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안재운 전무를 데리고 KMBOOK 사무실을 나섰다.
“이번 일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건 남녀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 속히 뻔히 보이는 말.
그는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안재운 전무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번 일은 예상한 것보다 더 잘 풀렸다.
‘아무래도 ARN에 대해서 한번 알아봐야겠어. 어차피 ARN 지분 매각 소리가 있으니까. 우리 측에서 ARN 기술이 필요할 수도 있어. 어쩌면 ARN 지분을 인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다만 그때 떠올린 것은 역시 최민혁 실장의 얼굴이었다.
이번 일을 가지고 오성 전자에서 얼마나 뜯어내려고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콜린스 사업부 인수하고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어.’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은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한다고만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확실히 KM 전자 사업과 콜린스 사업의 방향은 좀 다른 것 같아.’
* * *
최민혁 실장은 권태성 실장에게 정보를 흘려 놓고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번에는 과연 권태성 실장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했다.
최근 거리를 둔 것 때문에 권태성 실장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대답으로 두 미녀가 갑자기 찾아왔다.
이지수 박사와 헬렌은 아예 노골적으로 오성 전자를 씹었다.
“살다 살다 그런 놈은 처음 봤습니다!”
“남자가 왜 그렇게 질척대는지 모르겠어요. 지가 재벌 3세면, 여자는 다 끔뻑 죽는다고 생각한다니까!”
최민혁은 인생 1회 차에서 실제로 본인이 질척대 봤기에 움찔 몸을 떨었다.
“싫다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역시 다시 전생을 떠올리면서 시선을 슬쩍 피하고 말았다.
‘안재운 이 새끼가 정말 재벌 3세 망신 다 시키네!’
“최민혁 실장 때문에 이제까지 참았는데, 정말 견디기 어려워요. 왜 그렇게 들러붙으려고 하는지, 고소하려다가 참았어요.”
다시 한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역시 비슷한 행동을 했기에 혀를 차고 말았다.
두 사람이 하는 불만은 다 자신이 인생 1회 차에서 다 했던 일들이었다.
“…….”
‘병신.’
최민혁은 내심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은 그래도 힘없는 재벌 3세였다고 스스로 자기 변명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는 새삼 이지수 박사와 헬렌의 이상형을 떠올려 보았다.
‘하긴 자기 꿈이 있었지.’
특히 이지수 박사는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 연구에 미쳐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독보적인 성과를 이룩한 것이었다.
헬렌은 그런 이지수 박사를 너무 사랑했다. 그녀는 그래서 이지수 박사와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한 것이다.
최민혁조차 전생에서 이 초미녀의 성향에 대해서 잘 몰랐기에 안재운 전무같이 들이대다가 병신 취급 당하고 말았다.
그는 그나마 이영민의 유언 때문에 이지수 박사와 끝까지 갔다.
그런데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이지수 박사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시행착오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결국 원수지간이 되고 난 후에야 이지수 박사의 마음을 알았다.
최민혁이 굳이 초미녀 두 사람과 거리를 두는 이유였다.
‘시간이 답이야. 같이 아웅다웅하다 보면, 정이 들 수밖에 없지.’
그는 오히려 안재운 전무가 고마웠다.
안재운 전무가 진절머리 나는 남자 역할을 톡톡히 할 터.
자신은 덕분에 앉아만 있어도 괜찮은 남자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헬렌은 그런 최민혁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콜린스 매각? 아니, 왜 우리가 그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거죠?!”
“…….”
최민혁도 콜린스 매각 건 관련해서는 헬렌의 잘못된 판단을 교정해 주려다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이지수 박사도 계속해서 쌓인 앙금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개인적인 일이었다면 두 사람 따위는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헬렌은 특히 오성 전자에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안재운 전무를 씹었다.
“기름 뱀장어를 보는 것 같아서 정말 혐오스러워요. 도대체 왜 오성 전자와 너무 거리를 두지 말라고 하시는 거죠?!!”
최민혁은 칭얼거리는 두 미녀가 생각보다는 자신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벽 방어 스킬을 사용하던 헬렌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분노한 두 미녀를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오성 전자와는 그만큼 꼬여 있기 때문이다.
‘콜린스도 매각해야 하고, 반도체 사업도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스마트폰 생산도 맡겨야 하고, 이것저것 뜯어먹기도 해야 하니까. 흠.’
특히 지금 이 시점에서 고성능 ARN 제작과 관련해서는 오성 전자를 빼놓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그는 무려 20분 가까이 안재운 전무를 씹다가 지친 두 미인에게 선물로 받은 와인을 내밀었다.
“…술 한잔씩 하시죠. 1895년산 샤토 라피트입니다.”
1895년 산이면 거의 100년 가까이 오래된 와인이었다.
“……!”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이거 펀드의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이 선물로 보낸 겁니다.”
“아, 네, 네?!”
두 사람도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갑자기 줄리엇 로버트슨 회장 이름이 나올지는 몰랐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돌아가는 상황부터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애니 탑재 가전제품도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닙니다. 물론 미국 가전 회사와 손을 잡는 방법도 있지만, 오성 전자만큼 괜찮은 파트너도 없습니다. 지금처럼 부품 단가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오성 전자는 적극 대응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일은 KM DVR를 둘러싸고 이리저리 꼬인 일이 꽤 복잡하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미국 재무부까지 얽혀 있어요. 오성 전자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조연입니다.”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아니, 그게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다는 거죠?”
최민혁은 이들이 얽힌 일을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이게 사실은 저도 원한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시간이 빡빡해서 일단 상황을 쉽게 풀어가야 하니까.”
꽤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에 두 미녀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 이 와인도 마시면서 말이죠.”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의 말에도 놀랐고, 거의 100년이나 된 와인에도 시선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는 최민혁의 설명을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아 눈을 감은 채 혀끝으로 와인 맛을 감상했다.
헬렌 역시 와인의 품종, 토양, 양조 과정을 떠올리면서 와인 맛을 즐겼다.
두 사람은 그제야 와인가즘에 빠져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
최민혁 실장은 동서양 화보나 마찬가지인 두 미녀의 와인 시음에 혀를 내둘렀다. 그도 막상 눈앞에서 두 미녀와 와인을 같이하는 자리라서 가슴이 떨렸다.
촉촉한 붉은 입술과 와인의 만남.
보는 것만으로 시선을 떨치기 어려웠다.
경호원이 힐끗힐끗 두 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최민혁은 그 와중에도 마치 손자를 앞에 두고 옛날이야기를 하는 조부처럼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는 어느 정도 설명을 끝낸 후에 StrongARN과 관련된 자료를 이지수 박사와 헬렌에게 넘겼다.
“…이건 뭐죠?”
최민혁은 씩 웃었다.
“제가 지금 설명한 것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애니의 성능 조정이 필요할 겁니다만 임베디드 환경 내에서 애니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이 올 겁니다.”
이지수 박사에게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 역시 이미 과거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 사전에 검토했기 때문이다.
“최 실장님이 그 분야를 잘 몰라서 그렇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StrongARN의 현재 성능과 향후 로드맵 성능을 확인하고는 문서를 후다닥 넘기기 시작했다.
ARN 성능으로 애니를 이용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고성능 ARN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물론 기존 애니 포팅이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넌지시 한 가지 보고서 하나를 더 내놓았다.
“…정 무리라면 고성능 ARN 기술을 이용한 AI 칩 제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거라면 성능 한계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이미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이 고성능 ARN이 정말 가능해요?!”
최민혁도 고성능 ARN 성능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DEC 엔지니어가 죽으라고 해서 한 결과물이니, 전혀 거짓은 아닐 겁니다.”
이지수 박사는 믿을 수 없는 최민혁 실장의 말에 흥분하고 말았다. 그녀가 오성 전자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이런 기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성능 ARN 기술이 가능하다면 상황이 좀 달랐다.
오성 전자를 싫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산업을 일굴 수가 있었다.
그 일은 그녀 자신의 꿈 중의 하나였다.
“이, 이거 샘플을 받을 수 있나요? 잠깐만, 이 기술을 이용한 AI 칩 제작이 가능해요?!!”
최민혁 실장은 얼음 공주 같았던 이지수 박사의 표정이 확 달라진 것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헬렌의 요상한 시선에도 물론 피식 웃었다.
“가능하기는 한데, 수율이 높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오, 맙소사, 이, 이게 정말 가능했어?!”
헬렌이 옆에서 소리쳤다. 그녀도 이지수 박사와 같이 일하면서 반도체 기술의 한계를 느꼈다. 그 덕분에 해보려고 했던 많은 시도를 접어야 했다.
하지만 고성능 ARN 기술이 있다면 상황이 좀 달랐다.
오성 전자에서 요청한 부분까지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었다.
사실 고성능 CPU 개발을 위해서는 반도체 제조 기술이 필요했다.
불행히도 그 기술은 자본과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왜 최민혁 실장이 오성 전자와의 관계를 가능하면 유지해 달라고 한 건지, 그 조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최민혁은 불행히도 반도체 로드맵 정보를 알지만, 자세한 것까지는 몰랐다.
‘이지수 박사가 그쪽은 잘 몰랐으니까.’
이지수 박사가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었다.
인공지능 기반 기술에는 해박해도 반도체 제조 기술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설사 그 기술을 안다고 해도 최민혁은 굳이 반도체 제조 기술까지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두 분이 더 잘 아시겠지만, 반도체 제조 기술도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 중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벌이는 곳 중의 하나가 오성 전자입니다.”
반도체 투자에 열을 올리는 기업 1위는 역시 인텔로, 33억 달러를 투자했고, 2위는 모토롤라이다.
3위, 4위는 놀랍게도 오성 전자와 LC 반도체였다.
“1위는 인텔로, 이들은 지금 고성능 CPU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다만 고성능 모바일 CPU 역시 지켜보고는 있습니다. 이번에 DEC 반도체 사업부 인수 협상을 한 것도 그런이유였죠.”
하지만 그 회사를 중간에 가로챈 것은 최민혁 실장 본인이었다.
“…….”
최민혁 실장의 차분한 설명에 두 사람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볼이 빵빵한 것을 봐서는 최민혁 실장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오성 전자가 반도체 산업에서 꽤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인텔이나 모토롤라는 결코 우리 쪽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굳이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워서다.
인텔은 내부 기술을 가지고 최민혁 실장과 상담할 이유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두 분이 원하는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파트너로 꼽을 수 있는 곳이 LC 전자와 오성 전자입니다.”
헬렌이 안재운 전무의 얼굴을 떠올린 후에 참지 못해서 소리쳤다.
“수긍하기 힘드네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말은 두 분이 안재운 전무를 접대하거나 따로 만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넘으면 바로 경찰에 넘겨 버리세요. 필요하다면 경호원에게 부탁해서 손을 봐줘도 됩니다. 다만 비즈니스 자체를 끊지는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하.”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두 사람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