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7화 (784/1,021)

#787.

내심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LC 그룹 기업 문화가 다른 대기업과는 차이가 있어서 생기는 일이었다.

겉으로야 인화 어쩌고 하지만 실상 알고 보면 밑의 성과를 윗선에서 다 가로채는 것이니까.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제까지는 가해자 입장이었는데, 피해자 입장이 되니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회사 생활 자체는 편해서 좋았다.

한병수 실장 처지에서는 새삼 밑에 직원들의 불평을 나름 이해했다.

한봉준 상무는 넌지시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이번 일에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 손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더 아는 사실은 없니?”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이번 일만 해도 갑자기 연락받았습니다. 그저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인정해서 순순히 받아들인 것 뿐입니다.”

“전혀 모른다고?”

아니, 그는 사실 최민혁 실장에게서 이번 일과 관련된 연락을 받고는 몇 가지 사실을 들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지금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기획실에서 조사 중입니다.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그제야 한봉준 상무는 만족했다. 사실 그로서도 이번 일은 조금 뜬금없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결과가 좋아서 굳이 한병수 실장을 탓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라…….’

한봉준 상무 역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보수적인 경영자와는 달리 최민혁의 이야기를 다 믿지 않았다.

분명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었다면 이번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이번 일은 한병수 실장이 손을 써서 잘 정리가 된 일이었다.

결과가 좋았기에 아무런 질책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최민혁에 대해서는 한번 알아보기는 해야겠어.’

* * *

한봉준 상무는 자신의 아버지인 LC 그룹 부회장 한병문을 찾았다.

그는 최근 DEC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런데 한병문 부회장의 태도는 달랐다.

“그거 병수가 하는 일 아니냐?”

“아, 네. 제가 따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일전에 CDMA 시스템 문제도 있고 해서 최민혁 실장과 좀 더 소통하라고 했습니다.”

한병문 부회장은 한봉준 상무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뜬금없네. DEC에 관한 이야기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 부분은 아직 일이 진행된 지 불과 일주일이 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DEC 측에서 협상을 빨리 받은 이유가 최민혁 실장이 중간에 중재를 했기 때문이고?”

“네.”

“그건 더하잖아. 그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거냐?”

“그건…….”

한봉준 상무는 당황했다. 그는 아버지 한병문 부회장이 이렇게 꼼꼼하게 확인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병문 부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네가 밑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확인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그 일은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 진행하는 일입니다. 분명히 최용욱 회장의 지시를 따로 받아서 진행한 일이…….”

“그걸 어떻게 확신해?”

“네?”

“최용욱 회장이 정말 최민혁 실장 배후에서 일을 도왔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최민혁 실장 나이가 이제 고작 20살인 것으로 압니다. 그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 해야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하는 말은 대부분 과장이…….”

한병문 부회장은 조금 답답한지 목소리를 올렸다.

“이미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일은 최민혁 실장 그놈이 직접 처리한다는 소문이 자자해. 최용욱 회장은 손을 쓴 적이 없어.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일뿐이야.”

“하지만 민혁이 그 녀석 나이는 병수보다 17살이나 적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다들 그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사실이 밝혀졌어. 오죽하면 오성그룹 안 회장이 재운이 그놈을 미국으로 직접 보내서 최민혁 실장을 관리하겠어?”

“아, 네? 네!”

한봉준 상무는 크게 당황했다. 그도 이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솔직히 믿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의 능력은 과도하게 부풀려진 거라고 생각했다.

후계 구도 문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듣자 크게 당황한 것이었다.

한병문 부회장이 소리쳤다.

“봉준아, 너도 이제 곧 LC 전자 사장으로 승진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LC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될 거다. 그런 놈이 밑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구체적으로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너 혼자 망상에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물론 아들 한병수 실장을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모든 책임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아들 한병수 탓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놈의 자식이!’

* * *

한병수 실장은 아버지 한봉준 상무에게 칭찬을 들었다가 저녁에 다시 불려 가서 욕만 잔뜩 듣고 말았다. 그로서는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이게 조변석개구나.’

솔직히 이놈의 한씨 집안은 정말 황당하기만 했다.

본인 능력은 없는 주제에 남의 등골만 빨아먹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최민혁 실장의 명성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어.’

DEC과의 거래는 최민혁 실장 편을 들어줘서 재미를 봤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안재운 전무 일만 해도 그렇다.

오성그룹이 이렇게 최민혁 실장에게 집요할지는 몰랐다.

그는 결국 집을 나섰는데, 연락한 이는 다름 아닌 DL 그룹의 김현탁 사장이었다.

재벌 3세 모임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서로 연락하고 지냈다.

이미 몇 번이나 만났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최민혁 실장하고 연관된 것이었구나.’

더욱이 김현탁 사장은 최민혁 실장 때문에 홍역을 치르는 시점이다.

자신이 연락하기에는 딱 좋았다.

자주 가는 클럽에서 김현탁 사장을 만났다.

옆에 앉은 이는 이 클럽의 에이스 가연이었다.

“오빠, 진짜 너무 오랜만이다.”

“그러게 말이다.”

한병수 실장은 푸념하면서 가연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 이 만남은 꽤 중요했다. 때문에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김현탁 사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김현탁 사장은 모 엔터 연기자 연습생을 옆자리에 앉혀놓고는 장난질하기에 바빴다. 그는 아예 작정하고 술이나 한잔하러 나온 것 같았다.

“현탁아, 요즘 잘 지내냐?”

“뭐 그렇죠. 그런데 왜 그래요? 태도가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은데?”

“휴우, 더러워서 그런다.”

한병수 실장은 겉으로 자기 내심을 잘 드러내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그는 김현탁 사장을 만날 때도 반존대를 했었다.

하지만 오늘 한병수 실장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아예 작정하고 말을 놓았다. 이건 그의 심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뜻이다.

김현탁 사장은 흥미로운 눈으로 한병수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바로 자신이 아는 재벌 3세 지인 중에서는 한병수가 가장 잘나갔기 때문이다.

“형은 그래도 어느 정도 사내에서 인정받잖아?”

“겉으로만 그래.”

“난 드러난 것으로도 구박을 받아.”

“어? 너 KD 통신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잖아. 요즘 계속 증자를 거듭해서 자본금만 7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던데?”

“자본금이 늘면, 그게 내 지분이야? 전부 다 다른 회사 지분이잖아. KD 통신은 사공이 많아서 산으로 가는 것 같다니까.”

“하지만 중국에 IP 시티폰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러면 상황이 다르잖아?”

“아, 그거? 샐로먼 브러더스 애들이 자금을 들이밀어서 그래. 이익이 나도 걔들이 다 먹겠지. 난 완전히 바지사장 처지라니까.”

실제로 KD 통신은 여러 이익 집단이 서로 같이 자본을 투자한 경우다.

샐로먼 브러더스뿐만 아니라 국내 한부 그룹, 오성 전자, 심지어 최용욱 회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번에 샐로먼 브러더스가 투자 명목으로 지분을 더 늘렸다.

“이상한 것은 최용욱 회장이 지분 일부분을 매각했다는 거야.”

“그건 좀 특이하네.”

최용욱 회장 이야기가 잠깐 나왔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병수 실장이 굳이 김현탁 사장을 호출한 이유를 설명했다.

“가만, KD 통신에 결국 KM 그룹이 투자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쪽 사정은 모르냐?”

“최용욱 회장? 지분 매각한 것 빼고는 잘 몰라. 그쪽은 더 이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한병수 실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최민혁 실장이 지금 뭘 하는지도 모르냐? 다른 사람하고 달리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것 같은데?”

갑자기 나온 ‘최민혁 실장’ 이름에 김현탁 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술잔을 연거푸 퍼마셨다.

“형, 설마 최민혁 그 자식 때문에 오늘 만나자고 한 거야?!”

한병수 실장은 예상한 김현탁 사장 표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당연하지 않겠냐?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에게 연락하겠어? 내 표정 봐라. 지금 기분이 좋은 것 같은가. 아, 물론 최민혁 그 자식 때문은 아냐. 걔랑 엮인 일 때문에 이상한 취급을 받아서 그래.”

“…무슨 일인데?”

“너 혹시 DEC이라고 알지?”

“…DEC이라면 그 서버 쪽이 전문인 미국 회사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쪽에서 미니 노트북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 같더라. 그것 때문에 우리 쪽에 10인치 LCD를 공급해 달라고 했어.”

“계속해 봐.”

한병수 실장은 사내에서 꽤 보안이 될 만한 정보이기는 하지만 최민혁 실장에 대한 것 때문에 순순히 보따리를 풀어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DEC과 LC 전자를 중재한 것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현탁 사장 생각은 좀 달랐다.

“민혁 그 자식이 DEC과 LC 전자를 거래를 도왔다고? 아니,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거야? 민혁 그놈이 DEC 지분이라서 산 거야? 설마 DEC를 인수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어렵지 않을까? 나도 DEC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요즘 막장을 달리는 것 같아. 미국 정부 때문에 그나마 망하지 않고 버티는 수준이야.”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 거래에 응한 것이기도 했다.

DEC과 적당히 거래를 유지한다면 미국 정부에게서 이권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덤핑 판정과 같은 압박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익이었다.

하지만 김현탁 사장의 태도는 달랐다. 그는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듣기만 무섭게 마치 한병수 실장을 고문하듯이 질문했다.

한병수 실장은 순순히 다 말해줬다.

“자, 잠깐만, 그러면 최민혁 그놈이 지금 미국에서 도대체 뭘 한다는 소리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넌 그래도 최민혁 실장을 잘 알아서 연락한 거야.”

김현탁 사장은 설마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 소식을 들을지는 몰랐다. 그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나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겠다!”

“어? 기, 김현탁!”

한병수 실장은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 * *

최민혁은 지금 미국에서 미국 재무부가 자신을 상대로 내놓을 압박에 대한 대응책을 연구하면서 정신없이 일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국내 일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일단 보고가 올라오면 확인은 했다.

그중에는 김현탁 사장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김현탁 사장 쪽에서 우리 쪽을 들여다본다니?”

조성돈 팀장은 평소처럼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사안은 아닙니다. 다만 평소보다는 KM 그룹이나 KM 전자를 더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정보라도 얻었나요? 하지만 미국 내에서 진행하는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국내 LC 전자 쪽을 통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DEC과 LC 전자 중재를 해준 사람이 최민혁 실장님이니까요.”

“아,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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