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
장승일 실장은 아차 싶었다. 구명진 부장을 그저 이용만 하려고 했지 그의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구명진 부장은 남을 쉽게 배신할 타입이 아니었다.
지금도 만날 때면 그의 눈빛에 떠오른 고뇌를 볼 수가 있으니까.
‘하긴 최민혁 실장님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구명진 부장이 최문경 부회장을 쉽게 배반할 리가 없겠지.’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일에만 충실하기 바랍니다. 구명진 팀장 같은 사람이 그룹 내에 꽤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최 실장님, 지금도 재무부 미팅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봐서는 미국 쪽에 더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KM 그룹에 정말 관심이 있는 겁니까?]
[글쎄요. KM 그룹이라……. 갑작스러운 질문이라서 대답하기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남은 아닙니다. 최소한 KM 그룹이 해외 투기 자본에 놀아나는 것까지 볼 수는 없죠.]
[그 말씀은… 결국 KM 그룹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지금 계획으로는 최영란 본부장을 밀어줄 생각입니다. 누나 능력이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더욱이 최영란 본부장은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가 없는 관계죠.]
장승일 실장은 뜬금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게 무슨…….]
최민혁은 최영란 본부장의 전 연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궁금하면 최영란 본부장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중요한 사실은 일단 계획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이 말입니까? DVR 이슈는 계획에 없던 일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최 실장님이 미국에 간 것도 CES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아, 그건 좀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만 큰 방향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장승일 실장님이 하셔야 할 일은 KM 그룹 내부 갈등을 잘 정리하는 겁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최문경 부회장을 지지한 KM 그룹 임직원 대다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 물론 최문경 부회장 측근을 제외하고 말이죠.]
[…명심하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확신했다.
‘일단 비서실 쪽을 더 지켜봐야겠어.’
하지만 최민혁 역시 지금처럼 말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전생 1회 차를 통해 KM 그룹 임직원 중에 믿을 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구명진 3팀장이 그 좋은 예였다.
최민혁이 인생 1회 차를 겪으면서 구명진 3팀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애초에 그를 이중간첩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당연히 새로운 인물을 뽑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최민혁 실장이 믿을 만한 인물인지는 직접 경험해 봐야 하는 일이다.
‘이게 나의 한계이기는 한데, 뭐 전생 1회 차 지식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겠지. 그 정보를 토대로 핵심 인재는 다시 검토해야지. 그보다는 지금부터가 중요해. DVR 사업과 에플 주가 폭등 때문에 우리 첫째 큰아버지나 샐로먼 브러더스도 무리수를 둘 시기이니. 거기에 샐로먼 브러더스와 모건 스탠리의 사이가 벌어지면 좋고, 그건 어려울까? 구명진 팀장이 능력을 잘 발휘하면 좋을 텐데…….’
* * *
구명진 3팀장은 첩자다운 역량을 발휘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내에 새가슴으로 유명해서 밑에 부하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장점도 있다.
다른 관리자와는 달리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밑의 실무진들도 구명진 3팀장을 신뢰한 터라 알아서 그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이야기했다.
비서실 3팀 김성우 차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권 실장님이 요즘 왜 그렇게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지사를 뻔질나게 방문하는지 모르겠어.”
이길호 과장이 푸념을 털어놓았다.
“요즘 금리 인하 때문에 미국 증시가 장난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샐로먼 브러더스를 통해서 해외 투자를 한다는 소리가 있으니까요.”
미국 금리 인하의 효과는 확실히 대단했다. 당장 다우존스 지수가 42포인트 오른 5,662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가 당초 예상한 것보다는 분위기가 더 좋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런 변화는 미국 증시만이 아니라 런던 증시에도 영향을 줬다.
독일 역시 이 분위기에 덩달아서 후끈 달아올랐고 말이다.
이길호 과장은 이런 분위기에 그저 입맛만 다셨다.
“전 그보다 에플 주가가 결국 50달러를 돌파한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고작 8달러에 불과하던 주가가 50달러를 돌파하다니!”
“왜, 부러워?”
“최민혁 실장님은 아직 에플 지분 32%를 소유한 대주주 아닙니까. 그거 평균 매입가가 제가 알기로 1달러 내외인 걸로 압니다!”
최민혁이 1조로 사들인 물량이 에플 지분 40%였다. 그중에 8%를 매각했다. 따라서 50달러 기준이면 무려 총 50조다.
매각한 분량을 빼면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 가치는 무려 40조였다.
“하긴 대단하지.”
김성우 차장은 애초에 주식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최민혁 실장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투자 수익에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8% 지분을 2조 6천억에 팔아치운 것도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플 주가가 이렇게 많이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좀 애매한 경우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이길호 과장 주장이 마냥 틀리지도 않았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모건 스탠리를 비롯한 세력이 공매도 손실에 대한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에플 주식 매입이었으니 말이다.
에플 주가 폭등은 결국 이런 수급에 따른 요인이었다.
에플 공매도 세력이 오히려 에플 주가를 끌어올린 셈이었다.
이들은 최민혁 실장이 에플 주식을 당장은 팔아치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에플 주가의 폭등에 인공지능 애니의 존재가 작용한 게 아니라 MPEG-2 때문이라고 착각해서 일을 벌였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결과적으로 최민혁 실장이 이 모든 사태의 배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길호 과장은 최비어천가를 부르짖으면서 탐욕에 들떠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성우 차장도 결국 한소리 했다.
“이 과장, 그런 소리는 그만 좀 해. 툭하면 주식 이야기. 지겹지도 않아?”
“아니, 김 차장님은 우리 회사 분위기를 보면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이번 에플 주가도 결국 KM DVR 때문이란 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기술이 이미 에플 차세대 플랫폼에 적용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고요!”
실제로 최민혁 실장과 스티븐 사이에 은밀한 교감이 있다는 찌라시가 돌았다.
다만 이건 소문에 불과했다.
아직 ARN MPEG-2 기술을 에플에 적용할 수준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중에 나온 이길호 과장의 이야기.
“김 차장님, 이 일을 쉽게 볼 수는 없습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미국 정부의 도움을 얻어서 중국 쪽에 KD 통신 투자를 대폭 늘렸다고 합니다.”
물론 샐로먼 브러더스는 KD 통신에 대한 지분을 꾸준히 사들였다. 이들은 KD 통신 대주주 측과 은밀한 접촉을 통해서 주식을 사들였다.
얼핏 생각해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몰래 이들 대화를 귀를 쫑긋한 채 듣던 구명진 부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 과장, 그게 무슨 소리야?”
이길호 과장은 평소와 같이 촉새처럼 입을 놀렸다.
“어? 부장님은 모르셨어요? 최근 권재홍 비서실장님이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를 찾은 것도 그 일 때문이란 소리가 있습니다.”
“난 처음 듣는 소리인데, 내가 알기로 샐로먼 측에서 KD 통신에 대한 투자를 늘린 이유가 중국 때문이었어. 하지만 최근에는 조용했잖아?”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바뀐 것 같더라고요. 샐로먼을 통해서 모건 스탠리의 도움을 얻었다고 합니다. 뭐, 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여간에 모건을 통해서 중국 쪽에 투자를 대폭 늘렸다고 합니다.”
“그건 더 이상하잖아. 최근에는 중국이 대만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한중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들었어. 그 때문에 뮤추얼 펀드도 회수한 것으로 들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야?”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였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미국 정부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모건 스탠리가 중재했다고 해도 미국 정부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그거야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이길호 과장은 입이 가볍지만, 이쪽저쪽에 아는 이들이 꽤 많았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는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 직원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이야기냐 하면…….”
물론 대다수 내용은 과장이 심했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럴듯했다. 특히 권재홍 비서실장을 지켜보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한 내용이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계속 최민혁 실장에게 당하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그도 KM 그룹 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뭔가 필요했다.
“저도 음모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부회장님이 바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일은 사실 일 수도 있죠!”
“…….”
구명진 부장은 묵묵히 들으면서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 편에 서면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는데, 그것과 저 정보를 합치면 마냥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저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밑의 부하 직원에게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다.
‘젠장맞을.’
* * *
최민혁 실장은 구명진 부장에게서 온 연락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모건 스탠리 사이에 틈을 벌린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일까?’
다만 그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KM 시큐리티 통해서 정보망을 만들었다고 해도 아직 제대로 동작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두 투자 은행 사이의 긴밀한 정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정보네요. 한번 잘 파보세요.]
[네? 이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샐로먼 브러더스와 모건 스탠리의 관계는 동업자 수준이죠. 그런데 동업자끼리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가 있어요. 다만 두 회사가 끝까지 앙숙 관계로 남을 리가 없어요.]
[하면 좀 더 파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구명진 부장이 의외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혀를 찼다.
‘정말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어.’
* * *
미중 갈등은 대만에서 일어난 군사훈련 때문에 상당히 좋지가 않았다.
실제로 재무부 역시 이번 일 때문에 신경이 상당히 곤두서 있었다.
그들이 굳이 통신 보안 문제로 최민혁 실장을 견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
최민혁 실장이 언제 중국 정부와 손을 잡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때 최민혁 실장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중국 편을 들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와중에도 미중 간의 경제 회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미국 정부는 뮤추얼 펀드를 회수한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헤지펀드에 대해 규제를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모건 스탠리였다.
원래 샐로먼 브러더스는 미국 정부에 찍혀서 이 일에 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모건 스탠리가 에플 공매도와 관련한 자금 일부를 철회한 일 때문에 샐로먼 브러더스에게 계약 위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을 당했다.
만약 이 일이 공론화된다면 모건 스탠리의 신뢰도에 좋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부랴부랴 샐로먼 브러더스 경영진을 만나서 타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 한 가지 이권을 줬다.
바로 중국 투자 말이다.
미국 정부가 배드 캅 노릇을 하는 동안에 샐로먼 브러더스에게는 굿 캅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입장에서는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중국 투자를 대폭 늘린 것에는 만족했다.
KD 통신의 중국 사업에 무려 5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한 것이었다. 중간에 KD 통신 지분을 늘린 것은 덤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