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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90화 (787/1,021)

#790.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지수 박사가 이미 검증한 부품을 써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는 점이다.

안재운 전무는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러면 에플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이렇게 우리와 에플에 차별을 두는 겁니까? 이지수 박사님은 한국 사람 아닙니까?!!”

길길이 날뛰는 안재운 전무의 모습은 과한 면이 많았다.

그는 교묘하게 애국심이라는 화두를 내놓았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도였다.

“제가 알기로 인종차별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은 것으로 압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당하기만 할 겁니까? 제가 기회를 주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 박사님을 괴롭힌 놈들에게 한 방 먹이세요. 제가 판을 깔아놓겠습니다!!”

“…….”

이지수 박사는 짜증스러웠다. 안재운 전무가 자기 일을 도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사 돕는다고 해도 안재운 전무의 말처럼 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굳이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망설인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나마 최민혁 실장의 사업 자체는 일반 제조와는 많이 달라서 괜찮았다.

설사 테일러 가문이라고 해도 최민혁 실장을 쉽게 건드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그 결과가 모건 스탠리와의 대립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모건 스탠리와 갈등하면서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아, 아니구나. 재무부가 있었구나.’

하지만 그녀도 최근 개인적인 통로로 알아본 바로는 테일러 가문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최민혁 실장의 능력 덕분이니까.

이런 내막을 어느 정도 들은 헬렌이 삿대질까지 하면서 끼어들었다.

“그래, 난 미국인이다. 이지수 박사 역시 미국인이야. 모르고 있었어?!”

“하, 헬렌 씨에게 하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안재운 전무는 항의하면서도 헬렌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그는 눈까지 깔면서 슬쩍 그녀 눈치를 봤다.

사실 그도 처음에는 한국에서 하듯이 갑질을 좀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런 시도는 아예 먹히지 않았다.

벌써 5번이나 샌프란시스코 경찰에게 끌려간 경험이 있어서인지 헬렌의 눈치를 계속 봤다.

물론 단순히 샌프란시스코 경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헬렌 역시 그가 노리는 리스트에 올라 있으니까.

이지수 박사와는 다른 부분에서 헬렌의 미모는 빛을 발했다.

특히 금발이 말이다.

이지수 박사는 어지간해서는 입을 다물까 하다가 설명해주었다.

“에플에서 사용된 애니는 에플 CPU를 바탕으로 설계된 거라고 수차례 말했습니다. 냉장고와 같은 가전에 들어가는 내장형 CPU로는 애니 성능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랬다.

아이컴은 기본적으로 데스크톱용 CPU가 탑재되어 있었다.

8051과 같은 임베디드 형태의 제품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성능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안재운 전무는 무식한 데는 약도 없다는 말의 표본처럼 반박했다.

“아뇨.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에플에서 했는데, 우리 오성 전자라고 못 할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다른 대안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지수 박사님이 한국에 가서 도와주십시오. 보상은 분명히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오성 전자의 지분을 넘길 용의도 있습니다!”

헬렌이 비아냥거렸다.

“결과물이 나온다는 조건으로?”

“네! 당연합니다. 오성 전자 지분을 보상으로 넘기는 일입니다. 아무런 결과도 없이 지분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겉으로 봐서는 진심 어린 호소이기는 했다. 다만 안재운 전무의 눈빛이 이지수 박사와 헬렌을 향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자와 비즈니스 문제 양쪽을 잡겠다는 의지였다.

헬렌의 입장에서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지겹네요.”

이지수 박사는 테일러 박사 시즌2 같은 느낌에 치를 떨었다. 뭐 이런 남자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안재운 전무가 저렇게 집요하게 구는 것은 단순히 스토킹 때문이 아니었다.

권태성 실장이 뒤에서 안재운 전무를 은근히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오성 전자의 가전 사업부 매출과 미래 먹거리 때문이었다.

오성 전자에게 이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한 것 중의 하나가 기업 설명회에서 LC 전자랑 시장점유율을 가지고 싸운 사건이다.

오성 전자에서 발표한 내용에 LC 전자가 태클을 걸 정도였다.

두 회사는 TV, VCR, 세탁기, 전자레인지 시장 점유율을 내세워서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이 사소한 일조차 회사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애니 기술을 가전제품에 적용할 수 있다면, 매출 차이가 크게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점을 내세우면서 이지수 박사와 같이 일하라면, 정이 들 수도 있다고 넌지시 운을 뗐다. 솔직히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이지수 박사는 계속해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안재운 전무는 넌지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아파트, 냉장고, 세탁기, 조명 등을 같이 결합해서 개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수 박사님이 직접 한국에 가서 우리 오성 전자 엔지니어와 같이 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헬렌이 다시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지수 박사님이 바쁘다고 한 것 같은데, 전혀 이해를 못 하네요.”

하지만 안재운 전무는 이전의 그 소심한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지수 박사에게 눈이 돌아가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남자처럼 처연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오성 전자 가전 사업부가 사활을 건 일입니다. 두 분에게 그만한 보상을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댁이 말하는 그 보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니까!”

에플과의 코웍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에 뭔가 씐 안재운 전무는 이런저런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제안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최민혁 실장이 사전에 손을 쓰지 않았다면 수긍했을 정도로 좋았다.

안재운 전무의 말은 실제로 일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테일러 박사 측에서 한 제안을 씹었을 정도이니까.

“제안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럴 여건이 안 돼요. 다만 일단 지금 컨설팅하는 일은 최대한 도와 드리겠습니다.”

안재운 전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계속 부탁하다가 일단 사무실을 나가고 말았다.

* * *

안재운 전무가 사라진 이후에도 오성 전자에서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다들 이지수 박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면 이지수 박사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정을 알고 나서야 최민혁 실장이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이지수 박사를 끌어들인 것인지 알았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모든 일은 이지수 박사의 경력과 서로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이걸 단순히 운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권태성 실장 역시 잠깐 쉬는 틈에 임권수 부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알아. 이제는 오성 전자 중앙 연구소나 오성 종합 기술원에서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말이야.”

특히 이지수 박사의 인공지능 기술은 단순히 학술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상업화 단계를 넘어섰다.

에플 차세대 제품에 적용된 기술이 그것이니까.

이건 다르게 말해서 오성 그룹 역시 전략적으로 인공지능에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지수 박사 한 사람만 스카우트할 수 있다면 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양종식 전무조차 이지수 박사 스카우트 건을 전략 기획실에 보고했습니다. 전략 기획실에서도 이지수 박사 스카우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지수 박사의 부모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이지수 박사 부모라면…….”

“이영민이라는 사람인데, 미국식 이름은 데니스 리입니다.”

이영민은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금융 전문가였다.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 봐서는 월가에서도 꽤 명성이 자자했다.

더욱이 임권수 부장이 추가로 받은 정보는 최민혁 실장이 흘린 정보였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너무 많이 얽혀 있는 정보부터 의심했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 싶었다.

‘설마 또 최민혁 실장의 흉계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최민혁 실장이 꼼수를 부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안건을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때문에 슬그머니 이지수 박사를 다시 찾아가서 말했다.

“혹시 이 박사님이 진행하는 일이 ARN이 최근 인수한 고성능 ARN 코어하고도 관련이 있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지수 박사가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ARN의 행보는 더 몰랐다.

권태성 실장은 슬쩍 자신이 얻은 최근 정보 보따리를 풀었다.

“에플 CPU 기준으로 애니가 설계되었다고 했는데, 만약 임베디드 CPU 성능이 좀 더 올라가면 애니를 수정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고려해서 추리했다.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흘린 터라 그 정보는 꽤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확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최근 캘리포니아 소녀 납치 사건을 뉴스에서 봤고, 다양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고성능 ARN이라,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기존 ARN은 성능이 너무 별로라 아예 배제 대상이었으니까.”

권태성 실장은 힐끗 안재운 전무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이지수 박사에게 푹 빠져서 맛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이를 보고 권태성 실장이 혀를 찼다.

‘내가 넌지시 의견을 내놓기는 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로서는 참 아쉬웠다.

최민혁 실장이 이지수 박사를 선점하지 않았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대신 안재운 전무가 이지수 박사에게 집요하게 매달린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어떻게 보면 고성능 ARN 정보는 그 연장선이었다.

“만약 기존 ARN 성능보다 발전된 ARN이라면, 애니의 상업적인 가치는 더 올라가지 않습니까?”

이지수 박사는 순순히 수긍했다.

“물론이죠. 아마 다시 테스트를 해봐야 할 수준일 겁니다.”

‘역시.’

권태성 실장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이전에는 그저 최민혁 실장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기에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의 성격을 잘 몰랐다.

이 자리에서 직접 경험하고서야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이 모두 얼마나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MP3 플레이어, ARN, 콜린스, IPS-LCD, K투스, 무선랜과 같은 원천기술 말이다. 하나하나만 놓고 봐도 놀라운 기술이다. 그런데 그 기술을 다 합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형성한다.

거기에 이지수 박사의 경력은 이런 기술과도 다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게 최민혁 실장이 늘 말하는 디지털 세상을 구성하는 요인일까?’

그렇다면 최민혁 실장이 삼고초려까지 해서 이지수 박사를 끌어들인 것도 말이 된다. 막대한 KMBOOK 지분을 선뜻 넘긴 것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동 프로젝트에 신경을 더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자금은 우리 쪽에서 다 충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작은 금액이…….”

“아뇨. 1억 달러이든, 아니면 3억 달러이든 자금은 우리가 다 대겠습니다.”

뒤늦게 다시 사무실을 찾은 안재운 전무가 바로 끼어들었다.

“역시 권 실장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

권태성 실장은 슬쩍 안재운 전무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헬렌과 이지수 박사의 안색이 바로 바뀌었다.

이지수 박사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 일은 최민혁 실장님과…….”

안재운 전무가 버럭 소리쳤다.

“그놈의 최민혁 실장, 솔직히 이지수 박사님이 뭐가 아쉬워서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봅니까. 필요하다면 우리 오성 측에서 위약금을 다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 오세요!”

이지수 박사는 혀를 찼다. 그녀도 생각 같아서는 이들을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제발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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