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98화 (795/1,021)

#798.

안 그래도 오성 그룹 내에서는 반도체의 뒤를 이을 미래 먹거리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21세기 수종 사업 선정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번 사장단 회의는 자율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권태성 실장이 나서서 자신이 최근 얻은 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히 ARN 지분 인수와 관련된 내용 말이다.

그런데 오성 그룹 사장 중에는 권태성 실장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오히려 자동차와 유통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자동차 산업은 지금이 들어가기 딱 좋은 기회입니다. 따라서 자동차 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더 늘려야 합니다.]

단순히 자동차 산업의 미래 때문이 아니었다.

자동차 회사끼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 틈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나온 것은 과다한 경비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안건과 관련해서는 반대하는 사장이 더 많았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자동차 사업 역시 ARN 지분 인수만큼이나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자동차 사업부 관계사 부사장은 자동차 사업에 대한 투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피력했다.

[가전 같은 경우는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사업이 아닙니다. 때문에 경쟁자가 바로 따라옵니다. LC 전자나 HY 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역시 무시하기 힘든 경쟁자입니다.]

[자동차 사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자동차 역시 예외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시간이 넉넉한 편입니다. 수종 산업으로는 이만한 아이템이 없습니다!]

자율 토론으로 진행되어서인지 계열사 사장은 각자 자기 관점에서만 의견을 피력했다.

조율이 잘될 리가 없었다.

“…….”

최학준 실장은 말없이 사장단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안건민 회장에게 이걸 잘 정리해서 보고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X 리포트 이야기는 아예 없구나.’

심지어 바트화 사태에 대한 말도 없었다.

ARN 지분 인수에 관한 이야기는 잠깐 언급되나 싶었을 뿐이다.

ARN 지분 안건을 꺼낸 권태성 실장은 그저 침묵만 했다.

그는 오성 그룹 사장단이 자신을 따돌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오성 전자 사장조차 권태성 실장을 은근히 무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최학준 실장도 그냥 입만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권태성 실장이 언급한 X 리포트 관련 리스크에 대해서는 의견이 없습니까? 이 안건은 국내 경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오성 전자 부사장 황준엽이 마음에 들지 않은 얼굴로 일축했다.

[X 리포트는 증권가의 찌라시 아닙니까. 그런 일을 사장단 회의에서 언급하다니, 최학준 실장은 생각이 있는 겁니까?!]

[…….]

최학준 실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보고서까지 꼼꼼하게 작성해 가며 뭔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챘다.

그런데 그게 막상 공개된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태국 바트화, 헤지펀드, ARN 지분 인수는 자동차 사업과 비교하면 덩치 차이가 너무 컸다.

‘위기감이 없는 것일까? 하긴 지금 경기가 아주 좋은 것도 있으니.’

비록 불협화음이 지방에서 나오고는 있지만 딱 제한된 부분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문제가 된 부분을 잘 처리해서 위기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겉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회장님은 이걸 알고 싶었던 것일까?’

* * *

태국 바트화 사태는 X 리포트가 예측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비슷하지만 조금 틀린 부분이 존재했다.

“…사장단 중에는 이 X 리포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네, 회장님.”

안건민 회장은 별다른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사장단 분위기는 어때?”

“신수종 사업에만 집착합니다. 외부 변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태국 바트화 문제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쯧.”

안건민 회장은 내심 혀를 찼다. 그런데 사장단 분위기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미래 먹거리 사업 후보로 자동차 산업을 세뇌에 가깝게 한 탓이다.

그는 자기 눈치를 보는 권태성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권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권태성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안재운 회장의 서재에 이렇게 호출된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안재운 보모 임무를 맡은 후에 일어난 일이라서 조심스럽기만 했다.

“저도 X 리포트를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한 바로는 최민혁 실장이 모건 스탠리와 협상할 때 요구한 것이 바트화 사태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바트화 작업에 끼고 싶다고 했습니다.”

“헤지펀드가 하는 환투기 말인가?”

“네.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민혁 실장은 그쪽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만약 최민혁 실장이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바트화 사태는 X 리포트처럼 흘러갔을 겁니다. 최민혁 실장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일 때문에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모건 스탠리가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잽을 날렸으니까요.”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씩 다 풀어냈다.

최민혁 실장 스토커라도 되는 것처럼 그 내용은 꽤 구체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ARN 지분 매각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다.

“사장단 회의 때 그 이야기를 해도 귀 기울이는 놈이 하나도 없어?”

“…죄송합니다.”

안건민 회장은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성 그룹 사장단의 회의 분위기가 그랬다면 다른 그룹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보다는 굳은 얼굴로 최학준 실장이 최종 정리한 보고서를 꼼꼼히 읽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의도한 바가 있는 것 같은데?”

“단순히 ARN 지분 매각만이 목적은 아닐 겁니다. 지금 봐서는 콜린스 사업부 역시 매각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 X 리포트 상황에서 콜린스 사업부 인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최학준 실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성 전자는 KM 전자와는 규모 자체가 다릅니다. 해외 공장 쪽에 콜린스 생산을 맡겨도 충분합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 쪽은 더 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국내에 어떤 문제가 터져도 콜린스 사업 자체가 오히려 버퍼가 됩니다.”

오성 전자의 콜린스 사업부 인수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오성 전자 내부 생산 변화 보고서에 그 내용이 아주 자세히 나왔다.

안건민 회장은 그제야 이번 보고서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욱이 X 리포트에서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부분을 읽었다.

‘이것 때문에 사장단 회의에서 의도적으로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무시했어.’

그랬다.

오성 그룹 사장단이 바보라서 권태성 실장의 안건을 무시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자동차 산업이 더 중요했다. 안건민 회장의 관심사가 자동차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X 리포트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었다.

‘그럼 자동차 산업은 아니라는 건데…….’

사실 이게 참 문제였다.

달랑 이 보고서 하나만으로 X 리포트처럼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안건민 회장은 고민한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KM 그룹 비서실에 연락해서 내가 지금 간다고 연락해.”

“…알겠습니다.”

정확히는 최용욱 회장의 위치를 알아서 약속을 잡으라는 말이었다.

최학준 실장은 그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이게 정말일까?’

* * *

최민혁도 오성 전자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기에 안건민 회장이 갑자기 최용욱 회장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연락받았다.

“으음.”

조성돈 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최용욱 회장님에게는 말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요?”

“네? 지금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정확히 무슨 일 말입니까? 안건민 회장이 저렇게 나설 일은 원래 아니었어요. 이번 일은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하죠.”

“네? 하, 하지만 회장님이 분명히 이번 일을 가지고 문제 삼…….”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그리고 안건민 회장이 뭐 특별합니까. 솔직히 전 미국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이 더 불편합니다. 그 양반의 미국 정부 내의 영향력이 어떤지 아세요?”

“아, 그거야 그렇지만…….”

“이번 일도 결국에는 미국 재무부 일과 얽혀 있어요. 너무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그 사소한 것이 안건민 회장으로 인해 실질적인 위험이 되지는 않을까요?’란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최민혁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이놈의 재무부 일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자신이 수습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지켜만 봅시다. 어차피 불구경입니다. 팝콘이나 먹으면서 정보를 놓치지 마세요.”

“…네.”

조성돈 팀장도 천하태평한 최민혁 실장 태도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다.’

* * *

오성 전자는 이미 반도체 사업을 글로벌 규모로 키울 계획이었다.

반도체 소비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미 2000년까지 중국, 미국, 유럽, 동남아에 각각 공장 증설해서 30%까지 키울 생각이었다. 미국 텍사스 공장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다.

안건민 회장은 이와 관련된 자세한 보고를 받은 터라 ARN 지분 인수 제안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자동차 사업을 떠올렸다.

‘차라리 반도체에 올인 하는 것이 옳을까?’

그로서도 선뜻 판단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는 이런저런 고민을 한 끝에 KM 그룹 본사를 방문해서 최용욱 회장을 만났다.

“갑자기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도 크게 당황했다. 안건민 회장의 행동이 무례해서가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실무진을 통해서 간단히 전화로 해결하던 걸 이렇게 안건민 회장이 직접 찾아오는 게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야 KM 그룹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어서 안건민 회장한테 이렇게 저자세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오성 그룹과 KM 그룹은 체급 차이가 전혀 달랐다.

그런데 안건민 회장은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시인하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HY 전자가 미국 오리곤에 25억 달러 규모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건설한 소식은 들었을 겁니다. 미국 시장을 허브로 삼은 겁니다.”

HY 전자만이 아니었다. LC 반도체 역시 이미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서 일본 히타치와 손을 잡았다. 심지어 독일 업체도 끌어들였다.

HY 전자와 LC 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더 많은 투자를 벌였다.

안건민 회장도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자동차 사업에 투자할 자금으로 반도체에 더 투자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최용욱 회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묵묵히 안건민 회장 입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안건민 회장이 말하는 것은 유럽 시장이 아니었다.

“미국 투자를 늘린 것은 미국 정부의 요청에 어느 정도 따른 겁니다. 미국 재무부 같은 기관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정확히는 미국 IRS다.

IRS 상부 기관이 미국 재무부이니까.

안건민 회장은 최민혁 실장처럼 미국 정부에 찍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직 오성 전자가 그 정도 깜냥은 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다만 안건민 회장도 고민이 많았다.

“지금 말하는 것은 주로 메모리 시장 쪽입니다. 비메모리 쪽은 파고들기 어려웠으니까.”

주로 미국 정부가 신경을 쓸 정도로 덩치가 비메모리 사업 쪽이다.

인텔이 대표적이다.

일부 투자를 위한 지분 확보가 아니라 경영권 간섭을 알게 모르게 막은 것이다. 아니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압박하든지 말이다.

“…….”

최용욱 회장은 안건민 회장이 왜 자신에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결국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역시 알음알음 아는 사실이니까.

안건민 회장은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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