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8화 (785/1,021)

#788.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DEC 쪽을 만나서 협상하는 와중에 DEC한테 지금 필요한 것이 10인치 LCD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래서 LC 전자에서 지금 개발 중인 소형 IPS LCD가 아니라 그보다 개발이 더 쉬운 10인치 IPS를 언급했다.

DEC은 그 떡밥을 물었고 말이다.

물론 다 의도가 있었다.

‘미국 정부 쪽에 도움을 준 것이니까.’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DEC은 자본과 LCD 아이템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 두 가지를 받자 자신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었다. 사실 인텔 측에서 계속 계약을 질질 끄는 덕분에 더 계약을 쉽게 정리했다.

LC 전자 측에는 딱히 어떤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지금은 MP3처럼 IPS LCD 산업 자체를 키워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번 정보는 굳이 덮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민했다. 이번 일도 나쁜 정보는 아니었다. 그 탓에 이 정보를 DL 그룹에서 안다면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았다.

“김현탁 사장에게 이번 계약과 관련된 내용을 한번 흘려보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현탁 사장이 우리 쪽에서 하는 일을 알아야 뭔가 하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게 다 돈이 드는 일입니다. 결국, 삽질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DL 그룹에 적자가 쌓이겠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소설 속의 악당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DL 그룹이 아무리 자금이 많아도 한계는 있어요. 특히 작년에 무리해서 일본 단기 자금까지 끌어와서 수혈했죠. 지금까지는 DL 그룹이 여전히 겉으로 봐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좀 흔들 필요가 있어요.”

“KD 통신과 KD LCD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KD LCD 쪽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LC 전자나 오성 전자와는 달리 이쪽 분야에 경험이 별로 없잖아요. 아마 지금도 삽질 무지하게 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 무리수를 두면, 적자가 급증할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둘까요?”

최민혁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ARN 지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미국 재무부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 최문경 부회장, 나아가 DL 그룹을 흔들 목적이니까. 즉 무리수를 두도록 만들어야죠. 모건 스탠리와 협상이 잘되는 것을 본다면 DL 그룹도 구경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IP 시티폰 사업이 아니라 다른 쪽에도 투자하게끔 유도해야죠. 이왕이면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이리저리 정보를 흘리라고 하세요.”

“…네.”

조성돈 팀장도 혀를 차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사악한 흉계에 이제는 감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 * *

김현탁 사장은 안 그래도 요즘 불안감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KD 통신도 그렇고 KD LCD 역시 제대로 된 매출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LC 전자의 LCD 사업부 분위기는 달랐다.

벌써 매출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일이 최민혁 실장이 혹시라도 KD LCD를 노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그건 앞서 나간 생각이었다.

박태정 비서실장은 새벽에 출근해서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안건을 보고했다.

“ARN이라고?”

보고 내용은 이전과는 달리 아주 구체적이었다.

“네. 지난주에 ARN이 DEC의 고성능 ARN 사업부를 인수한 소식을 파악했습니다.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현탁 사장도 예상하지 못한 보고에 깜짝 놀랐다.

“어, 그건 왜 LC 전자에서 몰랐을까?”

“그쪽은 최민혁 실장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런 정보까지 얻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다만 IPS LCD 공급 계약 때문에 혹시나 해서 사장님을 찾은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김현탁 사장은 내심 욕설이 나왔다. 결국, 한병수 실장이 자신을 그냥 찾지는 않은 셈이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만, 최민혁 그놈이 미국에서 초호화 펜트하우스 매입이나 미국 사회에 기부한다는 쇼를 그냥 벌인 게 아니었다는 말이야?”

“네. 지금 봐서는 KM DVR를 슬쩍 끼워 넣어서 뭔가 다른 일을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공짜로 DEC과 LC 전자를 이어줄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일단 IPS LCD 산업 쪽을 키울 목적인가?”

“그렇게 봐야 할 겁니다.”

김현탁 사장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 쪽에 좋은 소식은 아니네.”

“…네.”

김현탁 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 소식을 한병수 실장을 통해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이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가만, 이 정보는 도대체 어떻게 얻은 거야?”

“KM 그룹 측의 아는 지인 통해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는 의아해서 다시 질문했다.

“그렇게 쉽게? 아니, 정보를 얻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는 말이야.”

“그건 운이 좋았습니다. KM 그룹 비서실 쪽이 워낙에 최민혁 실장에게 이를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정확히는 장승일 실장이 KM 그룹 비서실 쪽으로 정보를 흘렸다.

이를 듣고 최문경 부회장이 길길이 날뛴 것은 덤이었다.

다만 김현탁 사장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그게 뭔지는 잘 몰랐다. 최문경 부회장이 끼어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겠어.”

김현탁 사장은 망설이기는 했지만, 이 일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일단 보고는 해야겠어.’

* * *

김현탁 사장은 우선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에게 보고했다.

김희찬 부사장은 곧바로 김현탁 사장과 같이 김상구 회장을 찾았다.

김상구 회장은 보고를 듣고 나서는 일단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민혁 이놈이 ARN, DEC과는 어떻게 사전에 안 거야? 더욱이 ARN 지분 60%를 인수한 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김현탁 사장은 눈치를 보면서 ARN, DEC 관련 정보를 풀었다.

다만 그도 ARN 지분 인수에 대한 내막까지는 잘 몰랐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ARN 재정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ARN이 탑재된 뉴턴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 틈을 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 지금 미국에서 난리가 난 KM DVR이 뉴턴을 대신한 거였어?”

“…네.”

김현탁 사장도 대답해 놓고서야 혀를 내둘렀다. KM DVR은 깜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희찬 부사장은 꽤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그렇게 단기에 만들어진 KM DVR이 제대로 동작할까요? 전 문제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상구 회장 역시 이 바닥에 경험이 많은 사업가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가만, ARN이 DEC에서 고성능 ARN 사업부를 인수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혹시 대안이라서 진행한 일 아냐?”

“…어.”

김현탁 사장은 그제야 실무진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김상구 회장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맞네요. KM DVR 성능에 문제가 있어서 진행한 일 같습니다.”

“그러면 맞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김상구 회장은 에플 지분 인수를 못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일을 아직 잊지 않았다. 당시 지분을 계획대로 인수했다면 조 단위 이익을 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ARN 지분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에플 주가가 보여주듯이 ARN 주가 역시 폭등 순서를 밟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 목표가 없고서야 최민혁 실장의 중개인 놀이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김상구 회장은 딱히 김현탁 사장이 서두른 것을 탓하지 않았다.

이번 일에는 그조차 혀를 내둘렀다.

영업, 개발, 양산에 이르는 모든 일을 일사처리로 진행한 것 때문이다.

“최민혁, 이놈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김희찬 부사장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현탁 사장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었다. 정말 찬사만이 나올 뿐이었다.

과거 ARN 지분 인수.

KM DVR를 통한 미국 시장에 대한 사전 홍보.

거기에 고성능 ARN 사업부 인수를 통한 대안책까지 말이다.

“…….”

김현탁 사장 역시 숨겨진 진실을 알고 나서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조사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최민혁 실장 이놈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김상구 회장의 태도는 좀 달랐다. 그는 이전처럼 별다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일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기존에 벌여놓은 사업에 손을 대기도 어려워. 적자가 너무 많아.”

“…네.”

“일단 적자를 줄이는 쪽으로 가자. 최민혁 이 녀석이 한 방식도 나쁘지 않아. 필요하다면, KD 통신 영업을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그쪽은 아직 기술 안정화가…….”

“내 말은 당장 수익이 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하라는 거야. 호텔과 같은 영역 쪽은 파고들 여지가 많잖아.”

“…알겠습니다.”

김현탁 사장은 내심 수긍하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신은 KD 통신의 바지 사장이라서 경영 간섭이 쉽지가 않았다.

더욱이 호텔과 같이 영업 이익이 그렇게 큰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실장에게는 이 정보를 알려줘야겠어.’

* * *

한병수 실장은 김현탁 사장에게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뭘 하는지 이제야 안 것이었다.

그는 새삼 DL 그룹과 연락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랬구나. 어째 좀 이상하다 했어.’

“기가 막히네.”

임명진 부장은 그런 한병수 실장을 위해서 비서가 가져온 커피를 자신이 직접 내밀었다.

뜬금없는 임명진 부장의 태도에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실 이번 일은 외부에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어디까지나 한병수 실장이 꾸준히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보고해서 진행된 일이었다.

그런데 윗선에서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역시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실상 그들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다.

당장 KM DVR 사업은 실패할 것이라 봤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룹 본사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ARN에 대한 평가가 꽤 나쁜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그 중간에 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전 김영광 실장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번 거래는 없던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IPS LCD 수율 때문에 그래?”

“네. 일단 계약을 했지만 자칫하면 공급 일정이 늘어질 수도 있습니다.”

소형 IPS-LCD 기술은 이미 어느 정도 안정화 단계에 도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LC 전자는 부랴부랴 KM 전자와 IPS 특허 로열티 협상을 다시 해야 했다. 수량과 물량 자체가 커진 것 때문이다.

더욱이 LC 전자가 모르모트가 된 점을 내세웠다.

기존에는 최민혁 실장도 LC 전자의 제안을 굳이 듣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소형 IPS LCD의 안정적인 공급이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10인치 IPS LCD 시장까지 욕심내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것은 갑자기 DEC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DEC은 ‘StrongARN' 사업부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과 만나기가 무섭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를 요구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TFT-LCD 공급 문제였다.

“…그런데 DEC에서는 IPS LCD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겁니까?”

임명진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소형 IPS LCD 공급 관련해서는 이미 여러 기업에 영업하는 중입니다. 아마 그 정보를 다른 업체 통해서 얻었을 겁니다. 거기에 최민혁 실장이 이번에 껴서 제대로 제품 홍보도 했을 겁니다.”

그랬다.

최민혁 실장은 애초에 IPS LCD 영업까지 막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IPS LCD가 좀 더 빨리 대중화되기를 발했다.

그래야 소형 LCD 공급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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