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하지만 최민혁이 한 말이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모건 스탠리가 좋아서 한 조언이 아니었다.
모건 스탠리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의심해서 협력을 줄이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기존에 했던 투자도 손절매하고 말이야.’
갈등은 시작이 어렵다.
한번 불신하기 시작하면 둘 사이에 타협이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최민혁은 그 틈을 계속 벌리고 벌려서 둘 사이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돈도 좀 벌게 해주고 말았다.
까짓거 10억 달러 수익도 챙겨 줄 수 있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숨통을 끊는 데 도움을 준다면 말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너스레를 떨었다.
[다 주는 만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주셨는데, 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당연히 최민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이 던져준 돈 벌 기회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 중요한 것은 돈이니까.’
* * *
최영란 본부장은 이사회 이후에 한동안 최민혁을 계속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런데 최근 최민혁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했다.
다만 오늘은 좀 달랐다.
최민혁이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동안 사무실이 울릴 정도로 웃기만 했다.
최영란 본부장은 도대체가 최민혁의 의도를 몰라서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이사회에서 최민혁이 한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최민혁은 씩 웃었다.
“응, 좋은 일이야. 내가 계획한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서 말이야.”
정확히는 최민수를 이중 첩자로 활용한 일이었다.
솔직히 최민수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KM 센서는 원천기술을 가진 기업이 아니었다.
주로 KM DVR와 KM 이미지 센서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이 기술 자체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외부에 누출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그럼에도 KM DVR 지분을 확보한 이유는 이것 자체도 수익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민수가 나선 덕분에 자신이 계획한 음모의 수레바퀴가 생각한 것보다는 더 잘 굴러갔다.
최영란 본부장으로선 영문을 몰랐다. 다만 그녀도 최민혁 실장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았다. 도저히 그 상한을 정할 수가 없었다.
“휴, 난 네 머리를 못 따라가겠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제품이 나오면 잘 팔 생각이나 해.”
“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그래?”
“어, 너는 이상할 정도로 제조업에 부정적이잖아. 콜린스 사업부도 매각할 것 같으니까.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
“KM 센서는 단순히 제조라고 하기는 힘들어.”
“DVR도 따지고 보면, 하드웨어가 더 중요하잖아.”
“정확히는 MP3, MPEG-2 원천특허겠지. 거기에 고속 ARN도 있고 말이야. 사실 이게 어떻게 보면 핵심이니까.”
최영란 본부장은 입술을 부풀리면서 툴툴거렸다.
“네 말은 우리 KM 센서가 단순 제조를 한다는 소리야?”
“꼭 그렇지도 않아. 중요한 것은 이들 기술을 통합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KM 센서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응용할 다른 아이템도 생각해 봐.”
“KM DVR 말고, 다른 아이템을 말하는 거야?”
“어, 물론 중심은 KM DVR에 둬야 할 거야. 향후 5~6년 정도는 DVR 시장을 독점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20억 달러 이상은 먹고 들어가. 하지만 KM DVR에 쓰인 원천기술이 핵심이라고 했잖아. 그걸 응용하면 얼마든지 다른 아이템에 적용할 수 있어. KM 이미지 센서도 그중 하나야.”
“…그렇구나.”
최영란 본부장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확실히 응용 분야는 무궁무진했다.
다만 최민혁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시점이 중요해. 지금 이 시기는 마구잡이로 투자할 시기는 아니야. X 리포트를 봤을 것 아냐. 거기에 나오는 위기 시나리오 역시 확인했지?”
“그거야 단순한 보고서… 설마 그 일이 진짜 일어날 거로 생각하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 행동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왜 오성 그룹이 나에게 저자세라고 생각해? 그들이 다른 대안이 없어서 ARN 지분 5%를 5억 달러에 사들인 것 같아?”
“…….”
최영란 본부장은 그제야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놓은 X 리포트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행동들도 말이다.
특히 모건 스탠리를 상대로 한 갑질은 그 절정이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질문인데, 설마 모건 스탠리도 X 리포트가 말하는 투기 자본 세력 중의 하나로 보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사실 자본에는 단 한 가지의 속성만이 있지. 바로 이익이야. 투자해서 대박 난다고 하면 그 일에 빠지지 않아.”
“너무 앞서 나간…….”
하지만 최영란 본부장은 그제야 X 리포트 시나리오와 최근 자신이 얻은 정보, 그리고 지금 최민혁 실장이 말하는 일을 떠올리고는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민혁 실장의 행보였다.
그는 대충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철저히 달러 중심으로 이익을 내고, 해외 수출 쪽을 봤다.
KM DVR 증설 공장만 해도 그랬다. 국내 공장이 아니라 해외 공장 쪽을 노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한번 알아봐야겠어.’
최영란 본부장은 이상하게 이번 일이 최민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수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가 뭘 하고 말고가 있나. 어차피 할아버지가 결정한 일이잖아.”
“하지만 그건 더 설명이 안 되잖아. 대체 뭐 때문에 평사원을 이사회까지 끌고 와서 재벌 3세라고 대문짝만 하게 공개한 거야?”
“그거야 재벌 3세이니까. 아무래도 그 정보가 알려지면 회사 생활이 편하잖아.”
“하.”
최영란 본부장은 이마를 잡고 말았다. 그녀 역시 최훈열 전무를 최문경 부회장만큼 싫어했다. 최민수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다 잘될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어, 날 믿으라고.”
최영란 본부장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요즘 살 만한 것도 다 최민혁 덕분이었다.
“…알았어.”
* * *
최민혁 실장의 장담과는 달리 최민수는 상황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최민수의 업무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였다.
최태훈 부장이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중간 관리기 불만을 토로하자 최민수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최민수에게 커피 한잔하자고 해서 휴게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직원이 있었다. 그들은 냉랭한 눈으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최민수 아버지가 최훈열 전무라면서? 그 사람 구속되어서 난리가 났잖아.]
[KM 전자 내부 자금을 완전히 쌈짓돈처럼 빼돌려서 말이 많았잖아.]
[난 그런 것을 떠나서 힘들게 사는 협력 업체를 상대로 갈취한 것에 더 분노했어.]
[알아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 협력 업체를 협박해서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쌓았다잖아. 심지어 그 돈으로 정치 쪽에 로비도 했고.]
[그 새끼의 아들이라고? 하, 어쩐지 신분을 감추고 회사에 들어왔다 했어.]
[…….]
최태훈 부장은 힐끗 KM 센서 직원을 쳐다보았다. 다들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 것이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해서 살인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최태훈 부장은 KM 센서로 자리를 옮기 전에 이미 혁혁한 실적을 쌓았다.
그러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최태훈 부장은 결국 한숨을 내쉰 채 최민수를 소회의실로 데려갔다.
“민수 씨, 괜찮아?”
“아, 네, 뭐…….”
최민수는 말과는 달리 내심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안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사회까지 데려갈 때만 해도 혹시라도 대리나 과장으로 승진시키지 않을까 기대했다.
‘내가 바랄 것을 바라야지.’
그런데 승진은커녕 사내에 자기 이력을 동네방네 퍼뜨리기만 했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과 최훈열 전무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나왔다.
실상 최민혁 실장이 최훈열 전무의 장남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두 사람이 원한 관계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KM 센서의 임직원은 최민수를 닭 쳐다보듯이 볼 뿐이었다.
이 상황이 좀 답답하기만 했다.
DL 그룹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비슷했다.
김현탁 사장이 자신을 두둔해 준다고 해도 임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최훈열 전무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은 똑같았다.
놀라운 것은 최태훈 부장이었다.
“민수 씨가 잘못한 것이 아니잖아. 아버지가 잘못한 것을 민수 씨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마녀사냥이나 마찬가지야.”
“…고맙습니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정말 이런 일은 없어져야 해.”
“하아. 솔직히 많이 힘듭니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없죠. 전 제 아버지 일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맞는 이야기였다.
다만 미래에는 좀 얘기가 달라진다.
최민수는 최훈열 전무가 울고 갈 정도로 KM 전자 임직원을 상대로 갑질을 일삼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신 고문이었다. 이에 따라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자신의 미래 일까지 모르는 최민수는 울컥했다. 설마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는 한편으로 신기한 눈으로 최태훈 부장을 쳐다보았다.
‘스톡옵션이다 뭐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구나. 민혁이 이 자식, 정말 사람 보는 능력 하나는 좋구나.’
그가 짧은 기간 회사에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최태훈 부장은 꽤 괜찮은 인재란 것이다.
특히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점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최태훈 부장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뭐, 민수 씨도 잘 알겠지만, 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합과 소통이야. 그런데 자네는 그런 점에서 너무 미흡해.”
“…노력하겠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자네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업무 능력도 문제야. 내가 간단히 조사하라고 낸 지시도 제대로 이행 못 했잖아.”
그가 내린 지시는 KM DVR 시장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민수가 올린 것은 대학생 리포트 수준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도 최민수 씨가 힘든 것은 알아. 그러니 더욱 일에 집중해 줘.”
“…알겠습니다.”
최태훈 부장은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민수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는 이제 물러날 수 없는 절벽 끝자락에 있었다. 여기서 최소한 성과를 보여줘야 했다.
그게 아니면 최문경 부회장의 마음에 드는 정보라도 넘겨야 했다.
‘난 할 수 있어!’
* * *
최민수는 나름 자기가 노력을 다해도 다른 팀원들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 대해서 몰랐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더욱이 재벌 3세라고 해서 부담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된 이후에 최민수는 KM 일가에서 완전히 버려졌다는 것을 안 것이었다.
‘씨발.’
그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그에겐 회사 생활 자체가 지옥이었다.
그나마 퇴근 시간이 되자 겨우 살 것 같았다.
그는 저녁 7시에 눈치껏 회사를 나갔다.
의외로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나가서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 그의 고민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차량 경적이었다.
“민수 형, 나야 민혁!”
“…….”
최민수는 순간 고민했다. 그는 진짜 그냥 가고 싶었다. 최민혁 저놈이 겉으로는 좋게 이야기해도 그 속내는 흉악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최민혁 실장이 KM 센서의 오너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