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룹 차원에서 일을 진행할 생각이냐?”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KM 센서란 판을 깔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야?”
“KM DVR 아이템은 KM 센서 쪽이 계속 담당할 겁니다. KM 이미지 센서와 KM DVR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세요? 그걸 기반으로 미국 시장을 더 넓힐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콜린스의 덩치가 더 크다. 더욱이 KM 그룹은 주로 TV가 주 업종이었다. KM DVR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정성 자체는 콜린스가 더 나아.”
침을 튀겨가면서 이야기하는 최용욱 회장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묵묵히 입만 닫고 있었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손자 최민혁을 설득했다.
최용욱 회장이 앞뒤 꽉 막힌 꼰대 성향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KM 그룹 구조조정 후에 콜린스 사업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최민혁은 그런 최용욱 회장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인내심이 강해. 모건 스탠리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할아버지.”
“이놈아, 이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무려 수천억, 아니, 조 단위가 걸린 사업 매각이야. 단순하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최용욱 회장은 애가 탔다. 안건민 회장과 얘기할 때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안건민 회장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건민 회장이 움직였다는 건 이미 콜린스 사업부 인수와 ARN 지분 인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실상 이 두 가지 아이템은 오성 그룹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느긋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이 칭얼거리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 일은 원래 목적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손자 최민혁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손자 최민혁의 행동에 크게 당황한 적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손자 최민혁은 그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뭐랄까.
그래 압도적인 격.
최용욱 회장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오히려 손자 최민혁에게 주눅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최민혁의 덩치는 더 커졌다.
“할아버지.”
“으, 응? 그, 그래.”
“욕심을 버리세요.”
“…….”
최용욱 회장은 콜린스 사업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정신없이 말을 열다가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왜 안건민 회장이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깨달았다.
안건민 회장도 최민혁 실장이 꽤 부담스러웠던 것이었다.
사실 자신이 나선다면 좀 더 헐값에 ARN 지분을 사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손자인 최민혁 실장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최민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조성돈 팀장에게 손짓해서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X 리포트?”
“최근 바트화 사태를 감안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특히 국내 저축 은행을 비롯한 지방 은행 상태 역시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 서류는 저축 은행과 얽혀 있는 동남아 시장까지 다 조사한 내용이었다. 특히 태국이 바트화 사태로 흔들리면서 부실화 사태까지 이어진 것도 말이다.
기존 자료는 확률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일테면 태국 바트화 사태 때문에 태국 경제가 흔들릴 때 일어나는 현상을 시뮬레이션 형태로 설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자료는 좀 달랐다. 실제로 태국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태국 경제의 금융 부실이 동남아에 어떻게 전이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쉽게 말해서 동남아란 기업이 파산하게 될 때, 여기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인 한국이란 기업이 뿌리부터 휘청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실질적인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심지어 정부 관료가 끼어들어서 땜질까지 해놓은 내용도 있었다.
결국 정부가 세금으로 돌려막기 해서 구멍을 메꾸고 있다는 얘기였다.
“…….”
최용욱 회장은 안건민 회장이나 장승일 실장이 보고한 보고서와는 다른 내용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그도 X 리포터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보고받았다. 실제로 KM 그룹에도 구조조정을 감행해서 10개 계열사를 빼고는 다 정리했다.
물론 매각한 기업에 대한 후속 처리까지 끝내 놓았다.
10개 계열사 역시 돈이 안 되는 사업은 다 정리해 버렸다.
덕분에 KM 그룹 내의 현금은 넉넉하다 못해서 차고 넘쳤다.
그도 요즘 들어서 이 돈으로 인수합병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KM 센서를 설립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욕망은 아직도 뜨겁기만 했다.
평소와는 달리 굳이 손자를 찾아와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X 리포트가 예측한 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다만 X 리포트에서 얘기하던 것과는 달리 그 속도가 좀 늦어졌을 뿐이었다.
“하, 하지만 지금 상황은 X 리포트와는 좀 다른 것이 많아. 이대로 흘러간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 않아?!!”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이 계열사 매각 대금에 푹 빠진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 참 요사스럽구나.’
구조조정 이전의 KM 그룹은 정말 앞날을 걱정해야 했다. 그때는 이것저것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구조조정 이후의 KM 그룹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국내 30대 재벌 기업보다 회사 건전성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 X 리포트의 애기와 다른 단적인 경우라면 헤지펀드죠? 그런데 타이거 펀드는 이미 슬쩍 손을 뗐습니다. 그게 제가 한 일이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 말을 무시했다.
“타이거 펀드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이 바트화를 손절 하고, 에플 주식 매입을 늘렸습니다. 시즈벨이나 ARN 지분도 일부 인수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바트화 동력이 좀 떨어지죠. 그래서 태국 정부에 더 밀린 겁니다.”
“…….”
태국 바트화 사태 초창기에는 태국이 헤지펀드를 이기지 못했다.
그저 서로 팽팽하게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런데 타이거 펀드가 슬쩍 손절매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헤지펀드 연합군이 태국 정부에게 와르르 밀려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이게 역사의 회복성일까?’
최민혁은 쓰게 웃으면서 이 상황 변화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가 뭐 딱히 헤지펀드를 막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벌인 일 때문에 얘들도 지금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흐름에서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일 때문에 X 리포트에 몇 가지 구멍이 났다.
그는 차트로 나와 있는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자신이 손을 대서 일어난 변곡점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도,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최근엔 자신이 욕심 때문에 너무 나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차피 결국 일어날 일이었다. 애초에 미국이란 나라가 자신을 위험인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일본 대기업이 가진 MPEG-2 원천특허를 확보할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하면 ARN 지분 확보가 그것 때문이었느냐?”
“네.”
최용욱 회장은 다시 손자 최민혁이 한 말과 수정된 X 리포트를 곰곰이 읽어봤다. 그는 X 리포트를 읽으면서도 계속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안건민 회장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을 잘 따져 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안건민 회장 역시 심각했다. 이는 미래 수종 산업 선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가 최용욱 회장을 찾아온 것은 마지막 확인을 위한 작업인 셈이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일단 KM 그룹부터 말이다!”
최민혁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미 KM 그룹은 구조조정이 다 끝난 상황이니, 손실을 더 줄일 방법만 고민하면 됩니다.”
“…오성 전자는?”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해줄 겁니다. 대신 제가 본 이익에 대응하는 만큼의 인센티브 정보는 줄 겁니다.”
“안건민 회장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안건민 회장이 만약 속았다고 생각하면 너에게 보복할 거다.”
최민혁은 순순히 수긍했다. 오성 그룹은 구멍가게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만만하게 볼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만으로 골치가 아프니까. 적을 늘릴 수는 없지. 정확히는 두 세력이 오성 그룹과 엮이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으니까.’
그랬다.
최민혁이 굳이 오성 그룹을 계속 괴롭힌 것은 오성 그룹을 증오해서가 아니었다.
오성 그룹이 좋아서 사업부를 계속 팔아치운 것도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수작을 부린 0순위가 오성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오성 그룹이 자신에게 헛짓 못 하도록 사전에 개 목줄을 걸어놓은 것뿐이다.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안 그랬다면 골치 아프지.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증오는 쌓이니까.’
“전 최대한 오성 전자에게 그만큼 반대급부를 줄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안건민 회장이 결정할 겁니다.”
“…….”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손자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도 손자 최민혁이 유별나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잠깐 안 본 사이에 손자 최민혁은 자신이 아는 손자 최민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격이 달라진 것이었다.
무럭무럭 성장을 거듭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자신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손자 최민혁의 이야기로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이제야 이해했다.
안건민 회장이 손자 최민혁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말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참으로 대단하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굳이 최용욱 회장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최용욱 회장의 눈빛이 이전과는 아주 달라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우리 할아버지도 첫째 큰아버지 편만을 들지 않겠지.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거고.’
* * *
최용욱 회장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안건민 회장을 만나서 몇 가지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을 말해주었다.
안건민 회장은 최용욱 회장의 이야기를 순순히 듣기만 했다.
그 과정에서 ARN 지분 가치는 권태성 실장이 보고한 것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는 만약을 위해서 다시 권태성 실장에게 추가 조사를 시켰다.
안건민 회장에게 다시 지시를 받은 권태성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일을 다 조사했기 때문에 최민혁 실장이 ARN 지분 50%를 얼마에 인수했는지 뒤늦게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추가로 다시 ARN 지분 10%를 1억 달러에 사들였다.
얼핏 봐서는 대수롭지 않은 정보였다.
그런데 50% 지분 매각 대금이 오히려 10% 지금 매각 대금보다 낮았다.
황당한 사실은 최민혁 실장은 자신이 1억 달러에 10% 지분을 매입한 후에 다시 4억 달러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아마 모건 스탠리 쪽에서 이 지분 인수를 검토 중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최민혁 실장보고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권수 부장은 딱히 최민혁 실장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성능 ARN 사업부를 1억 달러에 인수했지 않습니까. 이전에 지분 매각한 것과 비교하면, 최민혁 실장이 양심은 있는 겁니다.”
황광수 차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거 다 합쳐도 고작 1억 2천 달러 가치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지분을 다도 아니고 고작 10%를 4억 달러에 매각하겠다고 주장하는 게 참으로 대단합니다. 오죽하면 안 회장님이 다시 검토 지시를 내렸겠습니까?”
“…….”
권태성 실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임권수 부장이 나섰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그 가격도 더 올릴지 모르지. 그리고 너무 최민혁 실장을 비난하지 마. 결국, 지금 상황을 만든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고, 거기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것이니까. 모건 스탠리 쪽에서는 진지하게 검토한다고 하잖아. 아마 목표는 처음부터 그쪽을 노린 것이겠지.”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