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9화 (786/1,021)

789.

한병수 실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무려 3억 달러 물량의 공급 계약이다. LC 전자는 이미 LCD 분야에 무려 5천억을 투자해서 구미 공장을 증설했다.

이런 생산 능력은 공급처가 안정되어야지만 의미가 있다.

기존 공급처가 나쁘지는 않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LC 전자에도 큰 도움이 된다. 심지어 LC 그룹 전체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영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연락해서 LC 전자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솔직히 너무 과한 호의에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의심했다.

“…최민혁 실장이 아무런 의도 없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어.”

임명진 부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역시 기획실을 총동원해서 최민혁 실장을 파고는 있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죄송합니다.”

“쯧, 난 이제 최민혁 실장 그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항상 뭐든지 뭔가 다른 꼼수가 있어. 좋은 의도가 전혀 없다니까. 혹시 모르니,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계속 파봐!”

“…알겠습니다.”

한병수 실장은 이번 일로 LC 전자, 아니, LC 그룹 내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로서는 최민혁 실장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들은 최민혁 실장의 악명 때문에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오성 전자와의 충돌을 부추길 생각인 걸까?’

문제는 설사 그런 목적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최민혁 실장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CDMA 사업도 그래. 이대로 계속 끌려다녀도 좋을지 모르겠어.’

물론 이번 거래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최민혁 실장을 믿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칫하다가 최민혁 실장에게 놀아나서 무슨 꼴을 당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성 측에도 정보를 흘려야겠어. 굳이 그쪽하고 원수가 되어서는 곤란하잖아.’

* * *

한편 최민혁 실장은 모건 스탠리 쪽에 집중해서 일하는 중이었다.

이번 기회에 모건 스탠리와의 대립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DEC과의 협상에서 나온 LCD 공급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이 계약 당사자인 LC 전자 측에서 DEC 담당자와 만나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추적한다는 이야기에 혀를 찼다.

“…한 실장이 정말 그랬다고 합니까?”

조성돈 팀장 역시 혀를 찼다.

“딱히 노골적인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DEC 경영진에게 접근해서 왜 최민혁 실장님이 이번 일에 나섰는지 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거예요? 중요한 것은 IPS LCD 공급 계약 아닙니까? 그거 물량만 3억 달러가 넘는데도 그래요?”

“…아무래도 최 실장님의 의도를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제가 중간에 훼방을 놔서 IPS LCD 공급에 깽판을 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맞네요. 거참. 사람이 호의를 보여도 의심부터 하니, 이상하네요.”

그런데 실상 최민혁 본인도 LC 전자에 대해서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그 사전 정지 작업으로 미끼를 던졌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

조성돈 팀장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DEC과의 거래는 StrongARN에 집중해서 나머지 일은 대충대충 막 넘겼다.

하지만 이번 건은 무려 3억 달러 규모의 계약인데, 그렇게 대충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조성돈 팀장조차 고개를 갸웃하자 혀를 찼다.

“아니, 제가 한 일이 그렇게 이상합니까? IPS LCD 시장이 열리면 열릴수록 결국 IPS LCD 로열티 수익은 늘 수밖에 없어요. 이게 LCD 시장 전체 규모 자체를 키우는 것이라서 그 이익이 어마어마합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를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LC 그룹은 제조업이 중심인 터라 그런 사업을 잘 이해 못 하는 눈치입니다.”

“하긴.”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LC 전자는 정말 치열하게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대기업이다. 그런 이들이기에 다른 기업 등에 빨대를 꽂아 넣고, 쭉쭉 이익만 챙기는 그런 사업을 잘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특허 수익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지금 LC 전자로서는 잘 수긍하기 힘든 일이었다.

‘5억 달러 특허 수익이 특이하기는 특이하지.’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혹시 오성 전자 측에서는 말이 없어요? 그쪽도 불만을 토로할 것 같은데, 아니, 괜한 오해를 받아서는 곤란합니다.”

애초에 LC 전자와 오성 전자에게 나눠서 IPS LCD 특허를 넘긴 이유는 두 회사를 서로 견제시켜서 이익을 제대로 뽑아먹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가 IPS LCD 계열사를 직접 만들어도 되기는 하지만 굳이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그 사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지. 괜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고민을 거듭한 최민혁 실장은 고민하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국무부를 경험하고서야 파트너의 필요성을 느꼈다.

“모건 스탠리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에게 우리가 지금 진행한 ARN 지분 매각 일을 흘리세요. 필요하다면, 오성 쪽에도 지분 매각을 할 필요가 있으니까.”

“네? 저, 정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이번 미국 재무부 일을 떠올리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혼자 다 먹으려다가 고립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방향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요. 오성 전자 쪽과는 아무래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오성 전자가 잘하는 부분 말이죠.”

“혹시 반도체 사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민혁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StrongARN 건도 있지만 아무래도 첨단 반도체 제조에 대한 기반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사업을 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업 철학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오성 전자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죠.”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이견을 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자금이 많아도 혼자 백화점식으로 모든 사업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KM DVR 사업이 그 좋은 예였다.

DEC이 진행한 프로젝트 성과가 없었다면 대안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성 전자와 손을 잡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겠지. 그런데 반도체라…….’

* * *

KMBOOK은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AOL과의 손을 잡고 진행하는 일 때문에 실리콘 밸리에서 꽤 주목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이 KMBOOK 본사는 꽤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오성 그룹의 안재운 전무였다.

그는 기다리던 이지수 박사가 AOL 측 임원과 협의를 끝내고 나온 모습을 보자 후다닥 뛰어갔다.

AOL 측에서 나온 이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녀라고 스토커 같은 안재운 전무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성 전자 측과는 이야기를 끝낸 것으로 압니다만?”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는 제안한 내용이 더 많습니다. 애니 탑재와 관련해서는 협상할 내용이 더 있습니다.”

안재운 전무가 슬쩍 내민 서류는 실제로 오성 전자에서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목차와 그 내용이었다. 당장 애니를 탑재할 수 있는 모델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은 문제가 많았다.

헬렌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일축했다.

“개발 단가 때문에 그쪽이 부정적이라고 얘길 한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굳이 이 자리에 와서 다시 이견 조율하자는 이유는 뭐죠?”

그랬다.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는 이번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 부정적이었다.

뒤에 동행한 권태성 실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자신이 부정적인 의사 결정을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다.

오성 전자 기획실 내에서 한 의사 결정이었다.

안재운 전무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권태성 실장은 짜증스러웠다. 안재운 전무가 왜 저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협상을 좀 더 하면 더 현실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헬렌이 버럭 소리쳤다.

“아니, 제품 단가가 무려 20%나 올라가서 도저히 판매하기 힘들다고 한 사람이 당신 아닌가요.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떤 조율을 한다는 거죠?!”

“아, 제 말은 부품 단가를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거죠.”

이지수 박사가 AOL 임원에게 적당히 둘러댄 후에 안재운 전무 일행을 일단 회의실로 데려갔다. 그녀도 어떻게 보면 KM 전자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았다.

비록 최민혁 실장이 독자적인 권한을 줬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오성 전자를 찬밥 대우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안재운 전무는 오성 그룹 황태자였으니까.

때문에 스토커 같은 행동을 하는 안재운 전무를 무시하지 않았다.

안재운 전무가 왜 저렇게 병신 같은지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그렇다고 자신을 미인계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스라이팅 같은 방식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헬렌이 나서서 쓴소리하는 것을 은근히 부추겼다.

하지만 이놈의 안재운 전무는 자신에게 맛이 가서 그런지 전혀 상황을 이해 못 한 것 같았다.

안재운 전무와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 때문에 잠깐 만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안재운 전무는 이지수 박사를 향한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권태성 실장은 슬쩍 이지수 박사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을 마냥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 일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굳이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측에도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지수 박사 능력이 진짜 장난 아냐. 도대체 최민혁 실장은 이지수 박사의 거대한 잠재력을 어떻게 알아본 것일까?’

특히 막대한 KMBOOK 지분을 넘긴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오성 그룹이 어떻게 해볼 대안이 없었다.

더욱이 지금 이 자리에서 침묵한 이유는 안재운 전무 덕분에 이지수 박사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성과 자체는 안 났지만,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인공지능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아는 인공지능은 그저 장난감 수준의 기술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와 소통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설마 에플에도 애니가 적용되었다니.’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러 채널을 통해서 알아봤지만 그 애니의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꽤 진보했다는 소리도 있지만 사기라는 설도 파다했다.

권태성 실장은 솔직히 창피했다. 그가 결국 내세운 사람이 임권수 부장이었다. 그런데 임권수 부장 역시 슬그머니 황광수 차장을 내세웠다.

황광수 차장은 생각보다는 계산적이면서 안목이 있는 이였다.

그는 창피를 무릅쓴 채 이지수 박사에게 현실적인 부분을 걸고넘어졌다.

“하면 이지수 박사님이 제안한 부품 기준이 된다면, 단순히 말만으로 세탁기, 냉장고, 조명등을 동작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요는 고객의 만족도가 우선이에요. 이게 사실 쉽지가 않아요. 인식률 자체가 환경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노이즈 문제다.

특히 아파트라는 공간 내에서 노이즈 문제는 차이가 크게 난다.

같은 소리라도 생길 수 있는 노이즈 발생 확률에 차이가 있다.

이지수 박사는 음원 노이즈 패턴 현상을 조사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 부분은 음성 인식률과도 관련이 있다.

인식 단계에서 생기는 오류는 누적되어서 적용된다.

때문에 설사 인식 오류가 생겨도 한 번 더 반복하면 해결이 된다.

문제는.

“그쪽이 말하는 고객 불만족이죠. 고객은 인식률 0.1% 향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는 것 말이에요. 이런 부분을 해결하려면 센서를 비롯한 부품 성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해결이 쉽지가 않았다.

이는 이미 KMBOOK과 오성 전자 엔지니어가 같이 연구하면서 밝혀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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