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그 숫자는 어느 사이에 천 명을 넘어서더니, 이천 명을 가볍게 돌파했다. 아니, 어느 순간에 삼천 명, 사천 명을 통과해 버렸다.
그사이에 가속이 붙어서 만 명을 단숨에 넘어가고 말았다.
재무부를 오가는 도로가 금세 사람 한 명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의 인파로 가득해졌다.
범용구 기자는 갑자기 일어난 분위기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니, 이건 도대체가…….”
“…….”
최광수 기자 역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재무부 앞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그때 때마침 나타난 이는 바로 최민혁이었다.
그는 대형 트럭에 만들어놓은 단상 위로 가서 손을 흔들었다.
[최민혁입니다!]
함성이 재무부 건물 전체를 흔들 정도로 울려 퍼졌다.
[어, 최민혁 실장이잖아?!]
[맙소사 정말 최민혁 실장이야!]
최근 최민혁과 관련된 보도가 미국 전역에 방송된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특히 세 자매를 구하기 위한 최민혁 실장의 노력은 아무리 칭찬해 줘도 부족했다.
물론 뒤에서 미국 여론에 자금을 대준 사람이 최민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최민혁이 한 행동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수정된 KM DVR 시스템은 캘리포니아 지역 경찰 전체에 보급되면서 강력 범죄 해방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 뉴스를 접한 미국인이라면 손뼉을 안 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설마 이렇게 많은 분이 모일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재무부 방문을 계기로 제가 미국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하겠습니다. 미국 지역 경찰을 도와준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다시 격한 함성이 재무부 앞을 흔들었다.
[저는 투자자이기 이전에 비즈니스맨입니다. 받았다면 마땅히 사회를 위해서 이바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이 활동을 더욱 늘려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백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최민혁 실장이 그냥 단순히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윌슨 부부에게 납치당한 세 소녀의 출현이었다.
그녀들은 우르르 최민혁 실장에게 다가가서 포옹한 것이었다.
‘고맙습니다!’를 외치는 세 소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는 딱 짜고 치는 고스톱 수준이었다.
실제로 고개를 갸웃하는 시민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은 오히려 눈시울을 붉히면서 멍하니 최민혁과 세 자매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물론 이 자리를 준비한 것은 최민혁 실장 본인이지만 말이다.
최민혁은 마치 친동생을 대하듯이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군중의 갈채는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치솟았다.
미국 재무부 건물 차창 밖에 모인 재무부 직원들의 모습이 지금 일어나는 사태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민혁은 내심 음흉하게 웃었다.
‘딱 좋아.’
* * *
“…….”
최광수 기자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범용구 기자는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많이 당해본 터라 최민혁 실장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뒤늦게 ‘냄새’의 소스를 찾으려고 시선을 돌렸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분명히 돈 주고 노숙자를 동원했어.’
바로 시작 단계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대중이 모일 리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이미 너무 군중이 모인 터라 굳이 선동할 필요가 없었다.
‘뭐야? 뭐야?’ 하면서 알아서 모이니 말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배후에 있다고 확신했다.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네.’
그리고 이어진 기자의 질문. 대다수는 세 자매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톰 피트 기자였다.
[굳이 개인이 재무부를 방문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 이번 미팅은 개인 입장이 아니라 벨린 투자 실소유주로 나선 것뿐입니다.]
[그건 더 이상합니다. 설사 법인 신분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됩니다. 만약 탈세 의혹이 있다면 IRS를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뭐, 다른 할 말이 있지 않을까요?]
[미국 재무부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과 경제적 안정을 촉진하는 단체입니다. 그 수단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국가 재정을 관리합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이런 미국 정부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으음, 에플 지분을 꽤 팔았고, 이런저런 회사 오너라서 미국 경제 활동에 영향을 줄 정도여서가 아닐까요?]
[제가 알기로 최민혁 실장님보다 자산이 많은 기업이 많습니다. 그들 오너조차 이런 식으로 재무부를 찾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더 이상합니다만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재무부가 굳이 최민혁 실장을 부른 건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에 모인 군중들의 눈빛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 * *
최민혁은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재무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르르 자신을 뒤따른 경호원들 때문에 멈추고 말았다.
무려 16명이나 되는 덩치가 줄줄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행히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그들을 일단 떼놓았다.
재무부 내에서 무슨 테러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문제가 생기면, 김 과장님이 있으니까.’
솔직히 그는 저 많은 경호원을 믿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이 원하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뿐이었다.
다만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이 시선이 곱지가 않았다.
“…….”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몇몇 보좌관과 같이 최민혁 실장을 마중 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재무부 현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벌써 만 명을 가볍게 넘어서는 군중들 때문이었다.
여기에 덤으로 재무부를 오가는 직원들의 시선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들 역시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었다.
개인이 재무부의 초청을 받아서 이곳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벨린 투자 오너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최민혁 실장이 미국 재무부에 찍혔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그걸 노골적으로 표시한다라.
재무부가 바보가 아닌데, 그런 계획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번 일은 최민혁을 조용히 불러 압박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이런 식으로.”
“제가 만든 상황이 아닙니다. 모인 시민은 어디까지나 이 주변의 소란을 듣고 모인 겁니다. 제가 그들에게 이곳을 떠나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 * *
최민혁은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에도 어깨를 으쓱한 채 당당하게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략 40명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회의실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재무부 고위 관료가 다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양한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자리 배치가 마치 미국 의회의 청문회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스티븐 키렌 차관보가 손짓하는 자리에 앉았다.
침묵이 감돌았다.
제일 앞쪽에 앉아 있던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이번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런 겁니까?”
“뭘 말입니까?”
“재무부 앞에 모인 시민을 말하는 겁니다.”
“이미 말한 사실이지만 그거야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제보를 한 것 같던데, 그 소식을 듣고 모인 것 같습니다.”
“타이밍이 딱 맞아서 생긴 일이란 말입니까?”
최민혁은 씩 웃으면서 등을 의자에 바짝 붙여서 사장처럼 태도를 보였다.
“제가 최근 한국에 가 있어서 미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연락이 안 되었을 겁니다. 뒤늦게 미국으로 왔다는 연락을 받자 감사 인사를 하려고 모인 것 같습니다. 기자는 그 소식을 접했을 거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모인 것뿐입니다.”
“…진심입니까?”
그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는 재무부 고위 관료를 하나씩 쳐다보았다.
“제가 일부러 그럴 행동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제 생각은 다릅니다. 미국 여론을 이용해서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려고 한 거 아닙니까?”
최민혁은 이죽거렸다.
“그건 이상하군요. 제가 왜 미국 재무부를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해야 합니까. 외환 시장에서 강한 달러 정책 같은 일을 하는 재무부를 상대로 말입니다.”
“그건…….”
“저도 재무부 측 요청을 받고 나서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재무부는 강한 달러 정책과 같은 방식을 사용해서 미국 경제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곳이니까요.”
실제로 강한 달러 정책이 최근 클린턴 행정부의 입에서 나왔다.
엔화는 이 소식 후에 급락하고 말았다.
“미국 기업은 난리가 났더군요.”
“달러 상승은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황당한 소리만 하는군요.”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미국 재무부의 경제안을 볼 수가 있는 증거였다.
서머스 부장관이 최민혁 실장의 부정적인 태도에 발끈했다.
[최 실장님, 우리 미국 정부의 경제 정책을 얕잡아 보지 말기 바랍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로 압니다만? 의견 표명도 문제가 됩니까?]
[그것도 장소 나름입니다. 미국 재무부는 미국 정부를 지탱하는 행정 기관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를 부정하는 의견은 불편합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저 같은 투자자를 겁박하려고 이렇게 부른 겁니까? 뭐 40:1 논쟁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아니면 대놓고 협박하려는 겁니까?]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회의실에 모인 재무부 관료들은 다들 최민혁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들은 원래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재무부 앞에 모인 군중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지금 최민혁이 하는 것을 봐서는 이곳에서 생길 일을 과장해서 세상에 폭로할지도 모른다. 자칫 엄한 일에 엮였다가는 갈려 나갈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재무부 표정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딱 그거네요. 솔직히 미국 재무부가 개인을 따로 호출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 재무부에서 먼저 최민혁 실장을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 하원에서 이미…….]
최민혁 실장은 굳이 미국 하원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아, 그만하시죠. 어차피 그쪽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봐야 당신들 권한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미국 하원을 빌미로 절 호출한 건 아닐 거 아닙니까.]
고작 미국 하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지만 굳이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냉소적인 이야기였지만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도 다 미국 하원하고 관련이 있었다.
[…….]
최민혁은 새삼 자신이 한 일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 하원을 명분 삼아서 날 난도질했겠지.’
사실 보통 기업가라면 미국 재무부 부장관의 압박이 압박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건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번 일은 미국 하원에서도 미국 경제 안보라는 명분이 있다.
만약 미국 언론에서도 이 사실을 안다면 재무부를 압박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만 명을 훌쩍 넘어서 삼만 명 가까운 시민이 모인 상황에서 잘못 터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일테면 선동과 같은 방식 말이다.
최민혁은 실제로 최악의 상황에서는 재무부를 들이박을 생각이었다.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제가 아끼는 지분 중에 0순위가 ARN 지분이었습니다. 그걸 무려 20% 지분을 팔았습니다. 여기서 더 어쩌란 말입니까. 자꾸 절 벼랑 끝으로 몰지 말기 바랍니다. 정 안 되면 혼자 죽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이번 클린턴 대통령 재선을 날려 버릴 수도 있어요. 제가 한번 해볼까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최민혁 실장을 공격할 준비를 했던 재무부 고위 관료는 다들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서머스 부장관은 회의실의 분위기에 분노했다. 그가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포효하려고 했으나 다행히 스티븐 키렌 차관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최 실장님, 설마 우리 재무부를 지금 협박하실 생각입니까?!!]
[그 반대죠. 재무부가 지금 하는 짓이 절 상대로 협박하는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