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6.
애초에 오성 전자 기획실 역시 이 안건에 주목하기는 했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밝혀낸 덕분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는데,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뀐 셈이었다.
KM DVR의 성능은 단순히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특히 동영상 정지 압축 기술은 세계 최초로 나온 것이기도 했다.
미국 언론이 굳이 KM DVR를 솔루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미국 연방 정부 관할 기관에서 KM DVR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봤다.
[이, 이게 가능했어?]
권태성 실장 자신의 사내 정적인 양종식 전무가 자신의 측근을 데리고 회의실을 직접 찾아와서 한 평가였다.
“…….”
그는 아무런 말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 자신 역시 KM DVR과 ARN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서 오성 전자 측은 ARN과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이걸 명분 삼아서 권태성 실장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
권태성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실상 이 KM DVR 샘플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뀐 셈이다. 오성 전자 반도체 역시 이 고성능 ARN에 대해서 ARN과 손을 잡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게 단순히 ARN 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공지능 애니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애니에 대한 관심은 오성 전자 내의 모든 연구소가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당장 가전 쪽에서 써먹을 수가 있다.
이 애니 생태계가 가능하다면 오성 전자는 다른 국내 가전 회사뿐만 아니라 일본 대기업과의 전쟁에서도 한 발 앞서 나갈 수가 있었다.
한 단계 강력한 기술이라면 기술적으로 다른 대기업들을 압박하고도 남았다.
이전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기술이 아니라 최소한 프리미엄 제품에는 반드시 적용해야 했다.
권태성 실장은 묵묵히 침묵했다. 그는 연구원들이 이쪽저쪽에서 KM DVR 팸플릿, 기술 자료, 고성능 ARN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서 소통하는 것을 쳐다만 보았다.
KM DVR 때와는 달리 반론을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다들 놀랄 뿐이었다.
[아니, MPEG-2 표준화는 이제 한창 진행 중인데, 벌써 상업용 제품이 나온 거야? 그러면 지금 진행하는 국제 표준화 작업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이것도 최민혁 실장 입에 떡 먹여주는 거야?]
[이거 문제가 안 되는 거야? 우리야 그렇다고 해도 다른 나라는 이야기가 다르잖아. 최민혁 실장을 위한 밥상을 차려줘야 해? 미국 같은 나라가 그걸 용납할 리가 없잖아.]
[이제까지는 몰랐을 거야. 이 KM DVR이 세계 최초로 나온 것이니까.]
정작 이슈가 되어야 할 이미지 센서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아직 KM 센서 측에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 허탈한 탄식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MPEG-2 표준화 관련된 연구는 오성 전자 내에서도 진행 중이었다. 심지어 수백 건의 특허를 발표했고, 워킹 그룹에도 참석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다만 돈이 되는 핵심 특허는 아니었다.
있기는 있어도 그 수량은 고작 31건에 불과했다.
자사 특허는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일본 대기업이 보유한 핵심 특허마저도 이미 최민혁 실장의 수 중에 다 들어간 지가 오래였다.
[이 특허는 원래 일본 대기업 소유 아니었습니까?]
미쓰비시, 마쓰시타, 도시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과 직접 싸운 연구원들은 다들 이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로 확인까지 했다.
그다음에 허탈한 얼굴을 한 채 들어왔다.
[팔았다네요. 하, 쪽발이 새끼들이 제대로 미쳤어.]
일본 측 담당자도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서 매각 내용만 말했다.
사실 퇴직 직원이 세운 회사 쪽에 넘긴 일이었지만 그건 당사자나 로비를 받은 고위층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아무리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자기 밥그릇을 깨는 놈이 어디 있어? 일본 애들이 그렇게 멍청해?]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음모론 이야기가 또 나왔다.
[저도 인터넷 쇼핑하다가 본 이야기인데, 냅스트 알죠? 그걸 최민혁 실장이 설계해서 의도적으로 미국에 뿌렸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거 숀 페닝이 세운 회사 소유 아닙니까?]
[그게 소송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숀 페닝 자신이 설계한 것이 아니라 학교 게시판에 올라온 소스를 수정해서 자신이 만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학교 게시판에 냅스트 소스를 올립니까?]
[아, 그러니까요. 그것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냅스트 때문에 지금 인터넷이 난리가 났잖습니까. 특히 MP3 플레이어는 제대로 주목을 받았고요. 국내 MP3 업체가 갑자기 늘어났고, 그들이 일본 수출을 시작으로 동남에서도 대박 쳤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낸 특허료가 장난 아닙니다. KM 전자 특허 로열티 수익이 벌써 5억 달러를 넘었다고 하니까요.]
[아!]
다들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왜 음모론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MP3 플레이어를 파는 업체들도 돈을 많이 벌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 등에 빨대를 꼽아놓고, 쪽쪽 빨아먹는 KM 전자만큼은 아니었다.
KM 전자는 막말로 놀고먹으면서 무려 5억 달러를 챙겼다.
물론 그 이익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KM DVR에 적용된 MPEG-2 특허료는 또 별개였다.
[모토롤라가 K투스 특허 협상을 끝냈다고 했으니, 그 이익은 더 클 겁니다.]
“…….”
권태성 실장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한창 개발 중인 KM DVR이나 고성능 ARN 자료를 자신에게 제시했는지 깨달았다.
‘역시 그랬구나.’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숨겨놓았다가 이제야 팍 터뜨렸다.
심지어 이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뒤늦게 회의실에 참석한 안재운 전무는 이미 안건민 회장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굳은 안색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권 실장님, 이 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전략 기획실에 자료를 넘겼고, 그쪽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가 오히려 안 전무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회장님이 말씀 안 하세요?”
“아버지 말씀인가요? 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떤 지침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권태성 실장은 생각보다 너무 복잡한 상황에 바로 질문했다.
“다만 뭐죠?”
“…권 실장님과 잘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렸을 때는 책임을 묻겠다’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승계 문제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안재운 전무는 안건민 회장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따로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래서 권태성 실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중에도 두 사람의 눈치를 본 연구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일본 대기업이 가진 특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이가 추가로 정보를 확인한 것이었다.
[쪽발이 새끼들이 미친 것 아닙니까? 아니, MPEG-2 특허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최민혁 실장에게 넘겼다는 말입니까?!]
제법 일본통인 임직원은 꽤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 시즈벨 쪽에 넘겼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시즈벨 일본 지사 쪽입니다. 그쪽은 미쓰비시, 마츠시다, 도시바 퇴역 직원이 세운 회사라고 합니다.]
[하, 그 말은 아직도 그놈들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직 형식적으로는 일본 시즈벨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하, 대단하다. 그러면 이건 또 뭡니까?]
[MPEG-2 특허를 적용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
그제야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권태성 실장과 안재운 전무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들 이 상황을 잘 이해를 못 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양종식 전무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 역시 오성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권태성 실장은 점점 시끄러워지는 회의실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본 대기업이 가진 MPEG-2 특허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이봐, 임 부장, 기획실 결론은 뭔가?”
“…ARN 가치 평가 말입니까?”
“우리가 DVR 사업을 당장 할 것은 아니잖아.”
“…….”
임권수 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ARN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눈만 도르르 굴렸다.
KM DVR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정작 ARN 이야기였다니.
다들 크게 당황했다.
KM DVR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때문에 ARN 이야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늦게야 ARN 코어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 정도 성능의 ARN이라면 다시 검토를 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어, 그러네. 이게 다르네요. 아, 그래서 KM DVR의 상업적인 가치가 올랐구나.]
그제야 회의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갑자기 이 자리에 참석한 팀장급들이 다들 다시 자료를 하나씩 들췄다. 그들 중에는 권태성 실장을 째려 보는 이도 있었다.
권태성 실장이 처음부터 잘 설명했으면, 쉽게 이해를 했을 테니 말이다.
권태성 실장은 그 시점에 끼어들었다.
[내일 오후 5시에 다시 회의를 열겠습니다. 필요한 사람은 각자 조사해 보기 바랍니다.]
[…네.]
* * *
오후 회의 분위기는 시작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일단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있었다.
다만 그때의 당사자는 대체적으로 중견기업인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 오성 전자가 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오성 전자는 굳이 그 회사와 협업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계열사를 하나 꾸려서 독자적으로 진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래 왔다.
괜찮은 중소 기술 기업을 가로채서 말이다.
그런데 ARN은 그럴 수가 없었다.
ARN과 연동된 MPEG-2 특허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적인 예로 MPEG-2만 해도 원소유권자가 일본 대기업이었다.
그런데 그 소유주가 최민혁 실장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만만한 기업들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은 마음만 먹으면 기업을 인수합병해서 얼마든지 일을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실제로 고성능 ARN 사업부 인수가 그 대표적인 결과였다.
양종식 전무조차 입맛을 다셨다.
‘한국 기업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대안이 많았다.
은행을 통한 자금 압박을 넣거나, 아니, 검찰 조직을 이용해서 협박해도 된다. 필요하다면 국세청을 이용해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에게는 그 모든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기획 1팀에서 메모리 기획을 담당하는 정형식 팀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이 고성능 ARN 산업이 성장한다면, 우리 메모리 사업부에는 호재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전 대책을 진행해야 합니다.”
해외 마케팅을 담당해서 시야가 넓은 기획 2팀 강석영 부장이 슬그머니 뒤를 이어서 말했다.
“비록 인공지능 부품 단가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단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업은 전례가 없었습니다.”
원래는 인공지능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낸 이였다.
그런데 벌써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그제야 이런저런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이거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팀을 꾸려서 최민혁 실장이 아니면 KM 전자 실무진이라도 만나야 합니다.]
[차라리 지금이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웠으니, KM 전자 실무진이라면 오히려 상대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KM DVR 성능을 직접 확인해 본 이들이었다.
“…휴우.”
권태성 실장은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한숨을 내쉬었고, 일단 회의를 이대로 끝내 버렸다. 더 논쟁을 벌여봐야 나올 의견이 뻔했다.
오성 전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매달리면, 최민혁 실장이 제안할 지분 매각 단가는 폭등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권태성 실장에게도 부담스러운 결과였다.
‘…이게 최민혁 실장이 원한 것이겠지?’
어째 이상하게 최민혁 실장이 잘해준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살짝 한 꺼풀만 뒤집어보니, 전혀 그게 아니었다.
‘괜히 보고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