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최민혁 실장의 한마디면 최민수는 KM 센서에서 아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최용욱 회장의 눈에 들어야 했다.
그래야 계열사 지분을 받아도 받는다.
최민혁에게 인정받는다면 최용욱 회장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그는 긴장 어린 표정을 한 채 최민혁 실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김명준 과장은 백미러를 통해서 최민수의 표정을 확인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대충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사내 괴롭힘(?)이었다.
최민혁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일부러 최민수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마치 최민수가 절친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동무를 한 채 히죽 웃었다.
“왜 그래? 내가 불안해?”
“…그건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바짝 긴장한 최민수의 말에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긴장 마. 이전에는 안 그랬잖아. 내가 좀 유명해졌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우리 사이에. 그냥 평소처럼 말을 해.”
“그, 그래도 될까?”
“괜찮아. 존댓말은 더 이상하다.”
최민수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그, 그래.”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정색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퇴근하는 길이야?”
최민수는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차량이 천천히 움직였다.
최민혁은 팔짱을 낀 채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전생 1회 차 때는 좀 달랐다.
최훈열 전무가 KM 전자를 삼킨 후에 행동 대장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최민수였다. 지금이야 순둥이처럼 보이지만 전생 1회 차 때는 달랐다.
‘조폭 행동 대장처럼 나를 대놓고 괴롭혔으니까. 그런 놈이 힘을 잃었다고 패배자 같은 모습이라니. 확실히 인생 1회 차와는 다르구나.’
최민수가 특히 괴롭힌 사람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민혁은 지금까지 최민수를 상대로 계속해서 복수했다.
다만 대놓고 최민수를 갈굴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설마 KM 센서에 떡하니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 이유는 이제 안다.
김현탁 사장이 낙하산으로 꽂아주기는 했지만,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 그 때문에 결국, 방구석 폐인이 되어버렸다. 최용욱 회장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서 손을 쓴 것이었다.
‘뭐, 이유는 DL 그룹 상황이 지금 좋지 않기 때문이겠지.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단기로 받아들인 일본 자금 때문일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일본 자금을 다시 갚을 상황이 아니었다.
KM 그룹과 DL 그룹이 공동으로 시작한 KD 통신, KD LCD의 적자 폭이 가파르게 올랐다.
특히 이 공동 투자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댄 곳이 DL 그룹이었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 자신이었다.
최민혁이 지금 당장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함에도 이 자리에 온 것은 최민수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최민수를 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복수라는 감정도 즐기고 말이다.
‘아니, 이게 더 중요하지. 암,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구른 이유가 복수 때문이었으니까.’
복수란 감정은 너무 달콤했다.
“외가 쪽에서는 안 도와줘?”
“그게.”
“설마 나에게 못 할 이야기야?”
최민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지긋지긋했다. 굳이 외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최민혁이 자기 집안 사정을 안다고 해서 도와줄 것도 아니고 말이다.
“꼭 이야기해야 해?”
“싫으면 마. 다만 내가 민수 형 사정을 모르면 도와줄 수가 없잖아? 편의도 못 봐주고, 그러면 원칙대로 해야지. 실수하면 자를 수밖에 없고 말이야.”
“아, 아냐.”
최민수는 결국 DL 그룹 사정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최민혁이 아는 범주 내의 것들이다.
다만 디테일은 좀 달랐다.
DL 그룹은 자금 압박을 받자 무리수를 계속 뒀다.
이 과정에서 DL 그룹 임직원들의 동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직이 많다라. 계획대로군. 이 부분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당분간은 이 정도가 좋겠어. 재무부 일을 우선 마무리할 필요가 있으니까. 우리 최문경 부회장을 확실히 자극해야지.’
최민혁은 최민수를 집 앞에까지 바래다준 후에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미국행 표를 예약하고, 재무부 일은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 * *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최민혁과 관련해서 돌아가는 일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민혁 때문이 아니었다. 오락가락하는 재무부의 분위기가 짜증스러웠다.
그도 서머스 부장관의 의견에 처음부터 동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로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은 위험한 인물이야!’
이건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재무부 고위 관료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대상 중에는 백악관도 포함된다.
그들 역시 처음부터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ARN 지분 때문이라니.’
그로서는 ARN 지분을 일부 먹었으니, 최민혁 실장이 보유한 다른 지분 역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이 보유한 다른 지분 역시 무시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미래 기술도 있으니까.’
특히 차세대 배터리와 관련된 미래 기술은 그들에게 별미였다.
애초에 차세대 배터리 시장 공략을 위해서 수천억 달러를 투자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오늘 최민혁 실장 미팅도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생각할수록 골치네.’
그런데 이런 우려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 영향력이 그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멕시코식 경제 위기 대처에 520억 달러 긴급 구조 기금 창설 합의가 끝났군.”
“아직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마무리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만.”
“합의는 무리가 없다는 말이군.”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 서두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윗선의 생각은 좀 다르더군요. 국가 재정 위기를 극복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니까요.”
“설마 우리가 국가 재정 위기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닙니까?”
“헤지펀드 상황은 우리 미국 정부와는 무관해.”
“타이거 펀드의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을 예로 들려고 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자도 다른 노림수가 있습니다. 에플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의 행보는 재무부도 이상한 눈으로 지켜볼 정도였다.
헤지펀드인 그가 굳이 에플 공매도가 아니라 에플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본인 명의가 아니라 지인 명의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정이라? 그거야 정치적인 쇼일 뿐입니다. 실제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의 이야기를 피해 갔다.
“멕시코 페소화 가치 하락 사태를 가지고 말하는 것 같은데, 클린턴 행정부가 굳이 기금 조성을 한 이유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함이야.”
“그거야 굿 캅 역할이겠죠. 배드 캅은 헤지펀드가 할 테니까요.”
“자네는 매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봐. 있는 결과만 봐도 괜찮아.”
“글쎄요.”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냉소적이게 반응하면서도 딱히 서머스 부장관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서머스 부장관의 인식이야 어쨌든 나름 따를 만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이니까.’
“이번 일에 문제가 없도록 마무리를 잘하게.”
“최민혁 실장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의 행보가 의외로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무슨 소리인가?”
“혹시 X 리포트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게 뭐지?”
“저도 최민혁 실장을 조사하면서 최근에 안 사실이었다.”
그가 내놓은 것은 X 리포트란 보고서였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음모론에 등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사를 한 내용이었다.
영어로 번역된 이 보고서의 내용은 허황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논리성에서 비약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가지 가정이 들어맞아야 했다.
“…….”
서머스 부장관은 멍한 눈으로 X 리포트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X 리포트를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X 리포트상에 나와 있는 내용 중에 한국 사정 태반은 그 의미를 잘 몰랐다.
미국 재무부 부장관이 그런 일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한가한 자리는 아니었다.
“…설마 한국에 경제 위기가 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건 잘 모릅니다. 다만 긴급 구조 기금 창설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반응이 좀 달랐습니다. 특히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 쪽은 긴장하는 눈치였습니다.”
물론 그 자료를 은근슬쩍 넘긴 이는 다름 아닌 스티븐 키렌 차관보였다.
그도 늘어지는 긴급 구조 기금 창설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것 자체가 미국 정부가 그만큼 세계 경제 안정화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제스처였다.
실제로 이 일은 미국 여론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세계 경제 경찰 역할을 클린턴 행정부에서 맡았으니 말이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재무부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박수갈채와 함성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무실 안으로 보좌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소리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두 사람은 보좌 간 안내를 받아서 차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 아니, 저게 다 뭐야?’
* * *
백악관으로 가는 길에 다름 아닌 미국 재무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관광객이 방문할 수 없는 DC 명소였다.
건물 앞에 알버트 갈라틴 주철 조각상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재무부 건물 자체가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로, 로마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관람객 역시 미국 관광을 한다면 으레 찾아야 하는 곳이었다.
이 재무부 앞이 평소와는 달랐다.
대형 트럭으로 만들어진 단상이 있었다.
그 앞에는 이미 백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관람객이 아니라 오히려 기자들이 더 많았다.
한영 일보 기자인 최광수 기자는 감탄을 터뜨리면서 주변을 쳐다보았다.
모이기 시작한 관광객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특히 뒤늦게 등장한 이는 요즘 미국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는, 희대의 악명을 떨친 윌슨 부부의 피해자인 세 자매 가족이었다.
이들 가족이 나타나자 최광수 기자는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하, 장난 아니네.”
몰려드는 기자도 기자였지만 시민들의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여론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그 숫자가 늘어났다.
“아, 이게 무슨 냄새야?”
모여든 이들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냄새를 풍기는 이가 많았다.
범용구 기자가 타박했다.
“아니, 웬 뜬금없는 냄새… 어, 진짜네.”
범용구 기자 역시 카메라 설정을 바꾸다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오백 명까지 늘어난 인파들 때문에 넘어갔지만,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모여든 미국 시민들 역시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인 숫자가 천 명이 넘어가자 냄새는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범용구 기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냄새의 소스를 찾지는 못했다. 그는 이보다는 재무부 건물 앞에 모여드는 시민에 더 집중했다.
“어? 저거 워싱턴 포스트 기자네?”
톰 피트와 크레이그 로이드 기자였다.
범용구 기자가 두 사람을 알아본 것은 두 사람이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위해서 노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지간한 기자라면 다 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명성을 잘 아는지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아예 자신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라는 것을 가슴에 찬 신분증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들이 나타나자 곧 미국 메이저 언론사 기자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광객들 역시 처음에는 대다수가 슬쩍 스쳐 지나가다가 이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우르르 재무부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