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
분명히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서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 측근이라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힐끗 쳐다본 이는 다름 아닌 최영란 본부장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최영란 본부장은 혀를 찼다.
[이미 KM 센서 지분 처리는 확정이 난 상황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51%를 가졌고, 나머지는 회장님이 마무리 정리 중입니다.]
결국 최용욱 회장이 20~30%, 최영란 본부장이 10% 내외라고 가정하면, 나머지 지분은 KM 산업을 비롯한 그룹 일가에 돌아갈 것이다.
계열사 사장단은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자리에서 자신은 지분이 아예 없다는 점을 밝힐 수는 없었다. 솔직히 다른 것을 떠나서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런 점을 느꼈다.
[다들 이번 일을 통해서 느낀 것이 많을 거야. KM 센서 사업을 일군 사람은 최영란 본부장이고, 이 공적에 따라서 지분 10%를 넘길 거다. 스스로 노력해서 뭔가 일구어봐. 거기에 따른 파격적인 보상은 분명히 해줄 테니까.]
[…네!]
대답하는 KM 그룹 계열사 사장들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들도 이제는 KM 센서 지분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대충 눈치를 챈 것이었다.
최영란 본부장의 KM 센서 지분 가치는 수백억, 아니, 수천억을 호가할 것이다.
자신들의 월급으로는 평생 벌 수가 없는 자금이었다.
그런데 딱히 최영란 본부장을 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DVR 개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최영란 본부장이었다.
그녀는 비록 최민혁 실장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뚝심 있게 이 사업을 밀어붙였다.
DVR 아이템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부럽다!’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썩어 들어갔다.
그는 요즘 에플 공매도 손실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장녀는 자기 일만 했는데, 수천억 지분을 챙기게 된 것이었으니까.
‘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조카 최민혁이 뭔가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최민혁을 공격할 수 있는 에플 공매도에 집착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당황스럽네.’
* * *
최문경 부회장은 사장단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평소와는 달리 이번 일을 고민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런 최문경 부회장이 안쓰러워서 한마디 해주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를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평소라면 그도 권재홍 비서실장을 타박했을 것이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자신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다.
“이번 일 때문에 그래?”
“…네.”
최문경 부회장은 목소리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통로를 지나가던 임직원의 시선이 평소보다 더 차갑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기는 해도 이전처럼 부회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 부회장실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침묵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다른 꿍꿍이라도 있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야?”
“꼭 그래서가 아닙니다. 다만 모건 스탠리가 최근에 멕시코에서 하는 짓을 보면 정말 이들을 믿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멕시코? 가만, 그쪽은 회복 조짐을 보인다고 들었는데?”
“페소화 폭락 직전 이후 국가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했습니다. 이자율도 낮아졌고, 외국 자본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계속해 봐.”
멕시코 경제는 페소 폭락 이후에 -8% 성장을 기록했다.
인플레 역시 88년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중산층이 사라진 나라라는 악명은 전 세계가 다 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갑자기 외국 투자가 대폭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상황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장 모건 스탠리만 해도 멕시코 대형 호텔 지분을 사들였습니다. 독일 역시 투자를 대폭 늘렸습니다.”
“대운, 오성, LC 전자 역시 생산 공장을 대폭 늘였잖아.”
실제로 대운 전자는 영상 종합 단지를 완공했다. 이런 투자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고용 효과만 해도 무려 5천 명이 넘기 때문이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 멕시코 기업 대부분 지분이 미국, 독일을 비롯한 서방 자본에 다 넘어갔습니다. 모건 스탠리가 겉으로 많이 드러나서 언론 조명을 받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멕시코의 핵심 지분을 상당수 먹어치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자본 중에 일부는 내 소유야. 덕분에 난 이익을 봤고.”
권재홍 비서실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순진한 사회학자 따위는 아니었다. 자본 전쟁에서 오직 승자는 돈을 많이 가진 자이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가 위기에 놓인다면 부회장님을 얼마든지 희생양으로 만들고도 남습니다.”
“하하하, 그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최악의 농담이야. 샐로먼 브러더스 회사의 덩치를 잘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지금 하는 일을 잘 보면 미국 재무부와 알력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이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게 미국 정부와 샐로먼 브러더스의 관계가 최악인 점하고 관련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비서실을 통해서 나온 음모론에 가까웠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DVR 사태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던 게 최민혁 실장, 재무부, 모건 스탠리, 샐로먼 브러더스가 서로 얽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KM 센서의 DVR 상황이 연결 고리가 된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아쉬운 점은 미국 내에 정보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KM 그룹의 역량으로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부회장님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관련이 있어서 이 정도라도 알아낼 수 있었던 거니까.’
“으음, 아직 정보가 부족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KM 센서 지분을 과반수 확보한 것과 미국 내에서 DVR 사건 사태를 만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마 최문경 부회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계속 병신처럼 당하기만 하지 않았다면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 사장단 회의에서 DVR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그 과정에서 KM 센서가 얻는 이익에 대해서 자세히 다뤄졌다.
상상을 초월한 영업 효과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 명백한 이유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저히 상대조차 하기 힘들었던 조카 최민혁이 뭔가 배후에서 자신을 상대로 작업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미국 재무부를 상대로 말이다.
솔직히 뜬금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미국 정부와 샐로먼 브러더스의 사이가 최악이란 점이다.
‘샐로먼 측으로부터 모건 스탠리가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기 위해서 움직였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 일과 관련이 있어?’
다만 샐로먼 브러더스에게서 역시 아직 최민혁 실장과 재무부 갈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저 모건 에플 공매도 작업을 몰래 청산하던 모건 스탠리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를 통해서 자신이 재무부 측에 손을 썼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권재홍 비서실장의 추론이었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번 DVR 사건은 개연성 부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일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심각한 번민에 빠졌다. 그는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조카 최민혁 행동에 치를 떨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거지?”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KM 센서 측을 최대한 파헤쳐 보겠습니다.”
“…좋아.”
최문경 부회장은 허락을 해주고 나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KM 센서 지분에 눈이 어두워서 이 사업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었다.
‘민혁이 그놈이 그냥 일을 벌일 놈이 아니지. 하, 왜 그걸 파악하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샐로먼 브러더스 측도 조사를 해봐야겠어.’
하지만 그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에플 공매도에 투자한 자본 말이다. 설마하니 샐로먼 브러더스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투자했다.
‘아,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문제는 에플 주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샐로먼 브러더스에 투자한 자금에 대해서는 자신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계약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만을 빌 뿐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자산 규모가 얼마인데, 최민혁 그놈에게 당하겠어? 말도 안 돼!’
* * *
최민혁은 당연히 미국에 가 있어도 최문경 부회장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KM 시큐리티 설립 이후에 경호 팀 상당수를 KM 그룹에 보안이라는 명분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KM 센서 한정이었지만 점점 KM 그룹 내에 영향력을 넓혔다.
그리고 이 일은 딱히 최용욱 회장이 반대할 일도 아니었다.
이유는 그룹 차원에서 최민혁 실장이 일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비용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최민혁 실장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도 잘 알았다.
아니, 실상 그는 최민혁 실장을 도와주었다.
이를 통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그룹 내의 부정부패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민혁은 이번 DVR 사건을 통해서 KM 그룹 내부에 대한 최문경 부회장의 장악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까지 확실히 확인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음이 흔들린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들을 한번 조사해 보세요.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받아주겠다고 해도 됩니다.”
사실 최민혁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은 배반자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 독재 치하에서 지금까지 버틴 임직원을 어느 정도 신뢰해서다.
물론 확인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이중 첩자 후보 리스트에 올라온 비서실 구명진 3팀장이었다.
‘구 팀장이라면 믿을 만하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의 전생 1회 차 때에 여전히 정보를 자신에게 넘긴 이였기 때문이다.
구명진 3팀장은 비록 최문경 부회장 측에 붙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뿐이다.
구명진 팀장은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받고 나서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사실 KM 센서 사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최문경 부회장의 영향력이 겉으로 보일 정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은 구명진 팀장을 결코 희생양으로 쓸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장승일 실장에게도 비밀로 하세요.]
[네? 자, 실장님에게도 말입니까?]
[물론 장 실장님은 믿습니다. 하지만 기획 조정실 인원을 다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비서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 그렇군요.]
구명진 팀장은 멋쩍은 얼굴로 최민혁 실장의 지적에 수긍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 줄은 몰랐다.
요즘은 회사 가면 늘 고민하는 일이 이거였다.
최문경 부회장 측근이 추풍낙엽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최민혁은 이를 탓하지 않았다.
[아마 경호원 중에 사람이 갈 겁니다. 그쪽을 통해서 따로 지시를 받기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구명진 팀장을 믿지는 않았다. 어차피 신뢰하지 않아도 쓸 곳은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우리 부회장님을 상대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겠어.’
지금까지는 최문경 부회장 측근에 사람을 박을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선동이지만 다른 하나가 바로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생각보다는 능력이 많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거야.’
그래서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을 여전히 얕잡아 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