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권재홍 비서실장이 움직이자 장승일 실장은 곧바로 그 사안을 파악했다.
권재홍 비서실장 본인 딴에는 신중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최문경 부회장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비서실 내에서도 고민하는 임직원이 꽤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비서실 3팀장인 구명진이었다.
구명진 팀장은 애초에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가족을 더 생각하는 이였다. 최문경 부회장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갈등했다.
그런 중에 KM 센서 설립이 본격화되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 측에 붙었던 임원과 차장급 이상 직원이 KM 그룹 계열사 구조 조정으로 갈려 나가는 것을 보자 이직을 생각할 정도로 고민했다.
그런 차에 최민혁 실장의 연락을 받아서 노선을 갈아탔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지시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최민혁 실장이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
“KM 센서 쪽을 파헤치는 것 같습니다. KM 센서 사업부의 인사 기록부를 다 확인 중입니다.”
“…그렇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딱히 구명진 부장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구명진 부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의 동선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다 불었다.
“좋은 정보입니다.”
“전 장 실장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격렬한 어조에 장승일 실장은 오히려 혀를 찼다. 그는 기획 조정실 내에서 배신을 많이 당했다. 그런데 비서실 내에 배신자가 자신에게 붙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구명진 부장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정보를 준다고 하는데, 그걸 거절할 정도로 답답한 사람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런 일을 그냥 소극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았다.
“혹시 비서실 직원 중에서 최민혁 실장님 쪽에 붙으려고 하는 사람은 더 없습니까?”
구명진 팀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마음이 있어도 불안해서 그러지 못한 사람이 태반입니다. 다른 조직과는 달리 비서실은 부회장이 바뀌면 다 갈려 나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은 비서실이 더 잘 알 텐데, 아직도 그렇습니까?”
“최민혁 실장님 능력이야 다 알지만, KM 그룹 내의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KM 전자만 해도 KM 그룹에서 실제로 계열 분리가 된 상황입니다.”
“KM 산업 지분도 이미 최민혁 실장님이 상당수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KM 산업 지분 중에 16%를 가진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용욱 회장과의 거래를 통해서 야금야금 지분을 키운 결과였다.
“하지만 KM 산업에 대한 투자는 에플, 퀄컴과 같은 기업 투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은 KM 그룹 지분에 크게 연연하는 눈치는 아닙니다.”
“아, 그건…….”
장승일 실장도 순간 고민했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에게 몇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다. 최민혁 실장은 지금까지 KM 그룹 바깥으로 맴돌았다.
구명진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았다. 결코, 누군가를 배반하는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제가 박쥐 같은 배반자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장승일 실장님에게 잘 부탁하는 겁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이 정말 최문경 부회장을 밀어내려면, KM 그룹 경영에도 많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흠.”
장승일 실장은 예상치 못한 조언을 듣고 나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좀 문제야.’
* * *
장승일 실장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최민혁은 늘 보험용으로 일을 처리했다.
KM 시큐리티가 그 하나였다.
구명진 팀장 일 역시 마찬가지다.
전생에서는 비록 믿을 만한 이였다고 해도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과거 우영민 부장의 경호원 역할을 했던 문영식 과장이 이 일을 맡았다.
바로 배반자 블랙리스트 관리 말이다.
그도 명단을 올리기는 했지만, 최민혁 실장이 얘기한 구명진 팀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구명진 팀장은 사내 평판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꼭 미꾸라지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싫어하는 이는 정말 싫어했다.
문영식 과장은 때문에 이번에 늘어난 몇몇 경호원과 같이 구명진 팀장 뒤를 쫓았다. 혹시라도 최문경 부회장에게 또 정보를 흘릴까 싶어서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사뭇 신기한 일이었다.
구명진 팀장 외에 최민혁 실장 측에 붙겠다고 한 사람 중에는 여전히 최문경 부회장 측에 정보를 흘리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따로 이중으로 관리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안목에 감탄하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굳이 꼭 이렇게 직원을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감시 직원을 더 할당해서 처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김명준 과장 역시 최민혁 실장의 안목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최 실장님이 굳이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이유가 있을 거야. DVR 이벤트가 일어난 후에 바로 조치를 했잖아?]
[지금이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맞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보기엔 좀 늦은 감이 있지. 최문경 부회장 역시 우리 측에 프락치를 박으려고 했잖아. 실제로 정보원으로 요긴하게 관리했고, 아마 거기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봐야지.]
[하긴 지금이 딱 좋기는 하죠. KM 그룹 임직원이 모였다면 하는 이야기가 최민혁 실장님에 관한 이야기이니까요. 특히 DVR 이야기를 하면서 MPEG-2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벌써 그 정보를 아는 이도 있어?]
[MP3 로열티 수익금 때문이죠. 이 이익이 만만치 않잖아요. 정작 고생은 MP3 생산업체가 하는데, 이익은 최민혁 실장님이 다 챙기니까요.]
[하긴…….]
김명준 과장 역시 문영식 과장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고 말았다.
하지만 문영식 과장도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조직 개편이나 이런 것에는 확실히 적극적으로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닙니다. 제 직급이 과장으로 김명준 과장님이랑 똑같지 않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맞는 이야기였다. 벨린 투자 소속인 문영식 과장은 진급을 거듭했는데, KM 전자 소속인 김명준 과장은 변함이 없었다.
[상관없어. 아니, 그만큼 최민혁 실장님도 걱정이 많이 된 거지.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는 알력 싸움을 잘 보면, 최민혁 실장이 그렇게 노력한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되니까.]
샐로먼 브러더스, 모건 스탠리, 재무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관한 부분이다.
김명준 과장도 이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최문경 부회장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생각보다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은 모건 스탠리 측과도 소통하는 것 같았다.
이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자칫 최문경 부회장에게 섣부르게 손댔다가는 이들에게 된통 당할 수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꽤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민혁 실장님의 행보는 가장 이상적이었어.’
특히 샐로먼 브러더스는 물론 모건 스탠리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부분 말이다.
최민혁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계속 키워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샐로먼 브러더스의 압박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덩치를 키웠다.
이러한 성장은 최근 모건 스탠리와의 갈등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아니, 아직 미흡한가?’
문영식 과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침착한 행보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하긴, 어떻게 보면 최민혁 실장님이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한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이도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데, 그 인내력은 휴우, 정말 사람의 인내가 아닙니다!]
[그래. 그러니 문 과장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지시에 철저히 따라.]
[제가 뭐 따르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구명진 부장 일만 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구명진 부장이 최문경 부회장을 완벽하게 배신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요즘 최문경 부회장에게 문제가 많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잘 살펴봐. 구명진 팀장에 대한 확인이 끝나면 이중 첩자로 이용할 생각인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 * *
KM 그룹 내의 변화까지 신경을 쓰지 않은 장승일 실장은 구명진 팀장에게 충분한 정보를 듣고 나서는 일단 KM 센서 측에 관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KM 센서 내의 취약점을 살폈다.
다행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저 간단하게 자신이 확인했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미국에 가 있는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선 구명진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했다.
[이건 저도 궁금한 사실입니다. 앞으로 KM 그룹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님은 다른 외국계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많이 늘렸지만 KM 그룹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대답은 장승일 실장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장 실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KM 그룹 지분 태반은 할아버지나 최두진 사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드러난 지분보다 숨겨진 지분이 더 많습니다.]
실제로 KM 그룹은 다른 10대 재벌과는 많이 다른 기형적인 지분 구조로 되어 있었다.
KM 그룹 자체가 워낙에 보수적인 형태로 움직인 까닭이다.
최용욱 회장은 기업 경영권 방어에는 꽤 철저한 인물이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지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무리수를 둔다면 시장에 나와 있는 지분을 다 흡수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KM 그룹 지분 가치가 작전주처럼 폭등할 겁니다.]
[그건…….]
장승일 실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까닭에아차 싶었다.
최민혁은 순간 고민했다. 장승일 실장에게도 이제 정보를 더 알려야 하나 싶었다. 사실 그 자신도 아직 배후 적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장승일 실장도 알아야지. 그래야 KM 그룹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까. 아무래도 이야기는 해줘야겠어.’
[더욱이 KM 그룹에 그런 식으로 무리한 투자를 할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우리 첫째 큰아버지와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그렇게 무리수를 둘 수는 없습니다. 제 적은 최문경 부회장님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느끼실 텐데요?]
[…샐로먼 브러더스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사실 샐로먼 브러더스라고 하나만 특정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라면 저도 이제는 해볼 만하니까요. 하지만 그 배후에 다른 놈이 더 있다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새, 샐로먼 브러더스 말고 배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짐작할 따름입니다. 사실 연결 고리를 아무리 밝혀내려 해도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제야 왜 최민혁이 KM 그룹에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최민혁은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주었다.
[할아버지의 KM 그룹 경영권 방법은 고슴도치 전략이죠.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최소한 피해라도 줄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 전의 차입금은 바로 KM 그룹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한 트로이 목마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IMF가 터진 후에 KM 전자, 산업, 건설은 전부 다 워크아웃이 된다.
그사이에 이들 KM 그룹 계열사를 다 팔아치우면 막대한 이익을 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KM 그룹을 인수해서 국내로 침투하기도 좋고 말이다.
장승일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해외 투자 은행이 KM 그룹을 공략한다고 할 때 쓸 수 있는 전략 말이다.
‘차입금이 그런 목적이었다는 말인가?’
그로서는 소름이 다 돋을 일이었다.
정말 최민혁 실장 말이 사실이었다면 이미 KM 그룹은 빠져나올 수 없는 거미 덫에 걸린 채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비로소 최민혁 실장이 왜 KM 그룹 주번을 빙빙 돌면서 일을 벌였는지, KM 전자를 계열 분리하게 시켰는지 이해했다.
[하, 하지만 KM 센서는 다르지 않습니까. 직접 기술까지…….]
[그건 지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KM 그룹 내에 제 영향력이 독보적으로 커졌고, 임직원 역시 눈치를 보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구명진 부장은 배신할 타입 같지 않아서 일을 시켰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