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
다행히도 곧이어 새 법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법안은 전화 회사, 케이블 TV와 같은 통신 사업을 전면 개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TV 수상기에서 외설적 내용을 차단해야 하고, 인터넷 온라인 업체에 외설 게시물 전송에 관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 법안은 하원과 상원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된 내용이었다.
다만 법안 자체가 적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내 통신업자 기준이었다.
반면 외국의 사업자에게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제약을 걸어 버리는 일이다.
이는 미국이란 나라의 정치 이념과는 대립하는 일이었다.
클린턴 대통령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오직 미국 경제긴 했지만 이왕이면 해외 사업자가 미국 내에 들어와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길 바랐다.
[외국인은 통신회사 운영권 취득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말이 없어?]
[민감한 문제라서 일단 당초 법안에서는 삭제되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인상은 잔뜩 찌푸렸다. 그가 원하는 것을 장관이 모를 리가 없다.
[이게 도대체 뭐야? 눈 가리고 아웅 하자는 건가? 아니, 그러면 외국 업자는 통신사업에 전혀 손도 못 댄다는 소리야? 그래도 괜찮아? 이거 정말 문제가 없는 거야?!]
명확한 법안 규정은 없었다.
하지만 관례적인 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그런 점까지는 다들 눈치가 보여서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 처지에서는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미국 하원, 상원이 정한 일을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투덜대면서 법안에 서명했다.
그제야 자신의 정치 이념과 반대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이와 관련해서 미 하원에서 보고서를 올린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이는 물론 11위원회에서 따로 검토된 후에 보고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상한데, 뭐가 빠진 것 같잖아.]
클린턴 대통령은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버트 루빈 장관을 쳐다보았다.
[로버트 장관, 저번에 보고한다고 한 것은 어떻게 된 거야? 그, 뭐야 외국 규제 보고서!]
[아, 그게 아직 재무부 내에서 검토 중입니다.]
[이상하네. 그거 시간이 제법 지나지 않았어? 이미 하원에서 다 검토가 된 사안인데, 뭐가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로버트 루빈 장관은 푸념하는 클린턴 대통령 때문에 덩달아서 다른 장관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다들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말이다. 그런데 올해 말에 클린턴 대통령 재선이 있다. 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관련이 있다면 지금 얘길 해야 했다.
[그게, 사실은…….]
이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과 지금까지 그가 이룬 실적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괜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움직여 온 동선까지 상세하게 말했다.
클린 대통령조차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고 듣다가 뒤늦게 DVR 납치 소동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사실 최민혁 실장이 사기를 치든, 공매도를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지지율에 영향을 줄 요인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미국 행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부분 말이다.
[잠깐만. 지금 재무부에서 하는 그거 말이야. 추후 외부에 알려져도 문제는 없겠지?]
[그게 좀…….]
예민한 사안이라서 로버트 루빈 장관은 입을 슬쩍 다물었다.
안보 보좌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고위 관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이들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 같아도 저런 일에 자칫 삑사리가 나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정신이 나간 미국 언론이 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들 중엔 미국 정부의 협박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강성 기자도 많았다.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의 표정이 아주 달라졌다.
[안보 중요하지. 그런데 최민혁 실장인가 하는 친구가 우리 미국 국익에 반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사전에 그 친구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 아냐?]
[이 사건은 우리 재무부에서 결정한 사안이 아닙니다. 미국 하원에서 사전에 검토된 내용입니다.]
물론 상원에서도 따로 은밀하게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모건 스탠린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모건 스탠리에 투자한 이들 중에는 미국 상원, 하원 의원이 상당수가 포함된다. 물론 대다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한 일이라서 겉으로 봐서는 알기 어렵다.
클린턴 대통령이 그런 내막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에 똥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굳이 그들 일에 개입해서 대립할 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란 녀석은 뭐지?’
[아, 그러니까. 미국 하원이 검토했다고 해서 우리가 꼭 그 결정을 따를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래, 보안이 중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최소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할 것 아냐!]
문제는 그렇게 좋게 말해서 최민혁 실장이 과연 자기 이권을 내놓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미 과거 전례가 있듯이 그렇게 쉽게 상황이 결론 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건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원하던 그림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로서도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미국 정부 기관이 지켜본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실무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일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그런 일까지 일일이 들춰볼 정도로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다.
[정말 문제가 된다면, 굳이 이 시점에서 일을 벌여야겠어? 에플 CES 전시회에서 차기 제품을 내놓는다고 난리잖아. 심지어 애니란 인공지능이 탑재된 제품이라면서?]
‘애니’ 말이 나오자 백악관 회의실 분위기는 싸하게 흘러갔다.
인공지능 기술은 의외로 가벼운 조크식으로 많이 거론되었다.
특히 스티븐의 행보가 워낙에 극적이어서 클린턴 대통령도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
[이제 한창 뭔가 해보려는 에플 사업 한복판에 있는 최민혁 실장이란 친구를 건드려서 대체 무슨 문제를 만들 생각이야?!!]
[…….]
클린턴 대통령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도 말하고 나서야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안보 보좌관을 비롯한 FBI, CIA 국장은 다들 서로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이번 일에 절대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원칙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봐, 로버트, 도대체 왜 그래? 자네가 정보기관 요원은 아니잖아. 괜한 사소한 일을 키워서 문제를 만들지 좀 마.]
[…알겠습니다.]
[아니, 이건 경고야.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미국 대통령이라지만 미국 재무부 물갈이 정도는 할 힘이 있어!]
[…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미국 정보기관 책임자는 다들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역시 골치가 아팠다. 막상 클린턴 대통령이 원하는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일이 잘 풀린 것 같지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노린 것이 결국 이거였나?’
생각해 보면 DVR 이벤트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그다음은 갑자기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인 미국 언론이었다.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벌떼처럼 모여들어서 이 사태를 키우고, 또 키웠다.
특히 미국 경찰과 FBI의 무능을 집중적으로 갈아 버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보면 최민혁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그 역시 추가로 캘리포니아 지역 경찰에게서 올라온 보고서를 떠올렸다. 최민혁 실장이 무리수에 무리수를 둔 것을 안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결과적으로 최민혁 실장이 결코 과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승부수를 던진 건가?’
하면 최민혁 실장의 다음 수도 고민을 해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우려가 그저 단순한 우려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일단 최민혁 실장 주변을 다시 파 봐야겠어.’
* * *
미국 사회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민혁 실장 자신이 2조 6천억을 벌어들였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분위기는 전부 구출된 아홉 소녀들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앳된 소녀가 납치되어서 노예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모습에 미국의 모든 언론이 달라붙어서 열심히 반응을 부풀렸다.
최민혁은 딱히 소녀가 입원한 병원까지 갈 생각은 없었지만, 소녀의 어머니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병원을 찾았다.
담당 의사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몇 개월만 더 있었다면 이들 중에 반 이상은 사망했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가장 컸다.
그다음은 폭력과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더욱이 환경 자체가 밀폐되어서 폐에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
부랴부랴 의사들이 나서서 손을 쓴 덕분에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특히 정신을 차린 아이 중의 하나인 줄리아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최민혁 실장에게 ‘고맙습니다’란 말만 반복했다.
최민혁 역시 억지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병원비는 내가 다 지원할 테니까.”
이에 대답을 한 사람은 줄리아 부모였다.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아닙니다. 미국에 와서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사건에 많은 책임을 느낍니다. 제가 좀 더 노력했다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최민혁 실장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물론 미국 경찰이나 행정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저로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노력했다면, 그들과 소통해서 협상했을 겁니다. 미국 지역 경찰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네.”
조금 이상한 논리에 줄리아 부모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런데 딱히 따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병원비뿐만 아니라 줄리아 세 자매의 학비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납치 사건과 학비 지원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눈빛은 아주 달랐다.
병원 안으로 들어와서 최민혁 실장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던 기자는 최민혁의 이 모습을 미국 전역에 방송해 버렸다.
그들은 마치 깊은 감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충혈된 눈으로 최민혁 실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은 덕분에 그 눈물 흘리는 소녀의 모습과 함께 미국 전역에 자기 모습을 알렸다.
그 과정에서 그가 한 일 역시 널리 퍼졌다.
아니, 납치 사건이 고작 1이었다면,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무려 30 정도였다.
특히 KM DVR를 둘러싼 개발 비하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너무 잘나가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너무 과해도 문제가 돼.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야.’
“…….”
조성돈 팀장과 김명준 과장은 슬픔에 가득 잠겨 있는 주인공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가끔은 최 실장님…….’
* * *
최민혁은 겨우 기자들 인터뷰에서 빠져나와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특히 슬픈 자화상 같은 표정을 바로 바꾼 채 투덜거렸다.
“젠장맞을,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누가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정해서 한 일이었다.
마치 카멜레온 같은 표정 변화에 조성돈 팀장은 한동안 최민혁 실장 눈치만 봤다.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조성돈 팀장을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연락 온 것은 없나요?”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걸려온 전화 명단을 확인하면서 쓱 다 넘겼다.
그런데 한 사람은 좀 달랐다.
바로 이번 DVR 사업과 관련이 있는 책임자인 최영란 본부장 말이다.
최민혁은 결국 최영란 본부장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제 통화되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