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
최민혁은 자신이 벌인 일이지만 피곤했다. 굳이 일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살짝 후회했다. 얼굴마담으로 KM 센서 사장이나 임원을 내세웠어도 될 일이었다. 굳이 자신이 직접 나설 이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 자신의 상대가 다름 아닌 미국 재무부 고위 관료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평판이 미국 정부 지지율에 영향을 줄 정도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런 걸 따져 봤을 때 대리인을 내세우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런 점까지 잘 모르는 최영란 본부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불쑥 반박했다.
[미국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도 난리가 났어. 우리 KM 센서가 개발한 KM DVR 때문에 KM 그룹 본사도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업무를 할 수가 없어!]
실제로 사실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온통 ‘최민혁 실장’ 이름을 다루는 바람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미 최민혁은 송도연과 관련된 스캔들 때문에 국내에 나쁜 이미지가 쌓여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이게 한몫한 것이다.
덕분에 한국 언론은 뒤늦게 KM 센서로 몰려가서 KM DVR를 취재했다.
최민혁이 한 일은 KM DVR에 대한 광고를 제대로 한 셈이었다.
최영란 본부장이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건 이유였다. 그녀도 최소한 자초지종을 당사자에게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거 알아? 샌프란시스코 지역 경찰에 공급한 DVR는 판매할 수가 없어.]
[그렇지. 아마 손을 좀 봐야 할 거야.]
실제로 최민혁 실장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KM DVR는 도저히 상업적으로 팔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히 외형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DVR 자체에 너무 많은 결함이 존재했다.
이것은 단순히 소프트웨어적인 문제 수준이 아니었다.
하드웨어 자체도 문제가 많았다.
심지어 ARN에서 개발한 DVR 압축 코덱 칩 자체도 모순투성이었다.
황당한 사실은 이 칩 설계 자체에도 무리수가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최영란 본부장은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이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난 ARN이란 회사가 워낙에 전문적인 회사라서 문제가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칩 설계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많아. 심지어 이건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어.]
[…그렇겠지. 그쪽 엔지니어를 강제로 불러와서 작업시켰으니까.]
최영란 본부장은 이 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강하게 반발했다.
[설마 그것도 다 고려하고 밀어붙인 거야? 만약 일이 실패했다면 어쩌려고 했어?]
[결과적으로 잘되었잖아?]
[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민혁이 네가 한 것은 완전히 도박이었어!]
최영란 본부장이 하는 말은 최민혁을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리스크를 안고서 무리할 필요가 있냐는 지적이었다.
최민혁은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당장은 그 과실이 필요했어. 그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니까. 더욱이 일단 결과적으로 실험은 잘 끝났잖아. 결함이 난 것도 잘 찾았으니, 그걸 보완하면 될 거야. ARN 측에서 그렇게 얘길 하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만.]
[맞아, 누나 말처럼 무리수가 있었지. 하지만 덕분에 최대한 MPEG-2 코덱과 관련된 기술 일정을 당길 수도 있었어. 그리고 이 기반 덕분에 이미지 센서 제어칩 개발 속도로 탄력을 받을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최영란 본부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번 DVR 개발 덕분에 담당 ARN 엔지니어는 마치 깨달음을 얻은 초고수처럼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심지어 ARN 본사 측에서 30명의 엔지니어를 더 KM 센서 측에 파견했다.
그만큼 이번 KM DVR 개발이 ARN 측에 큰 도움을 준 것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실제 미국 지역 경찰에 제품을 공급해서 실전 테스트를 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지역 경찰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그 보고서는 고스란히 KM 센서 측으로 넘어왔고 말이다.
최영란 본부장은 단순한 사건 단면만을 보고 최민혁을 추궁했지만 뒤늦게야 최민혁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진짜로 단순히 운 때문이 아니란 거지? 민혁이 네가 모든 상황을 다 계산해서 밀어붙였고?]
최민혁도 평소라면 대충 말하겠지만, 이번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 KM 센서 영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잖아? 그게 내가 노린 노림수야.]
정확히는 미국 재무부를 압박할 수단이었지만 굳이 그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사실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최민혁도 미처 간과한 일이었다.
[…….]
최영란 본부장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KM 센서는 KM DVR 후속 일 처리 때문에 밑의 평직원부터 시작해서 위의 임원까지 전부 단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심지어 영업 파트는 몰려오는 바이어 연락에 뜨거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금 KM 센서 분위기는 이미 자리를 잡은 중견기업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이제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 같은 건 안 할 거지?]
[…이번 일은 예외라고 해두자.]
[너도 말은 참 잘한다.]
[어쩔 수가 없었어. 으음, 누나도 할아버지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재무부의 압박을 막기 위한 최소의 보험이니까.]
최영란 본부장 역시 뒤늦게 최용욱 회장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너무 앞서 나간 생각 아냐? 미국 재무부가 뭐가 아쉬워서 널 협박해?]
[CDMA, 아마 퀄컴 지분 때문일 거야. 지분을 매각하면 간단히 해결할 일이지만 난 굳이 그럴 생각은 없걸랑.]
[그게 그렇게 중요해?]
[통신기술이니까. 미국 국방성을 비롯해서 엮여 있는 곳이 꽤 있어. 아마 미국 대통령령을 사용해서라도 강제로 기술을 뺏을 수도 있어.]
좀 과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진짜 그럴 수도 있다.
미국 정부로서는 결국 외국 자본이 자신의 통신 보안에 영향을 줄 사업이나 기술을 넘길 이유가 없었다.
[이전에는 안 그랬잖아?]
[지금은 상황이 달라. 최근 퀄컴에서 조정된 LC 시스템으로 추가 확인을 해서 언론에 발표했잖아. 이제 상용화에 걸림돌은 없어.]
최영란 본부장은 그제야 CDMA와 관련된 보고서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뉴스는 자신과 관련이 없어서 관심 삼아 본 것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좀 달랐다.
그가 그 뉴스의 주인공이었다.
첨예한 이해 당사자였다.
[아, 그건 뉴스에서 보기는 했는데, 그것도 너랑 관련이 있었어?]
[어.]
최영란 본부장도 한동안 다시 침묵했다. LC 전자와 퀄컴이 갑자기 미국에서 한 CDMA 실험은 그냥 흘러가는 뉴스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뉴스의 비하인드에도 결국 최민혁 실장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녀는 불과 며칠 사이에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한 불만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았지만 이건 레벨이 전혀 다른 것 같아. 나와는 사는 세상이 전혀 달라. 너, 진짜 대단하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정도는 아냐.]
[아니, 나 정말 너 존경하고 싶다. 한국에 오면 내 말뜻을 알 거야.]
[그래.]
곧 전화는 끊어졌다.
최민혁은 물론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도 솔직히 지켰다. 나름 계획하고 한 일이었지만 기자 군단을 상대로 한 쇼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깐 다른 대안이 없었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 외에는 없었다.
미국 정치권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굳이 미국 정치권 쪽에 손을 벌리기 싫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남은 것은 후속 조치인데, 할 일이 많아. 국내 생산 문제도 있는데, 이건 KM 센서 인력이 잘 해결하겠지.’
* * *
MP3에 대한 것은 냅스트 소송 이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MP3 플레이어는 기름을 퍼부은 꼴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MPEG-2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존 정지 영상 압축 기술이나 동영상 압축 기술에 대해서는 일반화가 되지 않았다.
원천기술 자체가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점도 있고 말이다.
오성 그룹 내의 최상위 연구소 정도에서나 이 원천기술을 들여다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다른 외국 연구소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이 동영상 원천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동영상 원천기술을 적용한 제품이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사실조차 미국 소녀 납치 사건에 묻혀서 바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곳은 좀 달랐다.
이번 KM DVR 장비를 고안한 회사인 KM 센서 말이다.
그들은 미친 듯이 걸려오는 KM DVR 주문 요청에 크게 당황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품 판매 일정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상하군요. 고객이 돈 주고 제품을 사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말입니까? 설마 미국 경찰은 무섭고 우리는 우습게 보이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꼬장이었다.
그런데 KM 센서 담당자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단 임시 미팅을 잡았다.
이런 일이 너무 많았다.
단순히 국내만이 아니라 미국 업체 쪽에서도 미친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화는 일본, 동남아를 넘어서 유럽 바이어 측에서까지 계속 연락이 걸려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대안이 없어서 전화한 것이었다.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MPEG-2 원천기술 태반을 최민혁 실장이 먹었다는 듯했다. 다만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결국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 협상해야 하는데, 이쪽은 아예 연락이 되질 않았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고른 게 바로 KM 센서였다.
특히 MPEG-2 특허 관련 협상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개발에 들어가야 그나마 다른 후발 주자를 따돌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KM 센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KM 그룹 기획 조정실 측에 문의했다.
장승일 실장은 구두 주문만 무려 10만 건이 넘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사장단 회의에 안건을 올렸다.
[5천억 물량인가?]
[…네.]
단순히 물량만이 아니었다.
요청 들어온 내용 중에는 기술 로열티에 대한 문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이게 이권이 걸려 있어서 한 업체라도 바로 결정한 사안은 아니었다.
하물며 그 주인이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허탈해서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사업하면서 이런 경험을 또 처음이었다.
‘민혁이 그 녀석이 곧 알게 될 거라고 하던데, 그게 이것이었어?’
처음 KM 센서 지분을 달라고 협박할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절대로 과한 조치는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이 가진 KM 센서 지분만으로도 KM 그룹 회장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길모 차장이 사장단 회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정된 보고서를 들고 와서는 장승일 실장에게 내밀고 조용히 사라졌다.
장승일 실장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에 혀를 찼다. 그는 특히 할 수만 있다면 눈빛만으로 자신을 살해하고 싶어 보이는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에 슬쩍 몸을 돌렸다.
[오성 그룹, HY 그룹, LC 그룹 측에서 MPEG-2 특허 관련 미팅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룹 차원에서 이번 계약을 빨리 진행하고 싶다고 합니다.]
[MPEG-2 특허? 그건 우리 소유가 아니잖아.]
[네. 벨린 투자 소유로 결국 최민혁 실장님이 오너입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측과는 연락되지 않아서 직접 연락해 온 것 같습니다.]
[그래?]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곧 걸려온 전화를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는 놀랍게도 오성 그룹의 안건민 회장이었다.
그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사과하고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KM 그룹 계열사 사장단의775 시선이 달라졌다. 그들도 이제야 KM 센서의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자리에 앉은 채 분노한 코뿔소처럼 씩씩거리기만 했다. 지금 그가 성질대로 나서봐야 본전도 찾지 못한다.
차라리 계열사 사장단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