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73화 (770/1,021)

#773.

“설마 우리 재무부의 견제를 의식했다는 말입니까?”

로버트 루빈 장관 역시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이건 최민혁 실장이 이전에 보여주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지금까지 거의 외부에 얼굴을 잘 노출하지 않은 은둔 투자가였다.

“그렇지 않을까? DVR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툭 튀어나왔어. 그게 최민혁 실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아?”

“…알겠습니다.”

서머스 부장관 역시 로버트 루빈 장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가 로버트 로빈 장관을 싫어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하긴 최민혁 실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니까.’

* * *

서머스 부장관은 딱히 자기 머리를 굴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 정부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행동했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는 일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억지로 밀어붙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로버트 루빈 장관의 지적처럼 이번 건으로 자칫하면 클린턴 행정부의 재선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면,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다시 모인 최민혁 실장 전담 팀 역시 최민혁 실장과 관련해서 미처 간과했던 문제를 찾아냈다.

이를 발견한 건 바로 스티븐 키렌 차관보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스티븐 키렌 차관보가 내놓은 것은 팀에서 다시 재검토한 내용인데, 바로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낸 세금과 관련된 부분이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자산을 이루어왔는지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최민혁 실장의 시드머니 규모였다.

“10만 달러?”

서머스 부장관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자료를 살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조사 팀은 다들 아직도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최민혁 실장이 자산을 축적한 과정이었다.

시작은 고작 10만 달러.

여기에 지인에게서 다시 빌린 40만 달러.

고작 50만 달러를 가지고, 한국 주식시장에서 종잣돈을 만들었다. 그 돈을 다시 불리고 불려서 투자 자금으로 만들었다.

덤으로 KM 전자 덩치도 같이 키웠고 말이다.

“…이거, 진짜야?”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굳은 얼굴은 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국 국세청에서 사전 조사를 통해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큰 오차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국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에 대해 조사를 한 것 때문에 박살이 났습니다. 특히 강상혁 조사국장이 결국 국세청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국세청 내에서 강상혁 조사국장이 퇴출당한 일이 뜻밖에 미국 재부무 회의 내용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 일을 파악한 이는 미국 IRS를 통해서 한국 국세청 인맥과 연락해 정보를 얻었다.

이미 한국 국세청 내에서는 지난 일이었다. 때문에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재무부 관료 처지에서는 실로 쇼킹한 일이었다.

“결국 자신에 대한 내사 때문에 국세청 내의 고위 관료를 날려 버렸다는 거야?”

“심지어 최민혁 실장은 자기 인맥을 국세청 내에 깔았습니다. 지금 한국 국세청은 최민혁 실장 말이라면 우는 시늉까지 할 겁니다.”

“그 정도였어?”

“네.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전광석화였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려 한 강상혁 조사국장을 날린 이후에 국세청 내에 자기 인물을 측근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국세청 내에 자기 인맥을 깔았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한 말이긴 하다.

그런데 사실 한국 국세청 내부는 정말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돈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도 현금으로 말이다.

솔직히 오성 그룹 장학생 때문에 오성 그룹의 영향력도 무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둘이 같이 싸운다면 최민혁 실장 편을 들 확률이 높았다.

그건 단순히 최민혁 실장이 로비해서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 걸어가는 길은 한국 경제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기 때문이었다.

“…….”

서머스 부장관은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계획한 플랜A를 그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최민혁 실장이 재무부 내에도 손을 쓸 확률이 높았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봤다.

그런데 DVR 사태 이후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당장 자신의 반대편 측에다가 로비할 수도 있다.

미국 재무부 내에서 자신을 싫어하는 세력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최소한 재무부 내에서 자신을 끌어내리지는 못한다고 해도 손발을 묶을 수는 있다.

서머스 부장관은 순간 긴장했다. 그는 이제 최민혁 실장을 과소평가할 수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최민혁 실장의 약점을 최대한 찾아봐.”

“…알겠습니다.”

미국 재무부 내에 최민혁 실장 전담 팀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처음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파면 팔수록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둘째 큰아버지마저 감방에 보낼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국세청을 상대로 보여준 최민혁 행동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렇다면 지금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미팅 일정까지 늦추어가며 DVR 설비를 가져와서 쇼를 벌인 것은 재무부를 상대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우리 반대 라인에 로비할 거야. 그 세력을 이용한다면, 최악의 경우 클린턴 행정부의 재선에 빨간불까지 들어올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최민혁 실장 전담 팀을 포함한 미국 재무부 내의 상당한 인사가 다 퇴출당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감방에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보인 행동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서머스 부장관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들은 불신하면서도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 * *

서머스 부장관은 지금부터 최민혁 실장에 관한 재조사를 진행하기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이런 서머스 부장관의 요청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감정이 없는 서머스 부장관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최민혁 실장은 생각보다 철저한 인물로, 자신을 건드린 이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아니, 단순히 그렇게 말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최민혁 실장이 국내에서 벌인 자세한 일이었다.

실적도 실적이지만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최민혁의 위험성을 살피면서 그의 능력에 입을 딱 벌렸다.

“투자의 신이라도 되는 거야?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소리야?”

“한국 국세청으로부터 직접 확인한 사안입니다. 한국 사정에는 저희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미국 내에서 벌인 일 역시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시즈벨을 앞세워서 MPEG-2를 확보한 것은 감탄이 절로 나올 일입니다.”

“하긴…….”

로버트 루빈 장관은 이전에 올라온 것보다 더욱 상세한 최민혁 실장 프로필을 보면서 그저 감탄만 했다.

그는 KM DVR 문제를 생각보다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능하면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보고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좀 더 철저하게 살펴봐.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 * *

최민혁 역시 모건 스탠리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행보에서 배운 것처럼 미국 재무부 내부를 로비스트까지 이용해서 들여다봤다.

그런데 미국 재무부 내부는 의외로 조용했다.

그가 생각한 것과는 반응이 많이 달랐다.

“역시 재선 때문일까요?”

조성돈 팀장 역시 미국 재무부 내부 움직임에 대한 현황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보고서를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에 대한 내무부 내의 반응이 이전과는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기존에는 저와의 미팅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DVR 이벤트 사건과 같은 사태 때문에 미국 언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재선과도 관련되니까요.”

조성돈 팀장은 말을 하면서도 경외의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일단 최민혁 실장의 KM DVR 이벤트는 무시한다고 쳐도 결국 모든 행동이 재무부 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다.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재무부 내부를 파보고 나서야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보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단순한 통찰력만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최민혁은 그런 조성돈 팀장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지금은 이전에 일어난 일을 설명해야 할 시기가 아니었다.

“미국 언론 쪽에는 준비를 잘하고 있죠?”

“네. 가능한 많은 언론사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돈을 아끼지 마세요. 이럴 때는 돈을 써야죠.”

“…벌써 1,000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1억 달러를 넘겨도 되니, 우리 편을 많이 만드세요.”

“워싱턴 포스트는 믿을 만합니다. 그런데 다른 언론사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CNN만 해도 믿어야 할지 선뜻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애초에 CNN 따위를 믿지 않았다.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요는 클린턴 대통령 재선을 흔들 정도 수준이면 됩니다. 로비 금액이 얼마가 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장님이 테러리스트도 아닌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최민혁도 쓰게 웃고 말았다.

“저도 좀 과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일을 할 때는 확실히 매듭을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괜히 어설프게 남겨 뒀다가는 오히려 후환을 만들 수도 있어요. 더욱이 차후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한 작업을 할 때 지금 만들어 둔 기자 인력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여전히 자기 말에 수긍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미국 내무부 분위기를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미국 정부도 사생결단을 내지는 않을 거야.’

* * *

로버트 루빈 장관은 오늘 백악관 모임에서 가능하면 조용히 있으려고 했다.

다행이라면 오늘 백악관 모임 주제가 자신과는 별 상관 없는 것이었다.

바로 북한 핵 문제다.

[이번 북한 홍수 피해 때문에 식량난이 급증한 것 같습니다.]

홍수로 말미암은 식량난 때문에 북한 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정부 처지에서는 이 호재를 북한 핵 문제와 결합해서 이용해야 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안보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재선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의 처지에서는 다소 영양가 없는 소재였다.

[아쉬운 것은 북한이잖아. 굳이 우리나 한국이 나서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인권 단체에서 북한 식량 지원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걔들은 알아서 하라고 해.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

물론 클린턴의 푸념을 그대로 듣는 미국 고위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안보 보좌관이 나서서 침을 튀겨가면서 이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식량 문제를 잘만 이용하면 한동안 북한이 핵을 가지고 사고 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재선 전까지 말하는 거야?]

[네.]

[글쎄, 내 생각은 좀 달라. 의식하면 할수록 그놈들이 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거야.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최선이야.]

북한 핵 문제는 단기에 끝낼 일이 아니었다. 사실 클린턴 처지에서는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전임 정권과도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 북한 핵 문제는 대충 넘어갔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한 핵 문제 협의 덕분에 시간이 제법 지났다. 조금만 더 지나면 된다.

그는 가능하면 클린턴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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