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
그는 그 모습이 은근하게 웃겼다. 어떤 식으로 미끼를 던져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막상 확실한 미끼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양손으로는 이런저런 몸짓을 취해 가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말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민혁의 행적이 워낙에 신출귀몰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최민혁 실장의 행적조차 호기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정미선조차 말이다.
덕분에 최민혁은 가족 식사 시간에 잘 스며들 수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결국 참다 못해서 끼어들었다.
“혹시 모건 스탠리 쪽에는 원래부터 아는 인맥이 있었냐?”
최민혁은 마지못한 얼굴의 최문경 부회장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아뇨.”
“아니, 그런데 ARN 지분을 그렇게 높은 가격에 매각한 거냐?”
“전 생각이 좀 달라요. 손해를 많이 봤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ARN의 가치는 이미 KM 센서를 통해서 증명될 겁니다. KM DVR 매출이 늘어날수록 ARN 가치는 더 올라가겠죠.”
“그걸 장담할 수 있냐? 넌 투자만 주로 해서 경영이 뭔지 몰라. 세상일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풀려가는 것이 아니야.”
뜻밖의 잔소리.
하지만 최민혁 실장보다 주변의 듣는 사람이 오히려 황당한 눈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은 허탈한 얼굴이었다.
최민혁은 어차피 최문경 부회장에게 자극을 줄 생각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 첫째 큰아버지는 왜 수익을 올리지 못합니까?”
“그만큼 사업이란 게 힘든 거야.”
“글쎄요. 전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KM DVR도 당장 십만 대 정도는 팔 수 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최민혁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서, 설마 모건 스탠리와 관계가 있는 거야?”
최민혁도 처음에는 바로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모건 스탠리와의 협상을 잘만 이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 사이에 틈을 만들 생각이었다.
“으음, 모건 스탠리 실무진 선에서 ARN 지분 매각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따로 영업을 잘해준 거죠. 그만큼 제가 손해를 본 겁니다.”
“…설마 다른 조건을 걸어서 그 가격으로 지분을 팔았다는 소리야?”
“그렇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ARN 지분을 매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면 미국에서 일도 다 모건 스탠리 쪽의 도움을 얻었다는 말이야?”
“당연하죠. 전 미국에 별다른 인맥이 없었어요. 그저 모건 스탠리 실무진 측에서 잘 처리했죠.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모건 스탠리가 사들인 지분 실소유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음.”
“솔직히 그게 당연하잖아요? 거래한 이상 상대에게 서비스를 해줘야죠. 몇 년 정도 신뢰를 쌓았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줘야죠. 그렇지 않다면 그쪽에서는 호구로 취급한 것이니까.”
“…….”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자신과 샐로먼 브러더스 관계를 떠올렸다. 저 말대로라면 샐로먼 브러더스는 서비스는커녕 자신을 호구 취급 중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을 보자 슬쩍 한마디 더 찔렀다.
“투자자 사정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면, 애초에 그쪽은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생각이 없는 거죠. 아마 기회만 된다면 뒤통수를 제대로 칠 겁니다. 일테면 손실을 전부 다 전가하는 식으로 말이죠.”
“…….”
최문경 부회장의 안색은 이제 아예 시퍼렇게 변했다. 그는 그제야 에플에 투자한 자금을 떠올렸다.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었다.
‘손실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계약서를 내밀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됐네. 딱 봐도 에플 공매도 투자 건 때문에 고민하는 눈치야.’
* * *
최용욱 회장 역시 최민혁의 말을 듣고는 한창 고민에 빠졌다. 그는 최민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모건 스탠리라니.
최민혁이 설마 그 유명한 미국 투자사인 모건 스탠리와 거래하는 줄은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정미선이 특히 더 놀랐다.
“대, 대단하구나.”
최민혁은 마치 자기 자랑을 하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니에요. 그저 인맥이 좋은 것이니까.”
이어지는 질문.
식사 시간은 최민혁의 독무대가 되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표정을 구긴 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이런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편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엄마도 괜찮은 배역 하나 줄까?”
정미선 눈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배, 배역이라니?”
“아, 국내 드라마 말고요. 해외 영화요.”
옆에서 듣고 있던 최지연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서, 설마 할리우드 영화 배역을 말하는 거야?”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임스 감독이라고 아시죠?
“…설마 터미네이터를 제작한 그 제임스 감독을 말하는 거야?”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힐끗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봤다. 아주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질투심의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역시 이래야지. 주기적으로 자극할 필요가 있어. 사람이 그냥 놔두면 퍼지니까. 뭔가 무리수를 계속 두게 하여야 해.’
“이번에 에플 CF 광고 때문에 알게 되어서 약간 투자를 했습니다. 비중 높은 조연은 어려워도 어지간한 조연 정도는 될 겁니다.”
“무, 무슨 영화인데?”
“배 재난 영화입니다.”
“가만, 그러면 제작비도 엄청나게 들어가지 않아?”
“네. 제가 그 제작비 일부를 메꿔 줬죠. 그러니 엄마 정도는 꽂아줄 수 있습니다.”
정미선도 어지간해서는 주변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헐리우드 영화 배역은 좀 달랐다. 그녀도 자존심을 숙이고 말았다.
“그, 그래도 될까?”
“그럼요.”
환호 갈채가 이어졌다. 최민혁 반대 파벌 쪽은 그다지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영란 라인 쪽은 달랐다.
다들 순순하게 좋아했다.
최용욱 회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물론 대화가 끝나가자 넌지시 최민혁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알겠습니다.”
* * *
“일부러 그런 거냐?”
“아닙니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 서재에서 어깨를 으쓱한 채 부인했다.
최용욱 회장은 잠깐 최민혁을 째려보기는 했지만, 굳이 독촉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제임스 감독과도 인연이 있냐?”
“그렇게 큰일은 아닙니다. 에플 CF 촬영장에서 얼굴을 봤습니다.”
에플 CF 사연이 잠깐 나왔다.
최용욱 회장은 그저 듣기만 했다. 그가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을 따로 있었다.
“그 ARN 지분 매각 말이다. 정말 네가 원해서 매각한 거냐?”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ARN 지분 매각 대금이 작다고 생각하세요?”
“난 그냥 민혁이 네가 직접 지분을 매각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래. 모건 스탠리와 오성 전자에 지분을 넘긴 것이 너답지 않아.”
최민혁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압력을 받았습니다.”
“…혹시 미국 정부냐?”
“네.”
“으음.”
최용욱 회장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손자 최민혁이 가진 특허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혹시 CDMA 특허 때문이냐?”
“맞습니다. 아무래도 통신 쪽은 보안을 크게 요구하니까요.”
“하지만 너답지 않구나. 너라면 미국 정부라도 들이박아 버렸을 텐데.”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미국 정부는 호락호락한 단체가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냐? 뜻밖이구나. 네 녀석이 무서워하는 이가 있다니.”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말을 하면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손자 최민혁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라면…….’
다만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이 만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면 ARN 지분을 매각해서 어느 정도 딜을 본 거냐?”
“당분간은 그럴 겁니다.”
“뭐야? 그러면 별 효과가 없는 거냐?”
“시간을 벌었죠. 아마 클린턴 재선 때까지는 시비를 걸지 않을 겁니다. 아마 그 이후로는 상황에 따라서 좀 다를 거고요.”
최민혁은 애초에 미국 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이야 시간이 없어서 일단 협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더 있다면 대안을 찾으면 될 일이다.
“그렇구나.”
최용욱 회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손자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그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국 말이야? 혹시 지금 꼭 가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하면 KM 센서를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것은 어떠냐? 그 회사 오너도 따지고 보면 너야.”
“아, 미국 사정에 대해서 경영진에게 알려주기를 원하는 겁니까?”
“그래. 너는 생각 없이 폭탄을 막 던지니, 그쪽 경영진은 힘들어하는 것 같아.”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일정을 다소 조정하면 될 일이라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일어서자 잠깐 머뭇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저에게 그런 이야기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정 하려면 최문경 부회장님에게 먼저 하세요.’
* * *
최민수는 가족 식사가 끝난 후에 어머니 김여정과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 그는 KM 센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다.
다만 그는 곧 권재홍 비서실장 전화를 받고는 평창동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곳엔 차량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만난 이는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고민이 많지?”
“좀 그래요.”
“너희 아버지 일은 내가 좀 알아보고 있다. 아마 사면을 좀 더 빨리 받을 거다.”
“고, 고맙습니다.”
최민수는 다급하게 최문경 부회장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최훈열 전무만 감옥에서 나오면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차피 최용욱 회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 최민수를 KM 센서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
“고맙다면 내 부탁도 좀 들어 줬으면 한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 KM 센서에 출근하잖아.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 돌아가는 정보를 저녁에게 계속 보고했으면 한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적당한 사람을 보낼 거다.”
최민수는 최문경 부회장 부탁에 얼떨떨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내심 이를 가는 중이었다.
그가 겉으로 짓는 표정과는 달리 마음 깊숙한 곳에는 원한을 숨겨두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10억만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10억? 너도 돈이 제법 있지 않아?”
“저희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요. DL 그룹이 자금 압박을 받으면서 어머니가 그쪽에 자금을 빌려줬어요. 그런데 그 돈이 다 묶인 바람에…….”
사실 단순히 자금이 묶인 정도에 끝나지 않았다.
무리해서 자금을 빌려준 덕분에 건물 몇 곳은 이미 은행에 차압당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아직 그런 사정까지는 잘 몰랐다. 그 역시 상황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해외 자금 대부분이 이번 에플 공매도에 묶인 바람에 여유 자금이 신통치 않았다.
“…으음, 좋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해야 할 거다.”
최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사력을 다할 겁니다!”
“그래. 그 태도야.”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꽤 만족했다. 어벙하기만 한 최민수 역시 정신을 꽤 차린 얼굴이었다.
‘하긴 그렇게 민혁이 그놈에게 당하고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게 병신이지.’
* * *
최민수는 굳이 최문경 부회장 부탁이 아니라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정시에 KM 센서 본사에 출근했다. 그 역시 알음알음 들은 정보가 있는 터라 KM 센서의 가치가 어떤지 잘 알았다.
그는 때문에 본사에 출근하기가 무섭게 인사 팀을 찾아가서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인사 팀에서는 그의 신분을 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