경제를 기반으로 했다.
최근 재정경제원에 복귀한 후에 수도권 자금을 추가해서 불과 지난주에 완성했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외환 자금의 흐름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설계도나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이 자료를 보고 나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 * *
최민혁은 굳이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김우석 심의관 쪽이 아니었다. 이미 확인하고 싶은 다 확인했다.
지금 정부는 꽤 완고한 성향이 있는 정부였다.
오로지 자신이 옳고, 타인은 다르다고 밀어붙이는 그런 조직 말이다.
그는 때문에 이지수 박사에게 부탁한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확인했다.
이지수 박사는 다소 난감한 얼굴이었다.
“생각보다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인터페이스 자체가 기존에 했던 프로젝트 기반인데, 자칫하면 특허 침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국방성에서 한 프로젝트의 주인이 미국 국방성이라서 그런 겁니까?”
“아뇨. 밀리아머라는 방산업체 소유입니다.”
밀리아머는 전 세계에서도 규모가 꽤 큰 기업으로, 무기와 특수 군사 장비를 포함해서 미국 정부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방산업체이다.
이 회사는 민간 부문 곳곳에 손을 뻗쳐서 악명이 높기도 하다.
다만 고객을 위해서는 최신 장비와 전문 요원을 투입한다.
단순한 무기 제조만이 아니라 민간 용병 계약도 같이한다.
미국 국내만이 아니라 글로벌적으로 활동하는데, 심지어 암살까지 진행한다.
여기에 기업 보안 유지 부분까지 할 정도였다.
최민혁은 ‘밀리아머’란 말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테일러 박사를 조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군사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일러 박사 부친이 밀리아머의 사장인 윌리엄입니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괜한 일에 엮일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결국 문제가 생길 겁니다.”
“네?”
데니스 리의 죽음.
최민혁 실장과 이지수 박사의 인간관계가 시작하는 계기가 된 이벤트였다.
최민혁 실장은 이지수 박사의 부친인 데니스 리의 죽음이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고 추측했다. 그도 지금까지 이영민에 대해서는 긴 시간을 가지고 조사했고, 심지어 전생의 자료까지 찾아봤다.
그 결과로 알게 된 것은 데니스 리가 밀리아머와도 관련이 있다는 거다.
바로 밀리아머 자금을 운용한 사람 중의 하나가 데니스 리였다.
그런데 이 일조차 단순히 고객과 영업 사원의 관계로 볼 수는 없었다.
테일러 박사가 이지수 박사와 관계가 틀어진 다음부터 거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전생 기억에서도 이 내용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미국 언론에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봐야 해.’
최민혁은 미안한 얼굴을 한 이지수 박사를 보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지수 박사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김명준 과장에게 KM 시큐리티 인력과 시설을 더 투자하라고 지시하고 나서 말이다.
김명준 과장은 ‘추가로 2억 달러를 더 투자하란 말입니까? 아니, 전쟁이라도 할 생각입니까?’라고 눈빛으로 말하면서도 최민혁의 지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물론 김우석 심의관을 지금 시점에 잘 호출했다고 생각했다.
‘왠지 이 일에 관한 확인 작업이 꼭 필요한 것 같으니.’
* * *
글로벌 X 리포트를 확인한 김우석 심의관은 지금과는 달리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 앞에서 망설이기 시작했다.
처음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최민혁은 굳이 상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실 우려스러운 점은 몇몇 연결 고리가 외부에서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
최민혁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깜짝 놀랐다.
그는 재정경제부 내의 실무진이 외화 보유액의 위험성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을지는 몰랐다. 전생 1회 차 기억과는 너무 달랐다.
‘나 때문에 생긴 변화일까?’
그랬다.
최민혁 실장의 예측은 다르지 않았다.
김우석 심의관이 이 사실을 알게 된 동기 자체는 최민혁 실장 자신 때문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외국에서 투자하는 자금 흐름까지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안 사실이었다.
최민혁 자신이 미래를 뒤틀지 않았다면 이 보고서는 탄생조차 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재무부가 자신을 주목하는데, 한국 재정경제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뭐, 디테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굳이 한국 정부가 자신을 노리느냐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재정경제원 고위 관료나 다른 정부 기관에서 조용히 있지 않을 텐데요?”
“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경계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아무런 반응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선출직 공무원은 여론을 의식해서 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특히 지금의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강박 의식에 사로잡혀서 무리수를 마구잡이로 던집니다. 설사 그 답이 맞는 정책이라고 해도 아직 우리에게는 맞지 않은 조치가 태반입니다.”
결과는 이 보고서의 가정과 아주 이상적으로 잘 맞아들어 갔다.
마치 기름통을 들고 화재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입을 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번 열린 입은 그렇지가 않았다.
김우석 심의관은 이제까지 가슴속에 꼭꼭 숨겨둔 진실을 마구잡이로 떠들었다.
“사실 이런 현실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의식입니다. 적자 규모가 작년 대비 35% 가까이 늘었는데, 다들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옆에서 두 사람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는 조동석 과장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포도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는 그 맛에 반해서 포도주에 푹 빠져 버렸다.
“…….”
최민혁은 묵묵히 김우석 심의관의 말을 들으면서 보고서를 살폈다. 내심 감탄했다. 상대가 이 정도 안목을 가졌을지는 몰랐다.
자신의 예측보다는 더 똑똑한 인물이었다.
‘하긴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지.’
공무원 모두가 상명하복하는 이는 아니었다.
공무원 중에는 자기 신념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다.
실제로 윗선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도 바른 소리를 하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물론 김우석 심의관에게 동조해서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한국 정부가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재정경제부의 능력, 비전, 잠재력을 어느 정도 계산을 해야 거기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IMF는 일어나. 다만 전생과는 좀 다른 IMF가 될 수도 있겠어.’
그리고 이건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테면 최민혁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실업자 숫자 300만 명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실업자가 600만 명, 아니, 900만 명으로 늘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넘어가자.
자칫하면 KM 전자 주가가 폭락할 수도 있었다.
‘으음, 이건 곤란하지.’
IMF 이후에 한국 내에 외환 자금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져나갈 것이다. 아니, 헤지펀드가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KM 그룹 주가는 배제하고서라도 KM 전자의 주가는 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
최민혁 실장은 잠깐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성돈 팀장에게 준비해 둔 X 리포트 최근 현황 보고서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다만 이 X 리포트 보고서에는 최민혁 실장의 자산 흐름과 관련된 부분은 대부분 빠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정보에는 미국 내의 투자 은행과 헤지펀드와 관련된 자금 흐름이 추가되어 있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쪽을 포함해서 말이다.
여기엔 모건 스탠리, 샐로먼 브러더스, 미국 연기금, 타이거 펀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미국 내의 자금을 구체적으로 다 포함했다.
“…이건.”
“워낙에 중요한 서류라서 전화가 아니라 서류로 전달합니다. 뭐 X 리포트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봤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 KM 전자에서 따로 정리한 파일입니다. 최근 미국과 동남아의 통화 흐름을 포함했기 때문에 꽤 정확할 겁니다.”
“…….”
두 사람은 허겁지겁 X 리포트를 세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최민혁은 패닉에 빠진 두 사람을 보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자료를 넘겼으니, 알아서 반응하기 바랍니다. 최악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도움을 줬다, 정도만 말할 뿐이지, 이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