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
“네, 이 기간산업이 제대로만 동작한다면 새로운 사업 기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신사업이 어떤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KM DVR이 잘 어울린다는 겁니다.”
“…계속해 봐.”
“KM DVR 그 자체로 새로운 사업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 차기 정권 입맛에 맞는 사업입니다. 최민혁 실장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에플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데, 최민혁 그놈이 점쟁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이번 CES에서 전시할 아이컴 사양에는 인터넷을 포함한 네트워크 기능이 포함됩니다. 이런 부분이 정보 초고속 통신 기간망에 중요한 플레이어 역할을 할 겁니다.”
“설마 에플 주가가 폭등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권재홍 비서실장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최문경 부회장은 큰 충격을 받아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에플 공매도에 손을 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돌아가는 상황이 황당하다는 말로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를 통해서 듣기로 이번 에플 공매도에는 꽤 많은 투자자가 들어갔다.
그들 중에는 세계적인 자본가 역시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정확히는 샐로먼 브러더스가 아니라 그들을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 일도 예상처럼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길.’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이번 일이 결코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최민혁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것도 같은 연장선이었다.
‘설마 이놈이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아니, 왜라는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최훈열 전무를 통해서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스스로 KM 전자를 떠나게 하는 것.
그렇게 보면 장녀 최영란 본부장을 부추긴 것도 같은 연장선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KM 일가라면 자신과 최영란 사이의 갈등 요인을 아니까.
그런데 문제는 최민혁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제임스 러너 이사에게 연락해서 당장 약속을 잡아!”
* * *
제임스 러너 이사는 요즘 들어서 에플 주가 폭등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최근 에플 주가가 다시 50달러 선을 지지하면서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상황이 오히려 좋지가 않았다.
차익 매물이 나온 이후에 조정 국면을 거쳤음에도 50달러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불안을 느낀 터라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측에 연락했다.
하지만 명확한 답이 없었다.
이유는 다운존스 지수가 계속해서 우상향을 그리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증권 시장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시장이 이렇게 좋으니, 수요는 넘쳐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에플은 스티븐이 복귀한 곳이다.
스티븐을 믿고 투자를 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거기에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테마가 이 차트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에게 주기적으로 투자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결국 최문경 부회장이 권재홍 비서실장과 함께 찾아왔다.
물론 전화로 사전 약속을 잡고는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급한 일이 아니면 뒤로 일정을 미루자고 했습니다만?”
최문경 부회장 태도는 냉랭했다.
“투자 현황 이야기 좀 듣고 싶어.”
“그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정말인가?”
“하, 우리를 못 믿는 겁니까. 지금까지 부회장님 자산을 키워 준 사람이 우리입니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달라. 지금까지의 실적은 당신들이 잘해서가 아니잖아. 내 막냇동생이 가이드를 잘해줘서지.”
“그건…….”
“난 솔직히 당신들을 믿지 않았어. 병문이 그 녀석을 믿었지. 그리고 투자도 그래. 자네들이 직접 진행한 일이 아니잖아?”
“…….”
제임스 이사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 말은 사실이었다. 최병문 상무의 투자 감각은 월스트리트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샐로먼 브러더스도 처음에는 최병문 상무를 배척했지만 뒤늦게 그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가 투자하는 곳에 따라서 자금을 댄 것이었다.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투자 역시 최병문 상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최문경 부회장도 굳이 최병문 상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투자 방향이 문제가 된다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가 내민 것은 비서실을 통해서 검토한 미국의 정보 초고속도로와 에플과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 정보 도로망만을 다루지 않았다.
미국은 물론 한국 정보 도로와 관련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공재, 주요기관, 대학 연구소, 행정 기관을 모두 잇는 광케이블 도로망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엔 일본 정부 역시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우정성이 중심이 되어서 일반 가구를 기반으로 해서 광섬유로 연결하는 방식을 고안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에도 영향을 줬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런 정보 고속 통신망이 무선 통신망과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바로 무선랜 통신이었다.
이 통신과 관련된 핵심 특허 소유자는 당연히 최민혁 실장이었다.
특히 이동 중에 생기는 무선 통신의 문제점을 극복한 몇몇 특허는 핵심 중의 핵심 특허로 수천억 규모의 소송이 걸렸다.
아직은 아는 사람이 없지만 말이다.
아이컴, MP3, MPEG-2, 무선랜, 정보 고속 통신망으로 이어지는 기술은 단기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큰 그림하에서 철저하게 검정되고, 기획된 것이었다.
제임스 이사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이걸 어디서 구한 겁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역시나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최민혁 그놈이 준 거야.”
“네? 최민혁 실장이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지금 봐서는 소시오패스 같은 놈이니까.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뭐, 민혁이 그놈이 변태 같다는 것만 알면 되잖아. 중요한 것은 KM DVR이야. 그거 미국 연방 정부에 10만 대 공급하는 것으로 이미 구두 계약이 끝났어.”
제임스 러너 이사는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을 비웃고 말았다.
“그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연방 정부가 고작 기업가 한 사람에게 휘둘려서 계약했다는 말입니까. 더욱이 연방 정부에 들어갈 물건은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겠지. 그게 그냥 될 리가 없어. 그런데 이해 당사자가 도와준다면 상황이 달라져. ARN 지분 매각 말이야. 그건 단순히 모건 스탠리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어. 그 이권에 관련된 자들도 있을 텐데? 제임스 이사 당신이라면 추측할 수 있잖아.”
“그거야…….”
제임스 러너 이사의 안색이 그제야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버렸다. 모건 스탠리 배후의 자금 주인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자본을 받아서 투자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향이 좀 다른 이들도 있기는 했다. 사실 꽤 복잡했다. 상호 이해관계에 따라서 파벌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 역시 ARN 지분 매각에 대해서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모건 스탠리라서 더 파고들기가 어려웠다.
그는 에플 공매도와 관련된 모건 스탠리의 행보를 떠올렸다.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꽤나 소극적인 행보였으니까.
“…모건 스탠리가 확실히 애매한 반응이었는데.”
최문경 부회장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거야? 샐로먼 브러더스는 세계적인 투자 회사 아냐.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죄송합니다. 알아보고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그런 말을 듣자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야. 대응을 하라는 거야! 도대체 병신같이 그냥 제자리에서 뭘 하자는 거야. 어떻게 상대에게 휘둘려서 등신 취급받아? 내 속이 타들어가서 미치겠…….”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를 터뜨리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임스 러너 이사의 표정이 아주 차가웠다. 다름 아닌 샐로먼 브러더스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가 그렇게 오랫동안 거래를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서로 선을 지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최병문 상무의 존재 역시 빼놓기 어려웠다. 그의 역량이 독보적이었기에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최문경 부회장을 대우해 줬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제 최병문은 없다.
최문경 부회장의 자산이 좀 있기는 하지만 샐로먼 브러더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심지어 KM 그룹을 완전히 승계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KM 그룹 후계자에서 점점 멀어지는 상황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설마 민혁 이놈이…….’
그제야 안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재무부와 관계를 넌지시 흘린 이유 말이다.
“자, 잠깐만…….”
제임스 러너 이사 눈빛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부회장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우리 측에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꾸벅 고개 숙이는 제임스 러너 이사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내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무시하지…….”
“아니, 부회장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우리 실수를 인정합니다. 다시는 이런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딱 이 한마디를 남긴 후에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문경 부회장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
최문경 부회장은 다급하게 사과를 해보았지만, 제임스 러너 이사는 아예 자기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좆 됐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나라 잃은 표정을 한 채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지사를 나섰다. 그는 아직도 지금 일어난 일을 잘 믿을 수가 없었다.
제임스 러너 이사의 그런 표정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뒤늦게야 후회했다.
‘이게 모두 병문이 때문이었는데…….’
그 자신이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대우받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샐로먼 브러더스의 입장에서 자신과 같은 투자자는 넘쳐난다.
굳이 한국인 투자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미국만 해도 자본가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영문을 잘 몰라서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만 봤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냐.”
“혹시 제임스 러너 이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따로 손을…….”
“그만해!”
“네? 하지만 방법은 많습니다.”
“그만두라니까. 자네는 샐로먼 브러더스가 어떤 회사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 작자들 자본 규모가 얼마나 되는 줄 몰라? 미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투자 은행이야!”
“…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제야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최민혁 때문에 정신이 나가서 미처 간과한 사실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깨달았다. 최민수를 이용해서 굳이 정보를 흘린 것의 이유를 말이다.
‘하, 하지만 그걸 도대체 어떻게 예상한다는 거지? 샐로먼 브러더스와 내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모른다면 알 수가 없는……. 설마 병문이 그놈 짓인가? 아니지. 이미 죽었잖아.’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중요하지 않은 일은 모두 접어. 그리고 샐로먼 브러더스와 미국 사정에 대해서 정보를 파악해서 모두 보고해. 최민혁 그놈과 관련이 있다면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마!”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의문이 많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 최문경 부회장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최병문 상무가 그 일을 다 주도적으로 처리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